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치영이 기백한에게 끌려간 곳은 호텔 로비 층에 죽 늘어선 명품 숍이었다.
“이거, 이거, 이거. 입고 나와.”
숍에 들어가자마자 백한은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빠르게 집어 들어 몽땅 치영의 얼굴 위로 던졌다.
미처 받아 들 새도 없이 옷 투척을 당한 치영은 한숨을 쉬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입기 싫네 좋네 하며 입씨름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백한은 마음먹은 바는 꼭 해내는 지독한 하마 새끼고, 고작 인간의 힘으로 성질 더러운 하마에게 대항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종업원이 리셉션 데스크에 있던 호텔리어처럼 그림 같은 미소로 치영을 따라와 직접 탈의실 문을 여닫아 주었다.
치영은 약간 황송한 마음으로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 기백한이 준 셔츠와 팬츠로 갈아입었다. 다행히도 골라 준 이의 더러운 성격처럼 난해한 디자인은 아니었다. 약간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했다. 화이트 셔츠에 어렴풋이 광택이 돌았기 때문이다.
가슴팍에는 역삼각형의 자수 위로 브랜드 명이 양각되어 있었다. 소매 끄트머리에는 얇은 실로 수놓은 작은 데이지꽃들이 있었다.
‘…웬 꽃무늬.’
이런 간질간질한 디자인은 저보다는 기백한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팬츠는 같은 광택이 도는 검은색 팬츠였는데 허리 사이즈가 딱 맞아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안 거야.’
하여간 변태 새끼라는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목깃에 달랑거리는 가격표가 거슬렸지만, 호텔에서 파는 옷들이라 이렇게 비싼가 싶었다.
너무 민간과 떨어진 삶을 살아와 경제 관념이 다소 부족한 치영은 그 옷들이 그렇게 비싼 이유에 대해서 옷 가게가 아닌 호텔에서 팔아 중간 마진을 많이 떼어먹는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치영은 대충 챙겨 입고 밖으로 향했다. 바깥에서 선글라스 하나는 머리띠처럼 앞머리를 걷어 올리고, 다른 선글라스는 콧대에 걸치고 있던 기백한이 보였다.
그 희한한 몰골이 묘하게 어울리는 게 이상했다. 사람이 화려하게 생기면 아무리 과한 짓을 해도 어울리는구나 싶었다. 치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그가 돌아보며 혀를 찼다.
“누가 셔츠 아래 티셔츠 입으래. 가서 벗고 나와. 불태워 버리기 전에.”
“…셔츠를 그냥 입으라는 말입니까?”
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백한을 바라보다가 시야 끝에 종업원이 작게 웃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치영은 당황해 살짝 얼굴이 붉어진 채로 생각했다.
‘원래 안에 아무것도 안 입고 입는 거라고……?’
혼란이 왔다. 물론 치영은 그 부위가 조금 들어가 있어 옷을 입어도 티가 잘 나지 않는 편이었다.
문제는 색이었다. 정점 부근이 살구색보다 연한 분홍색인 데다가 피부가 하얀 편이라 얇은 소재면 그게 비칠 것 같았다.
그래서 늘 안에 티셔츠나 민소매는 꼭 챙겨 입었다. 방금도 치료복 안에 입고 있던 반소매 티셔츠를 그대로 입고 그 위에 백한이 준 것들을 걸쳤던 건데 뭐가 이상한지 백한은 짜증을 내고, 점원은 웃고 있었다.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다시 들어가 티셔츠를 벗고 자개로 만든 셔츠 단추를 다시금 채웠다.
‘으… 느낌이 이상해…….’
맨살에 바로 와 닿는 부드러운 셔츠의 감촉이 낯설었다. 치영은 왼손으로 오른 팔뚝을 쓸어내리며 어깨를 움츠린 채로 다시 밖으로 향했다.
기백한은 누가 봐도 여성용으로 보이는 화려한 다이아몬드가 버클에 장식되어 있는 벨트들을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허리에 걸치고 있었다. 군살은 없어도 골격이 장대하기 때문에 벨트의 버클을 완전히 조이지 못해, 말 그대로 걸친 상태였다.
그뿐 아니라 언제 입은 것인지 치영이 입고 있는 흰색 셔츠보다 몇 배는 화려한 셔츠가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벨트들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셔츠에는 치영의 주먹보다 커다란 칸나 꽃들이 수놓아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잘 어울렸다.
‘거봐, 꽃무늬는 저런 얼굴에나 어울리지.’
치영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그때 백한이 선글라스를 살짝 올려 이제 막 탈의실에서 빠져나오는 중인 치영을 다시금 감시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조금 더 움츠렸다. 팔뚝을 쓰는 손을 빠르게 하느라 제 가슴이 모인 것도 몰랐다.
나름 몸이 좋은 편이라 살짝 두텁게 잡힌 가슴근육이 부드럽고 광택 있는 소재로 된 셔츠 자락 아래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팔을 앞으로 모은 탓에 가슴골 사이에 옷자락이 살짝 끼어 있다는 건 더더욱 눈치채지 못했다.
백한이 희한한 얼굴로 제 가슴만 뚫어지게 보고 있어서 민망한 마음만 들었다. 집요하게 훑는 시선이 점점 짜증 날 지경이었다.
