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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78화 (78/114)

78화

백한의 목은 굵고도 길었다. 자잘한 근육들이 달라붙어 다른 짐승들과는 다르게 그곳이 급소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백한을 더욱 강인한 무언가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같은 남자인데도, 또 자신의 체격이 작지 않은데도 기백한과 저는 종이 다른 것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그가 샴페인을 삼킬 때마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목울대마저 강인해 보였다. 치영은 그걸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기백한은 지금 에둘러서 치영을 유혹하는 중이었다. 적어도 치영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목이 타는 기분을 느끼며, 치영은 서둘러 말했다.

“…저 갈 겁니다.”

“가긴 어딜 가, 네가.”

백한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샴페인에 젖은 입술이 붉었다. 치영은 어렵사리 고개를 돌렸다.

사실 기백한을 좋아한다고 한들, 치영은 욕구 자체가 많은 편이 아니라 그와의 깊은 관계를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의 애정을 갈구해 본 적 없는 욕심 잃은 짝사랑이 그와의 성애는 더더욱 자신과 먼일이라 지레 짐작한 것이다.

애초에 기백한은 가이드 남성을 혐오해, 그들이 닿기만 해도 헛구역질을 해 댔다. 오히려 치영에게 하는 태도가 다른 남성 가이드들에게 하는 행동에 비하면 유순해 보일 정도로 혐오했다.

지금이야 입도 맞추고 스킨십을 하는 편이지만, 아직도 다른 가이드 남성들에게는 역겹다는 태도를 숨기지 않고는 했다.

그를 좋아해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 나쁜 놈을 상대로 성적인 망상을 하기란 힘들다.

욕구가 별로 없기도 하고, 아침에 처치가 곤란해지는 꿈을 꾸는 일도 드물었다.

근래 들어 노골적으로 변한 기백한 때문에 곤란하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다음 날이 되면 그는 어김없이 싸가지를 상실하는 데다가, 아무리 욕구에 찌든 인간이라도 기백한 같이 말을 못되게 하는 자식과 5분만 붙어 있으면 모든 욕망이 가라앉는 탈력감을 느낄 것이다.

그 때문에 치영은 백한의 파장이 저릿하게 저를 감싸고 있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온몸에 긴장감이 들었다.

문득 지난번 아래를 맞대고 그가 제게 저질렀던 짓들이 떠올랐다.

그 감촉과 감각들, 기백한의 숨소리와 뜨거운 체온, 그의 목덜미와 귀 뒤에서 어렴풋이 맡을 수 있었던 목련과 작약의 향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백한은 그런 치영의 상태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샴페인 병을 내려 둔 채로 가까이 다가왔다.

치영은 그가 더 수작 부리기 전에 다짐하듯 말했다. 더는 끌려다니기 싫었기 때문이다.

“…갈 겁니다, 진짜로.”

“센터에 애인 숨겨 뒀어? 나는 어쩌고. 너 가면 이거 울어.”

기백한이 치영의 손을 잡아 제 허벅지쯤에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에 와 닿는 촉감에 치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떼어 냈다.

“이, 이게 무슨…….”

“몇 번 인사했잖아. 내향성이야? 낯 가리네.”

개소리가 선명하게 들려 치영은 민망했던 것도 잊어버렸다. 쓰레기에 닿은 것처럼 손을 털며 인상을 찌푸렸다.

“개수작 좀 작작하십쇼. 전 갈 거라고 했습니다.”

백한이 그런 치영의 손목을 잡아 제 품 안으로 잡아끌며 낄낄 웃었다.

“꽤 귀엽단 말이야.”

백한의 말에는 애정이 없었다. 그렇게 가벼운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사물에도 쓰일 수 있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기분 좋을 것 없었다. 그러나 백한은 늘 선심 쓰듯 말했다.

“안치영아, 형 좀 봐 봐. 이제 너 안고 있어도 구역질도 안 하잖아. 연습했다니까.”

“지랄 나셨습니다. 칭찬이라도 해드려요?”

치영은 진심으로 증오를 담아 백한을 노려보았다. 눈에서 불꽃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그 말에 백한이 눈물점이 휘어져라 웃더니 치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에서는 샴페인 향이 났다. 치영은 그 달큼한 향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계속 그렇게 건방지게 굴어. 이젠 너 그러는 것도 예뻐 보이더라.”

미친 새끼. 치영은 어느새 제 허리를 감고 있는 백한의 팔을 풀어내려고 노력하다, 완력 차이에 지고 말았다.

결국 백한은 치영을 제 옆구리에 끼고 침실까지 끌고 들어가며 입술부터 빨았다. 그의 입술은 살짝 달았다. 샴페인 때문인 듯했다. 그는 어느새 입고 있던 재킷까지 허물처럼 벗어 던진 채였다. 손이 무척 빨랐다.

치영은 버둥거리며 백한의 턱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지금 당장 에스퍼로 발현해, 이 변태 새끼를 죽어라 패 주고 싶었다.

“버둥거리지 마. 나만 좋자고 이래?”

하는 말까지 저질이었다. 치영은 얼굴만 잘생긴 치한에게 입술을 내주며 고간을 걷어찰 각을 재고 있었다.

