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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79화 (79/114)

79화

이렇게 바로 임무에 나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치영은 침대 위에서 물들였던 뺨보다 더욱 상기된 표정을 했다.

그 꼴을 본 기백한의 성질이 뒤틀렸다.

‘이것 봐라, 지금 누구 밑에서 빠져나온 건데 아쉬운 표정도 안 하고.’

원체 더러운 성질머리에 불쑥 짜증이 솟았다.

“야, 표정 똑바로 안 하지. 지금 너랑 나랑 저기서—. 아니다, 됐다. 내가 뭔 말을 하냐.”

“이 호텔에 헬기장 있습니까?”

치영은 가볍게 백한의 말을 무시했다. 원체 백한의 말을 한 귀로 흘리는 데에 익숙해진 터라, 그의 말투 속에 앙금처럼 남은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치영은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아예 침실을 먼저 나서기까지 했다.

조약돌 같은 뒤통수를 쳐다보던 기백한은 밀려오는 빡침에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별일 아닌데 부른 거면 센터장의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카락부터 뽑아 버리겠노라 다짐했다.

먼저 나가 출입구에서 대기 중인 치영을 지나치며 백한은 객실을 나섰다. 짧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올라올 때 들었던 청아한 종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옥외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치영의 말대로 헬기가 올 것이다. 미리 연락을 받은 것인지, 엘리베이터의 송‧수신구에서 버틀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헬기가 대기 중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셨기를 바랍—.

기백한은 그대로 송‧수신구를 주먹으로 쳐 박살 냈다. 스파크가 튀며 버틀러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따라 타 있던 치영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전선이 찢기고 철이 우그러져 팬 곳에서 주먹을 꺼내면서도 그의 손등은 백옥같이 깨끗하기만 했다. 움켜쥔 주먹 주위에서 스파크가 튀는데도 말이다.

백한이 치영을 보며 뱀같이 서늘한 눈을 했다.

“뭘 봐.”

“…….”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럴 때 잘못 걸리면 제 신세만 복잡해진다는 걸 지난 몇 년 동안 저 또라이의 각인 가이드로 살면서 터득했다. 값비싼 배움이었다.

다행히 움직이는 것에는 별문제 없는 건지,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최상층을 향해 올라갔다.

역시나 청아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미친 듯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대대장님, 안 소위님!”

헬기는 착륙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문을 연 채 매달려 스키드에 한 발을 내린 이는 허인나였다.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제 쪽으로 오라는 소리 같았다.

밧줄로 된 사다리를 내려 준 것도 아니고, 착륙하지도 않은 헬기에 어떻게 올라타라는 건가 생각한 순간, 기백한에게 허리가 붙잡혀 달랑 들어 올려졌다.

‘또 이 자세구나.’

이제는 아예 체념이 들었다. 기백한은 그대로 치영을 안아 들고 저들의 무게를 극도로 가볍게 만들었다.

중력이 없다시피 한 상태에서 에스퍼의 비인간적인 근육이 폭발적인 힘을 만들어 내면, 물리값은 그대로 간직한 채라 힘의 증폭 현상이 생긴다. 덕분에 기백한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신체로도 대공포와 같은 위력을 지니게 된다.

기백한은 가뿐하게 공중을 밟고 날아올랐다. 꼭 허공에 지면이 있는 것처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치영은 언제 봐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고 있으니, 평균보다 떨어지는 치영의 인생이 얼마나 하찮고 미련해 보일까.

치영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린 듯 유려한 턱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정말로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생김을 하고 있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기적이나 다를 바 없는 것들을 숨 쉬듯 행하면서도 냉엄한 얼굴을 한 기백한에게서는 아주 아름다운 오만이 느껴졌다.

그는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위해 간절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단 한 번도 무언가를 갖지 못해 절망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기백한과 안치영은 다른 종족일 수밖에 없다. 저와는 확연히 다른 종을 사랑하게 된 죄로, 치영은 때때로 고통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공중에서 정지 비행하고 있던 헬리콥터의 근처까지 도달한 기백한은 스키드에 한 발을 걸친 채 치영을 먼저 기내에 태웠다.

치영은 허인나가 뻗은 손을 맞잡은 채 힘을 주어 기체 내에 올라탄 뒤 뒤를 돌아보았다. 기백한이 심드렁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기체 내로 들어오자 허인나가 문을 닫은 뒤 두 사람에게 마이크 달린 헤드셋을 내밀었다. 치영이 헤드셋을 착용하자마자 인나가 말했다.

“좋은 거 드셨다면서요?”

“네? 아…….”

저 혼자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걸 먹고 온 게 마음에 걸렸다. 물론 백한도 함께이긴 했으나 그런 인간이야 있으나 마나 한 것 아니겠는가.

민망해진 치영은 다음에는 허 중위와 춘란대 사람들도 모두 함께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숫기가 없어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기백한이 시큰둥하게 대신 대답했다.

“인나야, 나한테도 물어봐라. 좋은 거 다 차려 놓고 입도 못 댄 건 난데.”

