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76화 (76/114)

76화

“자매님, 느그 집 연애 사업이나 신경 쓰세요. 왜 자꾸 날 자극하지?”

“내가 너 같은 개차반 자극을 왜 하지? 나는 안치영을 자극 중인 거다.”

김한나가 기백한을 흘끗 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기백연의 태도 역시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들 악역을 보는 얼굴로 기백한을 바라보는데도, 하마 새끼는 억울한 기색 하나 없이 피식 웃고는 치영의 허리를 끌어당겨 뭔가를 오물거리던 뺨에 입술을 쪽 맞췄다.

“자기야, 여기 개새끼들 너무 많아요. 이만 일어날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서버들이 빙글빙글 돌며 접시를 가져다주는 것도 신기했고, 스파이 활동을 위한 개론 시간에 배운 테이블 매너를 적용해 보는 것도 즐거웠다.

에스퍼‧가이드 특수군에서는 작전을 위한 교양 과목을 필수 수강하게끔 한다. 그 덕에 치영 역시 테이블 매너를 배울 수 있었다.

정석대로라면 양성 학교 시절 교양 등을 수강 후 입대해야 한다. 그러나 치영처럼 바로 입대한 이들을 위한 교육 과정 역시 세심하게 마련되어 있어, 임시 개설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속성으로 배워야 하긴 했지만, 뭔가를 배우는 건 즐거운 일이라 나름 열심히 들었고, 그런 것들을 적용해 본다고 생각하니 살짝 즐거웠다.

‘이건 샐러드 포크‧‧….’

반짝이는 커트러리를 살짝 건드려 보며 속으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은도금이 된 커트러리를 사용해 먹는 음식 역시 무척이나 맛있었다.

씹는 식감부터 맛, 목 넘김까지 훌륭한 음식들이 아직 더 나올 것 같은데 이걸 포기하고 고작 하마 새끼와 일어날 수는 없다.

치영은 새우 꼬리를 나이프로 잘라 입안에 넣으며 대꾸 없이 고개만 저었다. 싫다는 뜻이었다.

기백한은 치영에게 배신당할 줄은 몰랐는지 기가 막힌 얼굴로 치영의 불룩한 뺨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 햄스터 같은 게 튕기긴 왜 튕겨.”

“야, 안 간다잖아. 너 싫어서 죽여 버리고 싶다잖아. 나대지 말고 앉아 있어, 기백한.”

이석이 냉막한 얼굴 위로 입꼬리만 올린 채 그런 백한을 비웃었다. 기백한이 그 말에 스산하게 고개를 돌려 이석을 바라보았다.

“근데 왜 훈수를 두지? 키도 작은 새끼가?”

“키가 무슨 상관이야. 하는 짓거리만 보면 내가 더 형님인데. 그리고 난 상투 올렸다. 어딜 총각이 까불어.”

페어 가이드인 이승균 대위와 각인한 걸 상투 올렸다고 말하는 듯했다.

백한과 치영 역시 각인을 맺은 상태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건 센터의 승인 없이 일어난 사고에 가까웠다.

일반적으로 각인을 하려면 상호 협의하에 관계를 맺어야 했다. 두 사람의 각인은 폭주 위기에 처했던 백한의 파장과 치영의 가이딩 파장이 비정상적으로 얽혀 일어난 사고에 가까울 뿐, 흔히 말하는 로맨틱한 의미가 결여된 채였다.

그러니 이석도 백한에게 총각이라 놀리는 것이겠지. 치영은 심드렁하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백한의 표정이 굳은 채였다.

‘각인 얘기를 싫어하는데 언급해서 그러나.’

기백한은 치영과의 각인에 대한 얘기를 타인에게 듣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저 자신은 입에 곧잘 올리면서도 말이다.

그런 모순을 한데 뭉쳐 태어난 것 같은 인물을 제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치영은 그냥 관심을 꺼 버렸다.

그건 주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들은 기백한과 이석이 으르렁거리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는 태도로 서빙되어 나온 음식을 먹기 바빠 보였다.

춘란대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춘란대에서는 기백한이 조금만 으르렁거려도 앓느니 죽는단 얼굴로 납작 엎드렸다.

아무래도 상명하복을 중요시 여기는 군이라 그렇겠지만, 그보다는 기백한의 힘에 대한 절대적 굴종에 가까웠다. 미친개에게 물리기 싫어 담벼락을 돌아 길을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 중, 기백한의 에스퍼 파장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는 듯했다.

그것은 그들이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에스퍼와 가이드로의 발현을 약속받은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 치영은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난 처음부터 저 하마가 두려워 죽을 것 같았는데.’

그가 다 구부러진 식당 식탁 밑에 들어가 있는 저를 향해 까꿍, 하고 웃던 순간을 기억한다.

치영은 비명을 지를 뻔한 걸 꾹 참았었다. 그가 내뿜는 에스퍼 파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체술이라도 훈련한 덕에 에스퍼를 만나면 도망이라도 쳐 볼 용기가 있지, 그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발견해 낸 그를 향해 안치영은 두려움과 사랑을 한꺼번에 키웠던 것이다.

너무 어릴 때 그를 만난 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한 번 각인된 인상 때문에, 치영에게 백한은 늘 그렇게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이였다.

