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제 몸을 훑어보았으나 기백한이 그렇게 말할 만큼 특별하게 달린 것은 없었다. 가이딩실에서 바로 오기는 했으나 오늘은 환복까지 한 상태라 군 지급품의 활동복으로 갈아입은 참이었다.
센터 활동복은 검은색 면티와 검은색 트레이닝 팬츠이기에 벨트 같은 것도 달리지 않았다.
게다가 군칙으로는 장신구 착용을 금하는 터라 치영은 귀도 뚫지 않았다. 다른 에스퍼, 가이드들은 지키지 않는 군법이지만 치영은 약간 고지식한 구석이 있었다. 꾸미는 걸 좋아하지도 않아 목걸이나 반지를 한 것도 아니었다.
대체 제가 뭘 달고 다니는 거냐 묻자, 백한이 기가 막힌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사람을 빡대가리 보듯 보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멍청이 취급당한 기분이었다. 백한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 그냥 소개팅 나가 봐. 씨발, 이게 무슨 병신 같은 짓거리인지.”
백한이 욕을 짓씹었다. 어딘가 대차게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짜증이 익숙한 치영은 백한의 짜증에 서린 미묘하게 초조한 기색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심드렁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알아서 할 겁니다.”
“어, 나가 봐. 어떻게 되나 보자고.”
“알아서 할 거라니까요. 중령님이 신경 쓰실 부분도 없습니다.”
말뿐이 아니라 정말로 기백한이 신경 쓸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치영이 그를 기다리는 몇 년 동안, 기백한은 다른 센터의 가이들과도 염문설을 뿌려 댔다.
전라 센터의 가이드 대위와 휴가를 같이 썼다더라, 제주 센터의 가이드와는 서귀포에서 서핑을 했다더라, 수많은 소문이 있었고 개중에는 연합 훈련을 온 다른 나라의 군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제 소개팅에 으르렁거리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았다.
그 때문에 치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복도 끝을 향해 걸었다.
백연에게 임무에 대한 상부 명령에 대한 작전 브리핑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게 꽤 됐는데 기백한 때문에 여간 늦은 것이 아니었다.
의도치 않게 시간을 낭비하는 걸 싫어하는 치영은 걸음을 빨리했다.
춘란의 에스퍼들은 친절하여 제게 아무런 말 않겠지만, 시간 엄수가 중요한 군인 주제에 복도에서 넋을 뺐다는 점이 한심했다. 다 기백한 때문이나, 지각은 지각이었다.
“이게 지 할 말만 하고 쪼르르 빠져나가네.”
치영이 재빨리 걸어 벌려 두었던 그 거리를 단 몇 걸음 만에 따라잡은 백한이 불량스럽게 양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치영에게 치대기 시작했다.
치영은 눈알만 돌려 그를 슬쩍 보고는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회의실은 한 층 더 올라가야 했다. 계단으로 향하려는데 기백한이 손목을 잡아챘다.
“나 계단 싫어해.”
“많이 싫어하시면 되겠습니다.”
“엘리베이터 타자고.”
“한 층이라 기다리는 게 오히려 시간 뺏깁니다.”
“누가 몰라?”
백한이 불퉁하게 대꾸하며 치영을 잡아끌었다. 힘만 센 못된 어린애가 꼭 제 고집대로 하려는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
치영은 제 손목을 쥔 채로 앞서 걷는 백한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짧게 한숨이 나왔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자신을 계륵으로라도 여기는 걸까?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가 없었다. 저를 계륵 취급하는 것이 기분 나쁘기보다는 신기했다.
이전까지 기백한은 늘 치영을 거부해 왔다. 각인된 에스퍼는 각인한 가이드가 아니라면 가이딩의 효율이 급격히 하락한다.
대체제를 먹고도 견딜 만했던 에스퍼가 각인 후 각인 가이드를 잃고 대체제 거부 반응으로 폭주까지 갔다가 안락사당하는 일이 있었다.
에스퍼 인권위에서 움직여 현재는 군부 내에서 그런 짓을 벌이면 군법으로 처벌받게 되어있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80년대에만 하더라도 빈번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대체제의 효능이 더 나아진 지금도 각인한 에스퍼에게 약물을 권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백한은 남성 가이드에 대한 혐오감을 참을 수 없어 안색이 창백해진 때에도 치영에게 가이딩을 받아 가야만 했다.
대체제가 듣지 않으니 파병 후에는 다른 가이드와의 성관계를 통해 가이딩을 메운 듯한데, 그것도 효율이 너무 떨어져 안 그래도 받아야 하는 가이딩의 양이 남다른 기백한에게는 목마른 이가 바닷물을 마시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그가 귀국할 때마다 치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백한을 가이딩 했었다. 그의 거부 반응이 무서웠지만 동시에 그가 고통받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기백한은 치영이 주는 가이딩에는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안치영’ 그 자체에 거부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치영에게는 그것이 상처였다. 때문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행하던 가이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덤덤해지고, 또 메마르게 되었다.