아예 망부석처럼 시선을 고정하고 굳어 있길래 왜 저렇게 쳐다보나 싶을 때쯤, 그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야, 그냥 안에 그 좆같은 티셔츠 꼭꼭 챙겨 입고 나와.”
…저게 지금 누구 훈련 시키나. 치영의 미간이 파삭 구겨졌다.
“장난하십니까?”
“진짜 장난치면 너 여기서 고개 못 들고 나가. 말 들어라.”
뭐에 또 기분이 상한 것인지 잔뜩 으르렁거리며 말하길래 더 대꾸하기도 싫어 몸을 돌려 탈의실로 들어왔다.
같은 옷을 세 번째 입고 벗는 짓을 하고 있자니 대체 뭐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르게 환복한 뒤 입고 왔던 옷가지를 챙겨 나갔다.
백한은 저벅저벅 다가와 치영이 들고 있던 치료복을 점원에게 건넸고, 점원은 친절한 미소로 그것들을 쇼핑백에 담아 주었다.
치영은 계산은 어떻게 되는 건가, 혹시 갖고 있는 아이디 카드의 IC칩으로 가능한가 싶어 기웃거렸다. 그게 안 되면 기백한에게 돈을 꿔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누림동에서만 쓸 수 있는 거니까 안 될 거야.’
그게 아니면 군에서 굳이 나라 사랑 카드를 따로 발급해 줄 이유가 없다. 외부에서 쓰라고 발급해 주는 듯한데, 치영은 오늘 이날까지 센터 밖에서 돈을 써 볼 일이 없었다.
드디어 처음으로 제가 번 돈으로 민간에서 옷도 사 보는구나 싶어 조금 두근거리던 참이었다.
백한이 그런 치영의 목덜미를 잡더니 쭉 밀어 걷게 했다.
“어, 계산은…….”
“끝냈어.”
“아, 그러면 얼마 나왔습니까? 제가 센터가서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그 말에 기백한은 예의 그 희한한 얼굴로 치영을 내려다보았다. 왜 저렇게 보나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드는 눈빛이었는데, 방금 전 숍 안에서의 눈과는 또 달랐다.
그때는 마치 맹수가 금세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 버릴 것처럼 바라보더니, 이제는 이 한심한 놈을 대체 어쩌지 싶은 눈이었다.
멍청이에게 멍청한 취급을 당해야 하다니. 치영은 조금 억울했다.
“안치영아, 내가 너한테 돈 쓰게 하겠냐. 네가 내 가이드인데.”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치영의 손목을 잡아끌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치영은 두 눈을 깜빡였다.
‘뭐? 내 가이드?’
자신이 들은 내용이 실제인가 싶어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 가이드라니. 그런 말이 저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몰랐기 때문에 치영은 오히려 금세 차분해졌다. 백한이 그저 저를 놀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말은 항상 쉽게 하지, 개자식.’
치영은 심드렁하게 제가 들었던 것을 부정했다. 두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을 때, 마침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올라가는 문이 열렸다.
기백한은 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안에 사람이 있다면 내리고 타야 하는 것이 공공 예절일 텐데 말이다.
‘공공 예절은 민간에서도 똑같겠지. 나중에 전역하고 밖에서 살려면 그런 거 하나하나가 중요한데.’
치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잡힌 손목을 굳이 뿌리치지 않고 백한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안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한은 3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고, 곧이어 문이 닫혔다.
치영이 얌전한 눈을 올려 계기판에 숫자가 서서히 올라가는 걸 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기백한이 그를 끌어당겼다.
“뭡니까?”
“가만히 있어. 태그도 제거 안 하고 그대로 입고 오는 멍청이가 어디 있냐.”
아, 상품 태그를 떼지 않았던가. 치영은 조금 머쓱한 심정이 되었다.
그때, 엘리베이터의 구리색 문에 기백한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여 치영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 것 같았다.
치영은 놀라 뒤를 돌아보려 했다.
“뭐 하는 겁니까!”
“가만히 있으랬지.”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머리가 짧았던 것 같은데 사막을 몇 번 갔다 오더니 묶는 게 편하다고 아예 자르지 않은 머리가 살짝 내려와 치영의 드러난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일반군과는 다르게 복장 규제도, 두발 규제도 없는 편인 특수군 내에서 가장 장교답게 머리를 자르는 사람을 뽑자면 하나는 기백연, 다른 하나는 치영일 것이다.
짧게 드러난 목덜미에 백한의 머리카락이 닿자 간지러웠다.
목을 움츠리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에 입술을 말아 무는데, 무언가 실이 툭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놀란 치영이 뒤를 돌아보자 태그에 달린 실을 물고 저를 내려다보는 기백한이 보였다.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입술 사이에 물려 있는 태그를 가져갔다.
“…감사합니다.”
“뭐가. 너 옷 사 준 게? 벗기려고 사 준 거야.”
백한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치영의 귓등을 입술로 살짝 물더니 금세 떨어졌다. 그 순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해당 층에 도착하며 문이 열렸다.
붉어진 목덜미를 문지르는데 백한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치영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치영 역시 걸음을 옮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