에스퍼라고 해도 거기가 강철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닐 테니. 게다가 치영은 에스퍼의 다리 사이를 냅다 후려 찬 경력이 있었다. 이번에도 각도를 잘 노리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맞붙은 입술이 틈을 내주지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은 이미 침대 위였다. 푹신한 침대에 치영의 등이 닿자, 백한이 한 번 더 치영을 밀어붙였다.

말캉한 점막을 벌리고 들어온 혀가 주인처럼 뻔뻔하게 안쪽을 후벼팠다.

혀끝을 세워 입천장을 죽 긁어낼 때마다, 치영은 터져 나오려는 숨소리를 참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

입술 사이로 공기가 새어 나오듯 소리가 터졌다. 백한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여실했다.

그 느낌에 저도 모르게 눈을 뜬 치영은, 동공이 확장된 채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키스하고 있는 백한과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파충류의 그것처럼 확장된 동공이 기이할 정도였다.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것은 상상 이상의 감각을 초래한다고 했다.

기백한도 그런 걸 느끼는 걸까. 그것도 자신에게? 그렇게 저를 멸시해 놓고서, 가이딩 한 번에 동공이 풀리다니.

짐승 같은 새끼라고 치영은 욕을 짓씹었다.

그가 입술을 떼어 낼 때는 촉, 하고 의외로 아기자기한 소리가 났다.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하고 기백한은 고개를 젖힌 채 그르렁거렸다.

“하, 기분 죽이네.”

“…….”

“거봐, 구역질도 안 하잖아. 네 마누라 노력한 것 좀 봐라. 예쁘지 않냐?”

치영은 대꾸하기 싫어 눈을 감아 버렸다. 기백한은 정말 일을 치를 작정인지 제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치영 위에 올라타 있던 몸을 일으켜 얇은 니트를 벗으려 하고 있었다.

치영의 골반 위에 올라탄 그의 한쪽 허벅지가 유달리 부풀어 있었다. 팽팽해진 허벅지 윤곽에 치영은 이미 반쯤 질린 참이었다.

‘발로 걷어차도 끄떡없을 것 같아. 너무 크고 강해 보여서 짜증 나.’

고간을 걷어차기도 전에 기세에서 진 치영이 저를 내려다보는 걸 요깃거리로 삼는 듯한 기백한의 시선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을 때였다.

거실과 침실 경계선에 허물처럼 떨어져 있던 재킷에서 삑삑거리는 소리가 났다. 재킷 안쪽에 있던 기백한의 호출기에 불이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백한은 무시했다. 치영의 목덜미를 핥으며 거친 숨을 불어 넣느라 바빠 보였다. 치영은 그의 가슴팍을 짚고 밀어내려 노력했다.

“호출 들어왔습니다.”

“형도 귀 있어요. 무시하는 중이니까 예쁜이도 협조하셔요.”

백한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대답한 뒤 치영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쇄골과 목덜미의 틈새를 핥는 혀가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맞닿은 부분을 통해서도 가이딩이 빠져나갔다. 치영은 무의식적으로도 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또 한 번 호출기가 울렸다.

삐—. 삐삐—. 삐.

모스부호로 전송된 센터 내 코드 블랙 신호였다.

“…씹.”

기백한은 욕을 짓씹으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갔다. 어느새 벗어 던진 니트 때문에 산맥같이 넓은 등이 아래로 굽이치듯 굽혀지며 호출기를 집어 드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마냥 갑갑하게 느껴지던 무게가 제 위에서 사라진 탓에 오히려 허전했다.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코드 블랙이 떴다는 것은 꽤 심각한 일로 센터에서 백한을 불렀다는 것이다. 센터장은 웬만해서 백한을 호출하지 않았다.

기백한이 끼면 일 해결은 쉬워지지만, 갑작스레 불려 나온 기백한을 감당하는 것이 더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군부에서 막대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기백한, 기백연 남매의 부모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센터장은 정치적인 인물이고, 그런 그가 그들 남매의 부모님까지 고려하지 않고 행동할 리가 없다.

그러니 코드 블랙까지 떴다는 얘기는 꽤 심각한 사항이라는 것이다.

치영은 기백한이 풀어 버린 단추를 잠그며 미간을 찌푸린 채로 호출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흘끗 보았다.

저 신호가 가리키는 등급의 임무라면, 치영이 낄 자리는 없을 것이다. 춘란대는 정예 부대인 만큼 아직 훈련이 완벽하게 되지 않은 치영은 춘란대에 편승하여 코드 블랙의 임무를 나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아마 기백한은 바로 임무 장소로 이동할 예정이겠지. 일행과도 헤어진 지 오래니 혼자 센터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택시라도 잡아야 할까. 치영이 돌아가는 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기백한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멍하니 있어. 신호 뜬 거 들었잖아.”

“아, 저는 알아서 갈 수 있습니다.”

“뭔 소리야. 너도 임무 나가야지.”

치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모르게 백한을 향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갑니까?”

“안 소위야, 너 신병이야? 소위가 훈련 한번 해 봤으면 바로 실전 투입돼 봐야지.”

치영은 숨을 들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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