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뮤즈 부쉬로 나온 것은 토마토 테린이었다. 올리브 오일을 젤리 형태로 굳혀 소스로 올렸는데 농축된 토마토 맛이 혀를 단번에 돋워 주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날름 먹어 버린 접시 위를 아쉬워했다.
‘양이 너무 적어…….’
요즘 내내 에스퍼들과 식사하여 식사량이 늘어난 걸까? 치영은 저도 모르게 아쉬워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저보다 훨씬 더 대식가인 주위 에스퍼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위장이 비는 즉시 폭동을 일으키는 건 치영이 만난 사람 중 가장 점잖은 기백연도 마찬가지인데 이상했다.
그러나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서버가 들어와 다른 접시와 빈 접시를 유려한 움직임으로 바꿔 주었기 때문이다.
접시 위에는 지중해식 문어 샐러드가 있었다. 싱싱한 올리브가 알알이 그대로 들어 있어 식감이 좋았다.
치영은 그것도 게눈 감추듯 먹어 버렸다. 처음 먹어 보는 맛이었기 때문이다.
“식전주로 샴페인도 아니고 스파클링 와인을 시키는 놈은 뭐야.”
“이탈리안 식당에서 샴페인을 찾는 게 훨씬 등신 같다.”
김이석이 냉한 기운을 풍기는 무표정으로 타박하자, 백연이 똑같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대번에 비난했다.
식전주로 나온 뀌베 스파클링 와인을 잘만 마시고 있던 치영은 두 사람의 그런 반응에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은 둥그런 형태였다. 김이석의 옆자리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눈썹 산이 굵고 눈썹뼈가 살짝 튀어나와 남자다운 인상인데 묘하게 다정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키는 김이석보다 크고 백연보다는 살짝 작은 듯했다. 치영보다 시야가 근소하게 위인 것을 보면 180cm는 넘는 것 같았다. 가이드, 이승균 대위였다.
그리고 백연의 옆자리에는 김한나 대위가 앉아 있었다. 동죽대의 에스퍼로 특수군 전문 의대가 아닌 민간 의학 전문 대학원을 나온 인재라고 들었다.
얼굴을 몇 번 본 적이 있어 치영에게는 친숙한 에스퍼였다.
“아무거나 먹어요. 맛있는데.”
김한나 대위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김이석과 백연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에스퍼치고는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일반 성인 여성의 평균 키에 근육량도 적어 모르는 이가 보면 가이드라고 오해할 만했다.
한나의 능력은 치유계로, 사고로 인한 뇌사 상태도 원상 복구 시킬 수 있는 이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그녀가 그렇게 이미 반쯤 죽은 사람을 살려 내기 위해서는 의학적인 전문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녀는 이미 의학 전문 대학원을 졸업 후 국가고시 면허를 딴 전문 의료인이었다.
습득한 지식을 통해 치유계 이능력을 운용하여 뇌사 상태인 사람까지 멀쩡하게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치유계 에스퍼 중 신체 절단부를 재생시킬 수 있는 에스퍼들은 많지만, 중요 장기를 복원시킬 수 있는 에스퍼는 극히 드물다.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퍼들 특유의 신체 구조를 갖지는 못했다.
치영이 오늘 낮에 잠시 발현했다가 이능력이 사라진 공익을 보고도 체구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품지 않았던 것은 김한나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완력만은 치영보다 강했다. 에스퍼들의 유전인자는 그런 것이니 말이다.
“…맛있나. 그럼 됐다.”
백연이 그런 그녀 쪽으로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며 조곤조곤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동죽대에서 백연의 이와 같은 모습을 간혹 보았던 치영은 그러려니 했지만 이석은 아닌 듯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얄팍한 와인글라스에 담겨 있던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토 쏠려.”
신랄한 평가도 함께였다. 옆에 있던 이승균 대위가 살짝 웃으며 그의 앞에 워터 고블릿을 밀어 주었다.
이승균 대위의 생김은 순한 느낌을 주었다. 눈망울도 크고 꼭 대형견 같은 인상이었다. 셰퍼드나 도베르만 같은 사냥개 말고 레트리버 쪽이었는데 과묵한 편인지 말이 많지 않았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그를 더욱 순하게 보이게끔 만들었다.
“그만 투닥거리세요, 영감님들.”
특수군의 령급 장교들은 다른 일반군과는 다르게 막대한 지위를 갖고 있다.
다른 일반군에서의 령급 장교들 역시 간부로 제 역할을 확고히 하지만, 특수군의 령급 장교들은 일반군으로 치자면 장성급 인사들이었다.
그러니 그가 칭하는 영감의 호칭이 감투를 제대로 썼다는 의미라면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김이석이 이승균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턱을 끌어당겨 입술 위에 가볍게 쪽, 하는 소리가 날 만큼 버드 키스를 날렸다.
치영은 금세 두 눈의 초점을 흐렸다. 공공장소에서 가이딩을 나누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또 처음이었다.
