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어디 가는 겁니까?”
기백한의 지프가 센터 북문 처소를 지나 외부 도로로 이어지는 2차선을 달리자, 치영은 이쪽을 향해 경례하는 일반병들을 향해 마주 경례하며 물었다. 창밖에는 일반병들이 이동용 바리케이드를 치워 기백한의 지프를 센터에서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백한은 특별할 것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김이석이 곱게 자라서 아무거나 안 처드신단다.”
그래서 누림동 식당이 아닌 서울로 가는 건가? 치영은 자유로에서 강변북로로 이어지는 도로로 빠져나온 차량 안에서 생각했다.
뚜껑을 닫은 지프는 의외로 방음이 좋은지 도로의 소음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한강에는 노을빛의 윤슬이 끼어 있었다. 치영은 그걸 멍하니 보기만 했다.
기백한은 의외로 안전 운전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속도가 느린 것은 아닌데 쓸데없는 브레이크를 잡는 일이 드물고, 다른 차량들이 깜빡이를 틀면 그냥 끼워 줬다.
아무도 끼워 주지 않고 칼치기에 규정 속도를 한참 위반하여 달리는 등 자유로의 왕자처럼 굴 것 같았는데, 의외로 욕 한마디 하지 않고 부드럽게 운전했다.
간혹 핸들을 부여잡고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는 했지만, 오늘은 카 오디오를 틀지 않았다.
조용히 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백한과는 음악 취향부터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기로는 입추가 지났는데도 저녁 7시가 넘은 창밖은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차는 서서히 마포구청 방향으로 빠져나와 신촌을 지나 고가도로를 탔다. 어디를 가나 했더니 광화문에 있는 5성급 호텔로 향하는 듯했다.
자각이 있던 어린 시절부터 금강 근처에 있는 고아원에 있다가 납치되어 소백산에 있던 이악 부대로 끌려갔던 치영은 센터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 가이딩 교육과 훈련을 받느라 두문불출하여 서울이 낯설기만 했다.
차는 막힘없이 달렸다. 퇴근 시간이 약간 지난 서울은 차가 많기는 해도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당도한 호텔에서 백한은 치영을 먼저 정문 앞에 내려 주었다.
“들어가 있어. 주차하고 갈 테니까.”
도어맨이 정차한 지프로 다가와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자, 다소 쭈뼛거리는 태도로 내린 치영은 백한을 돌아보았다.
그는 발레파킹을 맡기지 않고 직접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에스퍼‧가이드 특수군에서 지급되는 장교용 지프들은 국방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안 레벨 때문에 운전자로 등록된 장교와 그 장교가 지정한 팀원 외에는 운전이 불가능했다.
군부 과학 기술원에서는 일반군보다는 특수군이 다룰 만한 것들을 연구, 개발하는 것을 좋아했다. 말도 안 되는 연구를 벌여도 에스퍼들의 이능을 이용하여 연구를 성공시키는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특수군에서 지급되는 장교용 지프 차량에도 이런저런 장치가 되어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글로브 박스 위에 있는 소형 금고가 열리며 라이플과 총탄들이 나오는 것도 그런 장치 중 하나였다.
잘못하다가 민간인이 그걸 발견할 수 있으니 발레파킹 서비스를 맡기는 건 무리였다. 치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도어맨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내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몇 층인지를 듣지 못했다. 리셉션에 물어보기 위해 그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미색의 대리석 바닥이 반짝이며 치영의 발걸음 소리를 듣기 좋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곳에는 드레스코드 같은 것이 따로 있지 않을까. 가이딩실에서 오전 근무 후 백연을 만나러 갔다가 브리핑 회의에 참석하느라 입고 있는 옷이 아직 치료복인 상태였다.
센터 내부에서 입는 복장이라고 한들 일반 병원의 짙은 남색 수술복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다른 이들이 신분을 유추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런 곳에 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치영이 조금 위축되어 어깨를 움츠릴 때였다. 누군가 치영의 어깨를 툭 쳤다.
“아, 죄송합니다.”
그는 곧바로 정중하게 사과했다. 묵직한 음성이었다. 끝이 달큼한 구석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치영을 유혹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원래 그런 식으로 상대의 호감을 사는 버릇이 있는 듯했다.
치영은 제게 다가오는 낯선 이는 그게 누구든 데면데면하게 구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대답 없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로 화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치영의 태도를 전혀 괘념치 않고 다시금 친절하게 물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네.”
치영은 의아했다. 기백한이 눈물 나게 클 뿐이지, 치영 역시 177cm였다. 한국 남자들 평균 신장보다 4cm나 큰 데다가, 체술 훈련을 꽤 열심히 해서 몸이 다부진 편이었다.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이라 그렇지, 상하체 근력이 고르고, 골격근량도 꽤 나간다. 근데 그거 좀 부딪쳐 놓고 다친 곳은 없냐니.
