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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72화 (72/114)

72화

“아니, 여기 이분은 당신 가이딩 해 주려고 여기까지 쫓아와 주신 분인데 그게 무슨…….”

안전 요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치영 대신 대꾸했다.

그러나 공익 요원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광견병 걸린 들짐승처럼 입꼬리에 게거품을 물고 핏발 선 눈동자로 치영을 고발하기 바빴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과장된 표정을 지은 채 소리치듯 말하는 목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저 사람이 저한테 이상한 짓을 했다니까요! 가이드들은 이능력 발현하는 걸 질투한다면서요! 저 사람도 그런 거라고요!”

맹렬히 짖듯이 소리치던 공익 요원이 눈동자를 까뒤집고 그대로 다시금 기절해 버렸다. 그가 갑작스레 졸도하자, 주위에 있던 응급실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동공반사를 확인했다.

그들의 긴박함에 떠밀린 치영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안전 요원이 그런 치영을 발견하고는 혀를 쯧, 찼다.

“신경 쓰지 마십쇼, 소위님. 공익 새끼들 중에 이상한 놈들 많습니다. 안 그래도 저 공익 담당 주무관님한테 연락드린 참인데 주무관님도 또 그 새끼냐고 욕을 퍼부으시더라고요.”

“…….”

“어쨌든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나 알 것이지, 소위님 아니었으면 뇌출혈 왔을 수도 있는 일인데 주제도 모르고. 주무관님 말로는 평소 근퇴도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근래에는 사흘씩이나 무단결근도 했고.”

치영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공익이 무단결근을 했다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며칠 전 의식을 잃고 사라지는 바람에 가이딩실을 무단결근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사람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법이다. 에스퍼로 발현한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을 듣게 된 공익이 얼마나 실망스러울지 짐작이 되었다.

치영도 사실은 에스퍼가 되고 싶었다. 남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저등급 가이드는 그 멸칭처럼 바닥에 버려진 사탕 껍질과 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 공익에게도 저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팔자가 있는 법이다. 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감하게 말했다.

“…그럼 저는 가 봐도 되겠습니까.”

“네네, 바쁜 일 있다고 하셨지 말입니다. 여기는 저희가 마저 정리하겠습니다.”

요원이 면구한 얼굴로 치영을 응급실 자동문까지 배웅했다. 그의 경례에 마주 경례한 치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등을 돌려 에스퍼 병동을 빠져나왔다.

“저 사람한테 닿자마자 이상한 게 흘러드는 것 같더니 쓰러진 거예요.”

공익 요원이 그렇게 악다구니를 쓴 순간, 치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칠 떨었다.

평소에 제 가이딩에 자신이 없던 치영은 근래 들어 얼마 없던 자신감을 회복하던 중이었다.

춘란의 에스퍼들이 그저 방사 가이딩만으로도 꼬박꼬박 좋다, 고맙다, 몸이 가뿐해졌다 하는 칭찬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아졌을 리가 없지. 가이딩은 등급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치영은 살짝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얼마 전에 그만둬 버렸다. 포기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마음 정리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에스퍼 병동을 빠져나오던 때였다.

“물통 비우다 놓칠 뻔했네. 어딜 그렇게 빨빨거리고 다녀.”

어디서 비누 향이 나는 것 같았는데, 훅 뻗어온 손이 제 뒷덜미를 휙 낚아채는 바람에 그 생각이 바로 사라져 버렸다.

치영은 제 인지 속도보다 먼저 온몸을 휘감아 오는 에스퍼 파장에 미간을 찌푸렸다. 파장은 마치 거대한 뱀처럼 희희낙락 즐거이 치영의 몸을 휘감았다. 마치 어딜 갔다 왔냐는 듯 즐거이 희롱하는 모양새였다. 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게, 다시 봐도 웃기는 파장이었다.

흘끗 뒤를 보니 남자 화장실이 지척이었다. 손을 닦고 나와 안 어울리게 상쾌한 비누 향이 나는 손을 제 목덜미에서 떼어 내며 생각했다.

‘하마 새끼 화장실 갔을 때 좀만 더 빨리 토낄걸.’

김민우가 데리러 온다고 하더니 어째 기백한이 직접 왔다. 김이석이랑 작전에 대해 상의할 것이 많을 텐데 왜 직접 온 거지.

이유가 뭐든 성가셨다.

“알아서 갈 텐데 뭐 하러 직접 오셨습니까.”

“네가 멀쩡히 갔다가 웬 등신 같은 에스퍼 새끼 가이딩을 공짜로 해 준다길래 어이가 없어서 와 봤다.”

“중령님한테도 돈 받고 하는 가이딩은 아닌데요.”

“다른 거 받을래? 이를테면 형아 몸이라든지.”

형아 몸 같은 소리 하네. 역겨워 인상을 찌푸리자 낄낄거린다. 그러더니 치영의 어깨에 두터운 팔을 올려 제 품으로 잔뜩 끌어당겼다.

“왜 자꾸 꼬리를 치고 다니세요. 얌전히 서방님 기다리던 마누라 불안하게.”

쓸데없는 말이라 대꾸하지 않았다. 치영은 대신 하마는 어떻게 우는지에 대해서 떠올리려고 애써 보았다.

꾸웨엑 하고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기백한처럼 시끄럽게 말이다.

치영이 대답 없이 걷기만 하는데도 기백한은 계속해서 구시렁거리며 그를 끌고 에스퍼 병동을 빠져나왔다.

