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70화 (70/114)

70화

“가이딩 거부증이 있으니까 고등급 가이드들한테 가이딩 받아도 몸이 족족 뱉어냈겠죠? 그런 애들은 C급 가이드 이하가 적당한데 체술 익힌 C급 가이드가 우리 센터에는 없잖아요.”

서울‧경기 센터의 가이드들은 체술 훈련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에스퍼들은 가이드가 제힘으로 전투하는 상황 자체에 대해서 자존심 상해 했다.

가이드 하나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한 에스퍼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이드들은 그런 에스퍼의 마음을 배려하여 체술을 게을리하는 편이었고, 낙동강 오리 알 신세나 다름없던 치영만이 체술 훈련에 매진했던 것이다.

실제로 센터에서 실시하는 가이드 대상 무술 강의에 수강 신청을 하는 것은 치영 외에는 호신술을 익히려는 여성 가이드들뿐이었다. 그도 아니면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새싹 생도들이거나.

어린아이들을 낮 동안 뛰어놀게 하여 밤에 빨리 재우고픈 양성 학원 담당 보모들의 혜안이었다.

아주 어릴 때 센터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그런 식으로 낮 동안 열심히 체력을 소진한 뒤, 해가 지자마자 잠자리에 들고는 했다.

그 외에는 체술을 익히려는 가이드가 드물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체술을 익힌 C급 이하의 가이드는 치영이 유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머지는 전투 체술이 아닌 호신술에 그쳤으니 말이다.

게다가 치영은 사격 실력도 꽤 좋은 편이었다. 몽골인들처럼 먼 곳을 볼 수 있는 에스퍼들에게는 못 미치지만, 센터 내 가이드 사격 대회에 나가 1등을 했었다.

그러나 시상식에 나가는 것이 쑥스러워 불참하는 바람에 괘씸죄로 수여된 훈장을 회수당한 게 문제였다. 주목받기 싫었을 뿐인데 훈장을 회수당하자 약간 억울하긴 했었다.

그 후로는 시상식이 있다는 걸 알고 대회 자체에 참석하지 않았다. 사탕 껍질로 사는 가이드가 사격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비웃고 동정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치영은 나름 이 작전에 준비된 인재였던 것이다. 그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백한은 치영이 이 작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다가 금세 태도를 바꿨다.

“그래. 우리 안치영이도 애국 좀 해 봐야지. 국민 혈세 쪽쪽 빨며 사는데 일 안 하는 건 좀 그렇지?”

안 시켜도 할 일이었는데 그렇게 말하니 어쩐지 하기가 싫어졌다.

치영은 기백한이 일부러 얄밉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바로 그 후에 원래 저 하마는 얄미운 말만 골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그런 놈에게 열을 내 봤자 자신만 이상해지니 신경을 끄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허인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백한에게 물었다.

“그럼 대대장님은 안 소위님이 그 재벌 3세한테 가이딩 하는 게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인나야, 작전이라잖아.”

백한은 다시금 다정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정통에서 마주한 허인나가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쯧 혀를 찼다.

“저러다 큰코다치지. 떼잉, 쯧.”

에스퍼들도 하나같이 혀를 찼다. 원래 저런 하마인 걸 알고 있는 치영만 그쪽에 관심을 끄고 보고서를 다시금 뒤적일 뿐이었다.

기백한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었다. 치영은 근래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저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횟수가 늘었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징조였다. 어쨌든 자신은 센터를 나갈 것이고, 그때가 되면 백한이 없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텐데, 해결되지 못한 감정 때문에 민간인이 되어서도 절절맬 수는 없는 일이니까.

치영은 조현호라는 에스퍼가 친족의 힘으로 입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부러웠다.

저도 그런 부모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생애 단 한 번 정도는 방파제가 되어 줄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말이다.

그 후로도 작전의 세부 사항에 대한 브리핑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간식을 시킨 참이었다.

에스퍼들은 곧 죽어도 배고픈 것을 못 참아 했다. 치영은 짐을 든 인나보다 몇 걸음 앞서 걸어 엘리베이터의 위로 가는 버튼을 눌러 놓은 뒤 뭔가를 깨닫고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저는 얼음 컵 사 가겠습니다.”

“혼자 들 수 있어요?”

샌드위치 65개와 1.5L짜리 콜라를 여덟 병을 허인나 혼자 들게 했는데도 저는 고작 얼음 컵 7개를 혼자 들 수 있겠냐는 걱정을 사야 하다니.

치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별말 않고 인나와 헤어져 지하 매점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본청 근무 군무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PX 매점이 웬일로 한산했다. 치영은 얼음 컵 7개를 냉동고에서 꺼내 계산했다.

마르고 작은 20대 초반 남자가 작업용 조끼를 입고 파리한 안색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공익인 듯했다.

