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77화 (77/114)
  • 77화

    “저런 저질을 봤나…….”

    김이석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먼저 일어나 치영의 손목을 쥐고 있던 기백한이 그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근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살살 긁지?”

    기백한이 순식간에 파장을 부풀렸다. 기백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안치영이 아직 식사도 안 마쳤다. 어딜 데려가려고 그래.”

    치영은 기백한에게서 손목을 빼내려 하며 무슨 상황인 건가 되짚어 보았다. 손목이 잡힌 손은 스푼을 놓지도 못하고 있었다. 입안에 씹고 있던 것이 남아 부지런히 씹어 삼키느라 치영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백한이 피식 웃으며 치영의 손목을 들어 올려 그가 쥐고 있던 은 스푼을 잡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자매님, 하나만 해.”

    “뭘 하나만 하라는 말이냐.”

    “쟤 챙길 건지 얘 챙길 건지 하나만 하라고. 양손에 꽃 들고 싶은 거야, 뭐야.”

    남매 사이의 신경전에 리넨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은 김이석이 텅 빈 앞접시 위에 냅킨을 올려 두며 쯧, 혀를 찼다.

    “백연아, 둬라. 저 자식 정신 못 차렸네. 난 또 식사 자리까지 부르길래 좀 다르다고. 후회해 봐야 정신 차리지.”

    기백한이 그쪽을 향해 또 한 번 싱긋 웃었다.

    “아가리 여무세요. 언제부터 남 일에 관심이 그렇게 많았어. 나도 네 일에 관심 좀 가져 볼까, 친구야?”

    이석이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그동안 치영은 백한에 의해 끌리듯 일어나야 했다.

    이승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왜? 기백한이 어디를 가자는 것이길래 표정들이 저럴까.

    잡힌 손목을 잡아 빼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기백한은 룸을 나오며 흥얼거렸다. 지나치던 종업원들이 살짝 묵례를 하는 걸 받아 주기까지 했다.

    “그래요. 즐거운 저녁이네요.”

    …단단히 돌았나? 왜 저래. 치영은 또 알 수 없는 이유로 저 혼자 기분이 좋아진 백한의 등을 흘기며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여러 번 시도를 해 봐도 잡힌 손목이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끌려와야 했다.

    “어디 가는 겁니까. 그냥 센터 복귀하면 될 걸 왜 숙박을…….”

    “그래, 우리 애기 아무것도 모르지? 컨셉 잘 유지해 봐, 형도 슬슬 흥분된다.”

    변태 새끼가 대체 어디에 스위치가 눌린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의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리더니 문이 열렸다.

    기백한이 치영을 끌어당겨 탔다.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카드 키를 꺼낸 기백한이 그것을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패드에 대자 전자음이 가볍게 들리며 가장 위쪽 버튼인 ‘P’ 버튼이 눌렸다. 층수가 적혀 있지 않은 채 알파벳 ‘P’만 적힌 버튼이 금색으로 반짝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보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올리니 아니나 다를까, 기백한이 치영을 보며 웃고 있었다.

    “이거 꽤 귀여운 걸 왜 모르고 살았을까.”

    약간 간질거리는 눈빛이었다. 눈꼬리 끄트머리가 함초롬하게 휘어져 있었다.

    눈이 웃느라 살짝 늘어진 눈물점이 기백한의 야성을 한껏 누름과 동시에, 그를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치영은 그 점에서 간신히 눈길을 떼어 내며 말했다.

    “…어디 가는 거냐고 물었잖습니까.”

    “맞춰 봐.”

    백한은 치영을 살짝 밀었다.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소리도 내지 않고 아주 조용히 닫혔다.

    치영은 뒷걸음질을 쳤다. 엘리베이터의 유리 벽면을 통해 밤 깊은 한강이 보였다.

    도시의 불빛과 너울 치는 한강을 등 뒤에 두고, 치영은 기백한에 의해 엘리베이터 벽에 등이 닿을 때까지 코너에 몰려야 했다.

    벽에 등이 닿자, 백한이 벽에 박혀 있는 엘리베이터 내부 손잡이를 양팔로 잡았다. 치영을 그 가운데에 가둔 모양새였다.

    불빛을 등진 백한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입 좀 먼저 맞추다 들어가자. 못 참겠네.”

    “그게 무슨 말, 읍—.”

    다음 말은 그대로 삼켜졌다. 백한의 입술이 닿았기 때문이다. 말캉한 입술 살점이 닿았다. 치영의 입술을 핥은 혀가 뻔뻔하게 말했다.

    “바닐라? 마지막에 그런 게 나왔던가?”

    “…….”

    치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후식으로 나왔던 크림 브륄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위쪽에 바삭한 뚜껑을 은 스푼으로 톡톡 두드려 깬 다음 아래의 커스터드와 함께 먹으라던 김한나의 충고대로 맛있게 먹던 도중에 끌려 나왔다.

    얼굴이 붉어진 치영이 백한의 가슴팍을 밀어내려던 순간, 그대로 다시 한번 다가온 입술이 초옥, 소리를 내며 맞붙었다. 안쪽으로 밀고 들어온 혀가 버릇없이 나대는 것이 느껴졌다.