물론 상대의 키는 큰 편이고, 꽤 오랫동안 무도를 익힌 듯 단단하고 넓은 어깨를 갖고 있었지만 치영 역시 성인 남성이었다.
‘…어디 아픈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남자는 살짝 웃고 있었고, 치영은 그 얼굴에 침을 뱉기는 싫었다.
진회색의 쓰리 버튼 톰포드 슈트를 입은 남자가 치영에게 다정한 말투로 다시금 물었다.
“실례했군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몇 번 말해야 하는 거지‧…? 치영은 살짝 헷갈렸다. 보통 이쯤 되면 서로의 실수임을 깨닫고 헤어지지 않나?
민간인으로 살아 본 지가 너무 오래된 데다가, 센터 밖의 세상은 겪어 본 적 없는 우물 안 개구리인 치영으로서는 바깥 사람들이 어떤 예의를 갖고 사는지 몰라 조심스러워졌다.
하여 치영은 언제 자리를 떠야 하는 것인지 때를 찾지 못하고 다소 어색하게 서 있는 상태였다.
“우리 구면 아닌가요?”
그때 남자가 여전히 다정한 음색으로 치영에게 물었다. 부드러운 생김새의 남자가 웃으며 물으니 치영은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생각나는 구석이 없었다.
묘하게 목소리가 낯익다고 생각은 했지만, 자신이 아는 목소리 중에 저런 목소리는 없었다.
“아니요. 초면입니다.”
“그래요?”
치영의 간단한 대답에 남자가 웃으며 되물었다. 어딘지 꺼림칙해 치영은 예의고 나발이고 그냥 무시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영이 그대로 그를 지나쳐 걸으려던 때였다. 그가 살짝 몸을 틀어 발을 내디디는 치영의 앞을 막아섰다.
치영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솟았다. 뭐 하는 수작이지 싶었던 것이다.
“이거, 떨어트리셨는데.”
남자가 건넨 것은 치영의 아이디 카드였다. 특수군 한국 지부라고 각인된 아이디 카드 위에 치영의 얼굴이 컬러 프린팅되어 있었다.
떨어지는 소리도 안 들렸는데 대체 언제 떨어트린 것인지 떨떠름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짧게 꾸벅이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혹시나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어 센터에서는 아이디 카드의 IC칩을 조사하는 즉시 데이터가 파괴되는 회로를 심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적 양방 공격에서 모두 아무것도 읽을 수 없게끔 해 두었다.
때문에 아이디 카드의 외부 반출은 금지가 아니다. 센터의 대외용 이름은 특수군 한국 지부이고, 그걸 조사해 봤자 육군 산하 연구 기관을 겸한 특수 부대 정도로 나오니 별 소득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예를 들어 명왕의 전 총수인 조필식이 제 조손의 일로 군부에 협조를 요청한 것처럼 말이다.
치영은 상대도 무언가를 짐작했을까 싶어 빠르게 그를 살폈지만, 그는 내내 치영을 처음 마주했던 때처럼 싱그럽고 다정한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별말씀을요.”
그가 다시금 웃은 뒤 치영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왜 이러냐고 뿌리칠 새도 없었기에 치영은 두 눈만 깜빡였다.
그사이 상대는 등을 돌려 가 버렸다.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 꼬집을 수는 없는데 그의 목소리가 익숙했던 것이나 말투, 과하게 웃던 부드러운 미소가 거슬렸다.
그러나 치영 역시 그냥 리셉션 쪽으로 걸어갔다. 지금이라도 붙잡아 당신 뭔데 함부로 남의 팔뚝을 쓰다듬냐고 드잡이질하기에는 귀찮았기 때문이다.
치영에게는 그럴 기력이 부족했다. 리셉션에 대고 대체 몇 층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는지 물어보는 걸 연습하는 것만으로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센터 밖 민간인들을 만날 기회가 적었던 치영은 지금 호텔 로비에 있는 그 누구보다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호텔을 터트리러 온 테러범일 것이다, 짐작할 정도로 말이다.
왜냐하면 잠시 뒤, 치영은 리셉션 데스크의 호텔리어에게 말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례합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몇 층에 있습니까.”
치영은 내뱉어야 할 대사를 조용히 중얼중얼거리며 리셉션으로 향했다. 마침 기다리던 손님들이 문의를 끝내고 줄을 비워 준 참이었다.
치영은 바닥보다 한층 더 어두운 대리석으로 마감된 리셉션 데스크로 다가가 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했던 말을 내뱉으려고 했다.
낯익은 체향과 함께 두꺼운 팔이 어깨에 얹어져 그대로 뒤로 끌려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기백한이었다.
“야, 너 옷 좀 먼저 사 입자.”
그는 치영을 내려다보며 씩 웃더니 어딘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치영은 리셉션 데스크에 있던 호텔리어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꾸벅이는 걸 허우적거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준비해 뒀던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