공익들은 센터 내로 출퇴근이 가능하다.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소집 해지가 되어서도 그들은 주변에 그저 병무청 서류 담당 공익으로 일했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공익들이 센터에서 근무하게 되는 즉시, 보안처 에스퍼들이 그들이 특정 단어를 말하는 것을 감지한다.

청각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에스퍼들은 상대를 특정하여 그 상대가 어떤 단어를 내뱉는 순간을 감지할 수가 있다. 공익들은 그런 에스퍼들의 감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비효율적인 시스템이지만 국방비 절약을 위해 센터 내 소일꾼으로 공익들을 차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치영은 고아라 면제지만 그들의 파리한 얼굴을 볼 때마다 저도 가이드가 되지 않았으면 저랬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편의점이나 고깃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살지 않았을까 싶었다.

“봉투 드릴까요?”

“아뇨. 들고 가겠습니다.”

공익이 치영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치영은 그를 흘끔 바라보고 계산을 위해 단말기에 찍었던 아이디 카드를 왼쪽 가슴 포켓에 집어넣었다.

계산대에 올려진 얼음 컵들을 집어 들어 품 안에 껴안는데 7개를 동시에 들고 가려니 자연스레 탑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치영이 컵들을 제게 올리려는데, 공익이 손을 뻗어 컵을 집어 들더니 그 위에 올려 주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손이 조금 닿았다.

“아, 감사합니다.”

치영이 꾸벅 인사했는데도 공익은 내내 파리한 얼굴을 한 채 별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 역시 살짝 아래를 향한 채로 끊임없이 배회했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눈동자가 어딘지 불안정해 보여 치영은 계산대를 떠나기가 힘들었다. 아프냐고 묻고 싶은데 괜한 참견을 하는 것일까 봐 망설여졌다.

치영이 입술을 달싹거리려던 순간이었다.

“끄윽…….”

입구가 졸린 비닐 사이에서 공기가 새는 소리 같았다. 정상적인 상태의 목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소리였다.

치영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멀쩡히 얼음 컵의 바코드를 리더기로 찍고 있던 공익이 제 목을 긁으며 뒤로 넘어간 것이다.

그가 뒤로 쓰러지며 매대 뒤에 진열되어 있던 담뱃갑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치영은 놀라 계산대의 여닫이 책상을 위로 들어 올려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품 안에 안겨 있던 얼음 컵들이 바닥에 떨어져 마구 뒹구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봐요!”

공익은 게거품을 물고 꺽꺽거리고 있었다. 치영은 바로 핸드폰을 잠금 해제하고는 국방 어플을 실행시켰다.

위급 상황을 알리는 버튼을 누른 뒤 공익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어 좁은 매대 안에서 질질 끌고 나왔다.

신발을 벗기고 목 뒤에 손을 받쳐 기도가 열리게끔 만들었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과호흡을 일으킨 것도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가 발작을 하는 동안 혹시나 머리나 사지를 부딪힐 만한 것들을 치워 놓고, 알맞은 크기의 휴대용 티슈 같은 걸 가져와 그의 머리에 받쳐 주었다.

그 순간 가이딩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맞닿은 신체를 통해 말이다.

치영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에스퍼……?”

에스퍼였다고? 에스퍼가 어째서 공익근무 요원으로 본청 지하 PX 매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군홧발 소리가 다급하게 들린다 싶더니 안전 요원들이 뛰어 들어왔다. 치영은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가이드가 위급 버튼을 눌렀으니 에스퍼나 가이드의 위급 상황인 줄 알고 관련 장비를 챙겨 온 요원들은 공익이 쓰러져 있자 다소 난감한 표정을 했다.

치영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우려 노력하며 말했다.

“가이드 안치영 소위입니다. …공익근무 요원 같은데, 방금 접촉면을 통해 가이딩이 빠져나가 이분에게 흡수되는 걸 느꼈습니다. 에스퍼 검사도 실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안전요원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공익들은 민간인의 신체를 갖고 있다.

군은 징병 신체검사 시 체혈한 혈청 샘플들로 건강을 위한 검진 사항들을 검시하며 동시에 에스퍼, 가이드 특수 유전 인자 검사를 함께 진행한다.

유전 인자가 있어도 비발현되는 사람들은 많지만, 유전 인자가 없는데 에스퍼나 가이드로 발현되는 사람은 없다.

공익근무 요원들은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유전 인자가 전무하다. 그렇기에 공익 판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유전 인자가 있다면 발현이든 비발현이든 군부에서는 그들의 지속 감시 명령을 내린다. 발현한 즉시 센터에 입대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유전 인자가 없는 공익이 에스퍼로 발현하다니. 안전 요원은 짧게 혼란스러워하다가 이내 들것을 펴 의식을 잃은 공익을 옮기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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