와인 메뉴판을 열심히 보고 있던 백한이 짜증을 냈다.
“염병 좀 그만해라. 자매님이랑 김한나 놈 이어 주자며. 네가 왜 쪽쪽 거리고 있는데.”
“뭐야. 여기 그런 자리였어요?”
한나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치영은 백한을 경멸하듯이 바라보았다. 저게 무슨 이어 주는 거야. 눈치 없는 하마 새끼.
백연은 살짝 핏기가 가신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런 건 아니고…….”
“아니죠?”
“…그렇다.”
“좋아요. 밥 맛있게 먹으려고 왔으니까 그런 얘기 그만해요.”
김한나의 깔끔한 정리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덩치를 옹송그린 채 한나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안쓰럽기도 했다.
치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처럼 백연 또한 인복이라고는 없어 친우라는 것들이 도와주지를 않으니 연애 사업이 저토록 막장을 걷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룸으로 들어와 경례 외에는 한마디도 않고 있던 치영이 입을 열었다.
제 코가 석 자인 주제에 누굴 돕는다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쩔쩔매는 백연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에스퍼를 사랑하는 가이드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기 실장님 최근에는 무릎 재활 꼬박꼬박 받으러 가시던데, 많이 좋아지셨습니까?”
“음, 이젠 어느 정도 돌아왔지. 나쁘지 않다.”
샐쭉한 기색으로 접시에 올려진 올리브만 콕콕 찍어 먹고 있던 한나가 치영의 말에 주목하는 기색을 보였다.
사실 김한나가 백연을 싫어해서 밀어내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여 귀를 쫑긋 세우고 있지 않은가.
기백연은 자신의 페어 에스퍼로 김한나를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둘은 같은 팀에서 마음을 쌓고 있었고,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면 무사히 페어를 넘어 각인까지 했을 것이다.
기백연이 작전 중 김한나의 안전을 위해 그녀를 임무에서 배제하고 홀로 적군이 포진되어 있던 암석 동굴로 뛰쳐 들어가는 바람에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그때 백한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어이없는 거지. 김한나가 좋으면 좋은 거지, 임무 배제는 왜 시켜.”
치영은 그렇게 말하는 백한을 조용히 비웃었었다.
백연이 그녀를 위해 임무를 배제시켰던 마음도, 그런 백연의 결정에 위급한 상황이 되면 늘 이렇게 혼자 짐을 짊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실망했던 김한나의 마음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오만한 말이었다.
치영은 문득 자신이 사랑하는 에스퍼가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그 누구보다 오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다 저런 놈을 좋아하게 되어 버렸을까.
이미 가 버린 마음이 돌아오지를 않고 있으니, 그 미련했던 생각을 묻는 것도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김한나가 백연의 무릎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했다. 삶아서 겉면만 튀긴 정육면체 모양의 감자를 포크로 콕 찍을 때였다.
시선이 느껴져 옆을 보니 식탁 위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고 있던 기백한이 아예 치영 쪽으로 몸을 틀어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뭘 봅니까.”
“착해 빠져 가지고.”
기백한은 뜬금없는 말을 했다. 턱을 괴지 않은 팔을 쭉 뻗어 치영의 귓불을 툭 건들기도 했다. 치영은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그 손등을 때렸다.
하지만 백한은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피식 웃기만 했다.
“안치영아.”
“…….”
“그렇게 착해서 어떡할래.”
치영은 무언가가 울컥 치받았다. 백한에게는 제가 우스워 보일 것이다. 후드려 패도 돌아와 낑낑거리는 개새끼처럼 윽박을 질러도 떠나지 않는 제가 얼마나 하찮겠는가.
기백한 앞에만 서면 아주 하찮은 무언가가 된 기분이었다. 그를 사랑하는 것 말고 그와 저는 헌법 아래 존엄을 약속받은 똑같은 인간인데 말이다.
무엇이 너와 나의 차이를 벌려 놓았을까.
치영이 그런 생각을 할 무렵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서버들이 아까처럼 빈 접시와 새 접시를 바꿔 놓았다.
새우와 달래, 감자 퓌레를 넣은 라비올리에 비스큐 소스를 뿌려 내놓은 접시였다. 그 위에는 숯불에 올리브 오일과 레몬즙을 뿌려 구운 대하가 놓여 있었다.
식사 자리가 다시금 부드럽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대대장님이 너무 괴롭히지는 않으세요?”
이승균이 부드러운 말투로 치영에게 물었다. 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괴롭히지 않는다는 답이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괜찮다는 대답이었다. 라비올리를 입에 넣고 있던 김한나가 피식 웃었다.
“대대장님은 어떻게 된 게 가이드 복까지 있습니까? 재수 없습니다, 저렇게 좋은 분을.”
“안 그래도 내가 소개팅 시켜 준다고 했다.”
한나의 말에 와인 잔의 스템을 쥐고 있던 백연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