    치영은 앞니로 그걸 꽉 물어 버리고 싶었지만, 밀고 들어온 것이 두꺼워 힘들었다. 신경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아랫배가 묵직한 탓에 바르작거리지도 못했다.

    섞인 것은 혀와 타액인데 어째서 비강 안으로 기백한의 향이 밀고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목련과 자작, 머스크향이 섞였다. 키스를 한다기보다는 화학적 작용을 통해 기백한에게 각인되는 기분이었다.

    맞닿은 살갗으로부터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여실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감각이 뒤죽박죽 섞였다. 혀를 스치는 느낌, 입술 틈새에서 나는 쫍 하는 소리, 기백한의 숨소리와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크게 부푸는 흉곽이 제 가슴팍에 닿는 느낌, 얽힌 다리.

    모든 촉감과 감각들이 치영의 온몸을 쓸어 올리는 것 같았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아랫배가 뭉치는 것을 느꼈다. 묵직해지는 느낌에 귓등이 절로 붉어졌다. 그걸 본 기백한이 피식 웃었을 때였다.

    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최고 등급 객실에 도착한 것이다. 객실은 엘리베이터와 복도 하나로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기백한이 치영의 우묵한 허리 부근에 커다란 손바닥을 대고 슬쩍 밀었다.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밑에 일어난 변화 때문에 걷는 폼이 엉성해졌기 때문이다.

    “뭐야, 흥분했어?”

    기백한이 그런 치영을 껴안으며 낄낄거렸다. 그는 치영의 어깨를 꽉 안아 준 뒤 최고 등급 객실의 문으로 향했다.

    서 있던 버틀러가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전속으로 배정된 버틀러였다.

    누가 있을 줄은 몰랐던 터라 그를 보고 얼어붙은 치영을 두고, 기백한은 아직 허리를 살짝 숙이고 있는 버틀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어어, 퇴근해요. 부를 일 없으니까.”

    “예.”

    버틀러는 군더더기 없는 태도로 짧게 단답한 뒤 몸을 일으켰다. 문만 닫아 주고 갈 예정인 듯했다.

    치영은 먼저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 백한을 따라가다가 버틀러가 제게 인사를 할까 봐 먼저 고개를 꾸벅이고는 걸음을 빨리해 저도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등 뒤에서 문이 서서히 닫혔다. 그러나 치영은 느끼지 못했다. 앞에 펼쳐진 장면이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프레지덴셜 스위트의 넓은 통창으로 서울 시내와 한강이 보였다.

    주백색의 샹들리에가 딱 그 한강처럼 굽이치듯 길게 늘어진 형태였는데, 잘 깎인 크리스털이 수백 개 매달려 반짝거렸다.

    질 좋은 융으로 감싼 소파가 늘어선 곳 외에도 벽면에 붙은 콘솔 위에는 조선백자가 은은한 빛을 발하며 놓여 있었다. 저런 류의 백자를 달항아리라고 하는 걸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매끈한 유약이 발려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어떠한 무늬가 없는데도 단아해 보였다. 그런 백자를 실내 장식으로 쓰는 건 처음 보는 탓에 치영은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백한은 늘 그렇게 치영을 새로운 세계로 이끈 뒤,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그를 두고 어딘가로 가 버렸다.

    그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다가, 거실 옆에 붙은 바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샴페인이 꽂힌 아이스버켓이었다.

    그 옆의 트레이 위 은쟁반에는 딸기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입에 문 듯 볼이 불룩했다.

    “씻고 나와.”

    “…왜 씻으라는……. 전 그냥 센터에 혼자 가도 됩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둘이 잔다는 걸까. 그래서 에스퍼들이 그런 반응을 했던 걸까.

    기백한이 억지로 밀고 들어온 탓에 둘이 같이 잔 적이 많은데도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랫배는 점점 묵직해지는데 도망가고 싶은 느낌이었다. 그게 다 표정에 드러났는지 샴페인 잔을 꺼내던 기백한이 치영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이제 약간 눈치가 와?”

    가늘게 뜬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데 배 속에 쿵, 하고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포식자 앞에 놓인 피식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더욱 원초적인 무언가가…….

    치영이 저도 모르게 작게 뒷걸음질 치자, 샴페인의 병목을 잡은 기백한이 엄지로 마개 윗부분을 누르며 다가왔다.

    웃고 있는 그의 두 눈에 넘실거리는 빛이 비쳤다. 병목 윗부분에 꼬인 철사를 이능을 미묘하게 조절하며 손대지 않고 풀어낸 남자가 자연스레 올라온 코르크를 역시 이능으로 잡아 뽑았다.

    그는 치영에게 잔 하나를 건넨 뒤, 황금색의 액체를 그 잔 안에 쏟아 넣었다.

    기포 터지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스며들었다.

    “…….”

    “…….”

    두 남자는 시선을 마주했다. 치영은 숨을 집어삼켰다. 남자가 치영의 잔을 병으로 살짝 치고는 그대로 주둥이에 입술을 붙인 채로 병을 기울여 샴페인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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