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소회의실입니다.
층을 안내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치영은 발을 뻗어 먼저 내렸다. 뒤에서 기백한이 계속 말을 이었다.
“넌 못 나가.”
“…….”
“대답 안 하지, 안치영이.”
“…….”
“이게 상관 말을 씹네.”
“…….”
“야.”
“다 왔습니다.”
걷다 보니 회의실 앞이었다. 치영은 문을 열고 어쩐지 기색이 험악한 백한을 흘끗 바라본 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회의실 내부는 어두운 편이었다. 빔프로젝터가 켜진 채였는데 화면은 하얗기만 한 상태로 빛났다.
한쪽에는 커다란 화이트보드가 있었는데 위쪽 모서리 부근에 뒤집힌 A4용지가 끼워져 있었다. 인쇄된 앞면에는 사람 형상이 컬러 잉크로 적셔져 있었다.
“아니, 안 소위 데리러 가신다는 분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습니까?”
안쪽에 거의 누운 듯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있던 김민우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졸고 있던 나머지 에스퍼들도 그 소리에 덩달아 일어나 애꿎은 벽에 대고 가짜 경례를 해 댔다.
치영은 인교가 자신의 그림자에 대고 꾸벅 인사하는 걸 피식 웃으며 지켜보았다.
“이석이 새끼 언제 온대.”
백한은 그들의 경례를 무시하며 말했다. 대대장이 들어오자마자 기분이 안 좋아 보이니, 에스퍼들은 뻘쭘하게 느슨했던 자세를 재정비했다.
이럴 때의 기백한 앞에서는 그냥 기는 게 나았다. 괜히 나대다가 얼차려를 받기 십상이다.
‘왜 저래?’
‘몰라……. 원래 오락가락하잖아.’
그들은 다 들리게 귓속말을 하기도 했다. 백한의 에스퍼 파장도 불쾌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치영 역시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다. 백연과 싸운 것 때문에 아직도 열이 받아 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김 소령님은 아직 안 오셨습니다.”
박형인이 치영 몫의 커피를 밀어주며 나머지를 백한의 자리인 상석에 놓고 말했다.
치영은 멀거니 커피를 바라보았다. 가이딩실 희정이 좋아하는 카페의 로고가 일회용 슬리브에 박혀 있었다.
‘희정씨가 여기 커피 맛있다고 했는데…….’
치영은 조금 신기한 마음으로 커피의 일회용 잔을 살짝 쳤다.
표면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실내에 아무리 에어컨이 팡팡 돌아가도 여름의 습도는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김이석……?’
치영은 백한에게서 들은 이름과 김 소령이라는 계급에서 한 남자를 유추해 냈다.
김이석 소령.
춘란, 추국, 동죽으로 이루어진 3개 중대 중 정보 중대를 맡고있는 추국대의 중대장이었다.
자연 계열 원소 능력자로 알고 있는데 등급은 S+였던 것 같다. 정확하지는 않다. 치영으로서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정보 부대는 그와 그의 페어 가이드인 이승균 대위를 제외하고 중대원들이 누구인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적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공작, 즉 스파이 활동을 주로 하는 부대이니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김이석 소령 또한 두문불출하여 센터 내에서 눈에 띄지 않았고, 공식 석상에는 아예 참여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훈장 수여식도 마찬가지였다.
“이석이 새끼 지금 왔다.”
치영의 짧은 사고는 그 무덤덤한 목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키가 치영보다 작은 남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도톰한 입술과 쌍꺼풀 없이 고양이처럼 둥글다가도 끝이 쭉 올라간 눈매가 어찌 보면 남자답기보다는 오밀조밀 예쁘고 아기자기하다는 인상을 줄 것 같지만, 키가 작아도 단단해 보이는 체형과 벼려진 얼음 칼처럼 냉한 분위기가 그를 상충하고 있었다.
기백연과는 다른 느낌의 무표정이었다. 백연이 사람 같지 않고 잘 만든 휴머노이드 병기의 느낌을 준다면, 김이석은 설산에 사는 인간 외의 존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자연계 원소 이능 에스퍼들은 보통 저렇게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을 주고는 했다. 치영은 조금 감탄하며 생각했다.
‘하마 새끼가 기 실장님이랑 김 소령님 표정 다 뺏은 거 아니야?’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기백한만이 과장스레 웃고, 찡그리고, 화를 내는 표정을 지을 뿐, 나머지 두 사람은 웬만한 일에는 미간 하나 찌푸릴 것 같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김 팀장님.”
춘란의 에스퍼들이 하나둘 일어나 이석을 향해 경례했다. 이석은 정말 대충 손날을 눈썹 끝에 붙어 경례를 받아 주었다.
손을 둥글게 말아 대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슬쩍 대고 말아 버리는 그런 맞경례였다.
“나한테도 인사해 봐. 늦어 놓고 왜 이렇게 허리가 뻣뻣해.”
“지랄 여전하구나. 형인이가 고생이 많다.”
치영은 이석이 내뱉은 말을 가만히 들었다. 기백연의 냉담한 표정으로 입에 걸레를 물고 사는 백한의 말투를 구사하다니. 괴리감이 엄청났다.