“브리핑은 어쩌고 직접 오셨냔 말입니다. 저희 팀만 하는 브리핑도 아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야외 주차장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치영은 그와 같이 걷기 싫어 걸음을 빨리해 보았지만 이내 끌어당겨져 옆구리에 딱 붙은 채로 걸어야 했다.

“그러게 말이야. 이석이 새끼가 형 갈군다. 형 서러워서 못 살겠어. 안치영이가 이석이 새끼 좀 때려 줄래?”

“상관을 어떻게 때립니까?”

“나는 때리잖아.”

“그러니까 상관을 어떻게 때리냐는 말입니다.”

“뭐, 나는 상관이 아니다?”

백한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에 치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기백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혀로 제 볼 안쪽을 둥글게 밀어내며 피식 웃었다.

치영은 백한이 자신을 안고 있지 않은 팔을 쭉 뻗더니 조수석 문을 열어 주길래 대꾸하기 싫어 휙 올라탔다.

기백한의 군용 지프는 뚜껑이 열린 채였다. 백한이 닫힌 조수석 문 창틀에 팔을 기댄 채로 앉아 있는 치영을 바라보았다.

“야.”

“…….”

“다른 데 가서 흘리고 다니지 말라는 말 진짜야. 형 의부증 걸리게 하지 마라. 내가 너 가둬 두면 어쩌려고 그래.”

기백한의 눈매가 성에라도 낀 듯 서늘하기 그지없었지만, 치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음색도 스산한 기운을 품고 있었으나 제 안위에 있어서 다소 둔한 구석이 있는 치영은 여전히 하마의 울음소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뿌우우,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코뿔소인가.

치영은 초점을 흐린 상태에서 대시보드만 쳐다보며 넋을 놓았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주 그렇게 넋을 놓는다는 걸 알고 있는 기백한이 치영의 목덜미를 끌어와 귓불을 콱 물었다.

“아!”

“하여간, 딱 그렇게 깜찍하게만 굴어. 씹어 먹고 싶어지니까.”

귓불을 부여잡고 백한을 향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치영을 비웃은 그가 휘파람을 불며 보닛을 돌아 차에 올라탔다.

기골이 장대한 에스퍼가 올라타자 하체가 튼튼한 차인데도 한쪽으로 약간 기우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백한이 이능을 쓴 것도 아닌데 어디서 배어 나온 것인지 그의 에스퍼 파장이 치영에게 곧바로 들러붙어 살살거렸다.

덩치 커다란 짐승이 엉겨 붙어 애교를 부리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치영의 피부를 둘러싸고 있는 얇은 가이딩 파장에 찰싹 달라붙는 바람에 약한 정전기처럼 스파크가 이는 것 같았다.

시동을 걸고 수동 기어를 조작하는 그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치영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다가 그의 우람하고 튼튼해 보이는 허벅지나 정맥이 실뱀처럼 엉겨 붙은 그의 전완을 목격했다.

에스퍼라서 남성 호르몬이 유독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치영은 그의 주위를 자연스럽게 감싸고 있는 수컷 냄새에 가끔 질려 버릴 때가 있었다.

그를 짝사랑해 온 지 오래이나, 치영 역시 남자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동종의 남성 페로몬에 짜증이 나는 것이다.

점심으로 소고기를 진력나게 먹었는데 저녁에 곱창집 앞을 지나는 기분과 비슷했다.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냄새라도 비강에 달라붙은 기체 분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면 예민한 후각이 쉽게 마비되는 법이다.

백한은 치영에게 그런 식으로 다가오고는 했다. 자극적이고 강렬하지만 늘 치영을 피곤하게만 만들었다.

하지만 멀지 않았다. 2년 전보다, 1년 전보다,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의 치영은 백한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덜고 있었다.

치영은 자신이 별다른 재주가 없는 이라고 여겼지만 인내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동면하는 동물처럼 몸을 웅크리고 그에 대한 사랑이 다 빠져나가는 순간을 기다릴 것이다. 정말로, 머지않았다.

하지만 치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다는 듯이, 백한은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자매님이 지 애인 끌고 오시겠대.”

“김한나 대위님 말입니까?”

“어. 자매님이 걔라면 절절매잖아. 구경 가자.”

“브리핑은 어떻게 됐습니까?”

“파했어. 이석이 새끼 정시 퇴근 안 시켜 주면 센터 얼려 버릴걸.”

백한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결국 자리를 비운 치영 때문에 브리핑을 끝맺지 못하고 파했다는 말에 치영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폐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입맛이 썼다. 밥은 니나 처드세요, 하고 저는 숙소에 내려 달라 말하려던 참이었다.

“이석이 새끼도 지네 가이드 데려온다니까 얼굴도장 찍어 둬.”

김이석 소령도 참석한다면 가서 직접 얼굴 보고 오늘 일을 사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치영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야말로 긍정이라는 걸 알고 있는 백한이 그를 흘끔 보며 피식 웃었다. 치영의 하얀 손을 끌어다가 기어 위에 올려 두고는 손과 기어 스틱을 한꺼번에 잡았다.

개수작스러운 스킨십에 치영의 양 눈썹 끄트머리가 각각 열 시와 두 시 방향으로 치솟았지만 백한은 개의치 않았다.

기백한의 지프가 이번에도 센터 내 규정 속도를 무시하고 빠른 속력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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