그 말에 치영은 의아한 기색을 했다. 백한이 오늘 음식을 남겼던가? 잘 처먹었던 것 같은데. 관심이 없어 자세히 보지 않았다.

치영의 의아한 표정을 흘끗 본 기백한이 한쪽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아예 고개를 돌리고 치영만 볼 수 있게끔 입 모양으로 말했다.

‘너 못 따먹었다고.’

아, 또 개소리였구나. 치영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허인나는 좌석 밑에서 작전복을 꺼내 백한과 치영에게 차례로 건네고, 작전 브리핑이 송출되고 있는 패드를 백한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미확인 비행체가 38분 전 서해 상공에서 백령도 부근으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해군이나 공군 쪽은 아닌 것 같고 정체를 밝히라는 무전에는 무 응답한 모양입니다. 근데 이게 기체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레이저가 발견한 것도 느렸습니다.”

“그럼 뭐. 비행 에스퍼라 이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총 4명에서 5명 정도로 추정 중이랍니다.”

“추정 중은 또 뭐야.”

“레이더가 생체 신호는 잘 못 잡아서. 그나마 잡은 것도 기술이 어마 무시하게 발전한 거라던데요?”

“지랄들 하네. 에스퍼 파장은.”

기백한이 미간을 좁혔다. 심기가 영 불편한 듯했다. 다른 에스퍼들이라면 성질머리가 개 같은 상관의 눈치를 슬쩍 보았겠지만, 허인나는 코를 팠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콧구멍을 후빈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치영이 뭘 주목하고 있는지 모른 채 말을 이었다.

“그게, 파장 레이더에도 안 잡힌 모양입니다. 그럼 최소 성층권까지는 뚫었다는 얘긴데, 비행 에스퍼들이 비행은 잘해도 호흡이 딸려서 성층권 뚫고 나는 놈들은 드물지 않습니까. 그것도 좀 수상합니다.”

기백한은 점프슈트처럼 생긴 작전복을, 입고 있던 옷 위에 걸치고 있는 치영에게 패드를 말없이 넘겼다.

치영이 그것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아 들자 한쪽 눈썹을 올리며 짜증이 스민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안 차리지. 아직도 디너 코스 기다리는 중 같아? 빨리 작전 개요 확인하고 외워.”

“예.”

치영은 군말 없이 대답한 뒤 패드에 고개를 박았다. 작전 개요를 훑는 눈동자가 휙휙 돌아갔다.

* 금일 22시 31분경, 백령도 주둔 해군 함선 순위함 레이더에 미확인 비행물체가 감지.

* 순위함의 함장은 즉시 서해 항공을 향해 무전을 송신, 비행체와의 교신을 시도하였으나 3차례의 교신 시도를 상대측에서 모두 무시함.

* 함장은 서해 공군에게 위의 사실을 알리고 초음속 미사일로 비행체를 조준, 마지막 경고를 실시.

* 경고를 무시한 비행체에 미사일을 발사, 격추 시키지 못하고 불발.

치영은 상기 내용들을 확인 후 허인나에게 패드를 돌려주었다. 허인나가 바로 데이터를 삭제하였다.

치영은 헬리콥터의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에 휩싸인 경기, 인천 부근에서 불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 서해 바다 근처로 향하는 모양이다.

치영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계속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 비행체의 예상 착륙 지점으로 가는 겁니까?”

허인나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더니 백한이 그녀를 보기 전에 금세 내리고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예, 맞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웃음이 치영을 칭찬하는 듯해 약간 붉어진 얼굴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착륙 지점에 춘란대 대원들이 모두 잠복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인근 상공에서 낙하산으로 착륙할 예정입니다. 프로펠러 소리가 시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낙하산…….”

“괜찮습니다. 신호가 오면 줄만 당기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대대장님이 다 잘 잡아 주실 겁니다.”

허인나의 설명에 치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초등학생 공부방이야? 눈높이 교육 그만하고 낙하산이나 메.”

백한이 어느새 상의를 벗어 던진 채 점프슈트의 퍼스너를 올리고 있었다. 상공이라 다소 추울 법한데 끄덕 없어 보였다. 치영은 그걸 보며 ‘원래 벗고 입는 건가 봐…….’ 하고 후회했다.

“예, 알겠습니다.”

평소에는 백한의 말에 딴지를 잘 거는 허인나조차 이번에는 표정 없는 얼굴로 빠르게 대답했다. 덩달아 긴장한 치영이 제 몫의 낙하산을 찾을 때였다.

백한이 손날로 치영의 목덜미를 가볍게 치더니 쯧, 혀를 찼다.

“넌 형 있는데 무슨 낙하산이야. 그냥 안겨 있어. 가볍게 내려드릴게.”

이 상공에서 무슨 수로? 그가 중력을 다루는 에스퍼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오금이 저렸다. 치영은 기백한보다 인간이 만 년 동안의 지식을 함축하여 개발해 낸 낙하산을 믿고 싶었다.

“전, 저도 낙하산이면…….”

“허 중위, 밑에서 봐.”

치영의 의견은 기각되었다. 그가 치영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헬기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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