기백한이 담배를 한 개비 꺼내다가 천장에 붙은 화재경보기를 보고 입맛을 쩝 다셨다. 담배를 다시 귀 옆에 꽂으며 말하자, 이석이 무감한 어투로 대답했다.
저런 팀장 밑에서 버티는 부팀장인 박형인에 대한 위로도 함께. 형인은 말없이 고개를 꾸벅였다. 새삼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애새끼들은 저렇게 싸가지들이 없어도 이 아빠를 사랑해요. 이석이 새끼가 이간질만 안 하면 사이가 더 괜찮겠어요.”
“귀관들은 꼭 우리 집으로 가출해라. 애비가 맛이 갔는데 그 집구석 붙어 있어서 뭐 하겠어.”
이석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형인이 내미는 커피를 홀짝였다. 치영은 안하무인의 백한에게 말발로 지지 않는 상대는 처음 만난 참이었다.
피부가 투명하도록 하얀 것이 꼭 얼음 인형 같았는데, 혀가 독사인지라 말 몇 마디를 하자 그제야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에스퍼‧가이드 특수군의 주춧돌이 되는 삼 중대인 춘란, 추국, 동죽의 각 팀장들은 각자 개성이 꽤 뚜렷한 에스퍼들이었다.
전투 전문 부대인 춘란의 팀장인 기백한은 무기 같은 ESP로 적을 압살한다. 그러나 그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정보전은 추국의 차지였다.
이미 추국이 무수히 많은 적의 기밀들을 물어 오니,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상태에서 춘란이 승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간혹 부상병이 생기면 전투 간호 부대인 동죽이 투입되니, 기백한은 최연소 팀장으로 임명된 이후로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은 유일한 대대장이었다.
너무 관찰하듯 보았을까. 이석이 치영에게로 얼음송곳 같은 시선을 돌렸다. 서리가 바삭하게 끼어 있는 듯 서늘한 눈초리였다.
치영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민우가 그 눈빛을 보며 혀를 찼다.
“김 팀장님, 안 소위 기죽이지 마십시오.”
“나 그냥 쳐다본 건데.”
단음에 가깝다시피 한 무미건조한 어조여서 그렇지, 말투 자체는 꼭 아이 같았다. 치영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상관이라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러긴 했지만, 팀원들과 친한 걸 보니 잘 보이고 싶기도 했다.
춘란에 와서 팀원들이 제게 잘 대해 주는 것이 무척이나 좋았기 때문에, 그들이 잘 지내는 사람에게 첫인상을 나쁘지 않게 남기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제가 만약 이석의 불쾌를 사면 팀원들이 중간에서 곤란해할 것 같아 그랬다.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소위 안치영입니다.”
“아, 반가워.”
그의 화답에 옆에 있던 허인나가 이석에게 핀잔을 주었다.
“초면에 반말 뭐야, 꼰대야 뭐야.”
“나는 반말이 편한데.”
이번에도 다소 어린애 같은 말투였다. 표정은 무표정하기 그지없는데 묘하게 사회성이 떨어지는 말투를 구사했다. 혀에 칼을 품고 신랄하게 백한을 상대할 때와는 또 달랐다.
치영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고마워.”
이석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풀린 듯했다. 치영이 저도 모르게 작게 웃으려던 때였다.
상석에 앉아있던 백한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지랄 났다. 이석이 새끼야, 연애하러 왔니? 작전이나 씨불이고 꺼져.”
“넌 장례식 언제냐. 나 조의금 내려고 적금 드는데.”
이석은 기가 죽는 태도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관계인가 싶기도 한 게, 서로의 장례식에 가니 마니 하면서도 두 사람의 에스퍼 파장은 안정된 상태였다.
기백한과 이석은 네 관짝은 꼭 내가 들어 줄 거니 어쩌니 해 가며 우정인지 저주인지 모를 소리를 나누었다.
개싸움은 한동안 더 계속되다가 박형인이 소회의실 빌려 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혀를 차자 겨우 진정되었다.
이석은 그제야 표정 없는 얼굴로 포인터를 쥐었다. 사용법을 몰라 헤맬 때도 예의 그 무표정이었다.
보다 못한 허인나가 포인터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는데, 이석이 시험해 본답시고 기백한의 눈알에 레이저 포인트를 쏴 댔다.
기백한이 이석의 얼굴에 노트북을 집어 던졌다. 이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척 받아 들더니 탁 닫아 버렸다. 그 때문에 발표 자료가 대시화면 상태로 돌아가 버려 김민우의 구박을 받았다.
“요즘엔 초딩들도 저렇게 안 싸워요.”
이인교가 치영만 들릴 수 있게끔 중얼거렸다. 한동안 어수선하던 회의실은 박형인이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웃는 얼굴로 짜증을 내자 그제야 정리가 되는 듯했다.
이석은 의외로 기계치인지 다음 슬라이드로 넘길 수 있는 포인터를 쥐여 줬는데도 불구하고 사용할 줄을 몰라, 허인나가 노트북 옆에 붙어 한 장 한 장 슬라이드를 넘겨 줘야 했다.
…정보 부대면 해커전 같은 것도 하지 않나. 의외로 컴맹이시네. 치영은 의아했다.
“작전명 탄탈로스의 접시.”
그러나 그가 조음하는 순간, 그 전까지의 어수선하던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