그의 성격이 개차반에 가깝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는 지금 또한 그가 강하다는 걸 부정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기백한이 강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어 보였다. 치영은 그것이 그들의 단단한 자신감과 건강한 마음에서 나온 철옹성 같은 방어벽임을 알 수 있었다.

치영에게는 선천적으로 부족했던 바로 그것. 그 간극을 메울 수 없어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허덕였던가.

‘하지만 누구에게나 타인과의 차이는 있는 법이니까……. 조급해하지 말자.’

치영은 자신을 타이르듯 생각하며 다시금 반짝이는 포크로 음식물을 콕 찍었다. 사자에겐 사자의 고난이, 뱀에게는 뱀의 고뇌가 있는 법이다.

너무 어릴 때부터 잦은 불운을 겪어 온 치영은 그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왜 나만.’이라는 물음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말이다.

오늘 안 되면 내일 조금씩 더 해 보면 된다. 안치영은 그 생각으로 태산 같은 기백한에게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마음에서 완전히 그를 내보낸 것은 아니다. 치영의 마음은 아직 치영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 안 되면 내일 하면 될 일이다.

절망 속에서 자란 안치영은 오히려 작은 공기에도 호흡할 수 있는 식물처럼 천천히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것에 능했다.

제게 일어난 모든 불행을 관망하며 될 대로 되라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상황을 견디기에는 좋지만, 다음과 같은 상황에는 취약했다.

치영이 음식에 몰두하려 노력하고 있을 때, 기백한은 그런 치영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와인 좀 더 마셔. 술 취한 것 좀 보자.”

그가 상체를 기울이며 치영의 귓등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끈적한 목소리였다. 술자리에서 상대를 유혹하는 듯한 말투와 숨결이었다.

치영은 대답 없이 그의 입술이 붙어 있던 귓등을 손으로 닦듯 문지른 뒤 다시금 식사를 지속했다.

생에 몰아치는 모든 고난을 남의 일처럼 관망하듯 살아온 터라, 기백한 같은 양심 없는 양아치에게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치영은 단 한 번도 백한에게 제게 왜 이러냐고 묻지 않았다. 왜 이렇게 저를 괴롭히고 왜 이렇게 저를 슬프게 하냐고 묻지 않은 채, 내리는 폭우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다른 이였다면 양심이 존재하여 그런 치영을 눈치채고 다가가지 않거나, 아예 끌어당겨 허리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백한의 몰양심은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치영은 귀찮은 날벌레를 치우듯 귀를 문지르는 것만으로 제 모든 거절을 다 해 놓고는, 무방비하게 와인 잔에 입술을 댔다.

“근데 술 마셔도 됩니까? 대리도 못 부르는데.”

육류의 진한 향을 한 번에 훑어가 주는 레드 와인을 신기하듯 바라보다가, 치영이 문득 생각난 듯 백한에게 물었다.

귓등에 입술을 붙여 간지러운 말만 흘려 넣는 것에 집중하고 있던 백한은 치영의 물음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가, 치영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킁킁거리며 대충 대답했다.

“웬 대리.”

“센터 복귀하려면 운전해야 되잖습니까.”

치영이 백한의 턱 밑을 손바닥으로 쭉 밀어내며 대꾸했다. 특수군은 민간인에게 저들의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군법으로 정해 두었다.

에스퍼의 존재가 민간인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같이 개인이 손가락 한 번만 움직여도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에 완전히 숨기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군부는 에스퍼와 가이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만 인정하지 않고 있다.

느슨한 군법이라도 한들, 센터의 위치는 군사 기밀 사항 중 하나라 대리는커녕 택시로 그 근처를 배회할 수도 없다.

주변 민간인들은 센터가 아직 철수하지 않고 있는 미군 부대 중 하나로 알고 있다. 그 안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타운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리도 맡기지 못하는데 자연스레 술을 마시는 간부들이 신기하여 물어본 것인데, 기백한이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두고 턱을 괴더니 피식 웃는다.

“우리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다 같이 말입니까?”

수련회처럼 다 같이 자는 걸 상상한 치영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수학여행 등을 떠올리며 살짝 기대하는 얼굴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백한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치영의 이마를 검지로 살짝 밀어냈다.

“경험도 없는 게 왜 이렇게 문란하지? 아다 주제에 벌써부터 떼X 뜨자 이거야?”

떼, 뭐? 치영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그러나 더 고민하지도 않았다. 저를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 둘만 올라갈 거야. 방 잡아 놨어. 너 같은 맹추 뭐가 예쁘다고 최고 등급 객실까지 잡아 놨을까, 내가.”

기백한은 치영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치영은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왜 자고 간다는 거야. 내일 여기서 뭐 임무 같은 게 있나?’

백한의 말에 숨겨진 함의를 알아내지 못한 치영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에스퍼들은 그사이에 와인 병을 차례로 비워 나갔다.

잔을 올려 두거나 커트러리가 본차이나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맑기만 했다. 치영은 가만히 음식을 먹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주백색 조명의 프라이빗룸 안에는 꽤 편한 분위기가 흘렀다.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먹고 마시길 즐겼으며, 간간이 던지는 농담들을 들을 때마다 치영 역시 슬그머니 웃고는 했다. 마음 편한 저녁이라고 생각했다.

기백한이 그런 치영의 손목을 잡아끌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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