건조한 마음과 정신으로 그에게 가이딩을 나눠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치영이야말로 기백한이 주던 애정이 그리워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쩌적쩌적 갈라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라는 것은 우주의 가장 큰 법칙인지라, 날이 갈수록 그를 대하는 것이 무덤덤해졌다.
아예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픔에도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고유 능력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치영은 그렇게 덤덤해졌다.
그리고 그 시절 기백한은 치영의 가이딩을, 그리고 치영 그 자체를 버리고 싶어 했다.
“속없는 새끼……. 붙어 있어 봤자 뭐 좋은 꼴을 보겠다고.”
어느 날은 백한이 술에 취해 돌아와 치영의 숙소 문을 두들겼다. 쫓겨나듯 혼자 산 지 꽤 되었을 무렵이었다.
백한은 그날 장기 임무에서 귀국한 참이었다. 임무의 규모가 커다란 탓에 추국대가 춘란대와 합동 작전을 펼쳤다고 들었다.
센터에서는 귀국한 그들의 환영식을 성대하게 열어 주었다.
치영은 그날까지 백한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1년 중 300일을 출국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다가, 귀국 소식을 듣고 센터 내 군사 공항으로 가 보았지만, 그는 저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치영을 못 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각인으로 연결되어 있고,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의 각인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게 해 주니까.
그러나 그는 치영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치영만이 멀거니 서서 귀국한 제 에스퍼를 바라보다가 돌아왔다.
환영식에는 불러 주는 사람이 없어 가지 못했다. 당시에 치영은 동죽대 소속도 아니었다.
그렇게 숙소에서 창문 밖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기백한이 찾아왔다.
그에게서는 어마어마한 알코올 향이 났다. 체능이 뛰어난 에스퍼가 취하려면 얼마나 술을 마셔야 했을까.
치영은 다른 것보다 그게 서러웠다. 그가 그렇게 술을 마시게 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치영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의 숨결에서 옅은 목련 향이 섞여 흘렀다. 그게 좋은 만큼 미칠 것 같았다. 치영도 자신이 싫었다.
그러나 백한의 그 말이 가장 비참했다. 그는 전부터 치영을 대하던 날 선 기색 없이 정말 딱한 이를 대하듯 말했다.
붙어 있어서 네 처지가 좋아지지는 않을 거라고. 너도 참 딱하다는 투로.
고생이 많아 안 됐다는 위로가 아니라, 네 처지가 안 되었다는 동정에 불과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그는 치영의 손을 잡더니 그대로 끌고 가 제 가슴팍 위에 얹어 두었다.
그는 골격이 우람한 만큼 심장도 큰 것 같았다. 일정한 박자로 뛰는 심장이 치영에게 제 에스퍼가 이번에도 무사히 살아 돌아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도 좆같지?”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은 견딜 만하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즉시 저 자신이 비참해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으니까.
치영은 그제야 제가 하고 있는 것이 아주 뻘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치영의 행동은 그런 멍청한 짓에 지나지 않았다.
백한은 그렇게 맞닿은 손바닥에서부터 치영의 가이딩을 가져간 뒤에 여지없이 구역질을 했다.
화장실로 우당탕 뛰어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가 밀쳐 넘어트린 책장은 한 귀퉁이가 부서져 다시는 제대로 서지 못했다. 그 망가진 모습이 누군가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토할 만큼 토한 백한은 물을 내리고 나와 말없이 치영의 숙소를 빠져나갔다. 치영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화장실과 다름없는 처지라는 걸. 툭 쳐서 부러진 책장 다리라는 것을.
아무도 화장실의 안위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쓰고 떠나면 그만이니까. 치영은 딱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데 계륵으로의 격상이라니,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곧 죽어도 못 삼키는 것에서 버리기 아깝고 갖기는 싫은 것으로 승격되기까지 안치영은 말라 죽을 만큼 괴로웠다.
한 번의 변화가 있었던 만큼, 이번에야말로 계륵에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로 변할 수도 있겠지만 치영은 거기까지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기백한에게 그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 바라는 건 사치고, 지금의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의 작은 평화가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치영은 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사치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제 인생에 그 이상의 것이 주어진 적이 없어 생각하지 못하는 한계와 같았다.
치영의 바람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그 때문에 계륵으로 승격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치영은 묘한 만족감에 말없이 백한 옆에 섰다.
백한은 그런 치영을 흘끗 내려다보고는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쪽에는 에스퍼 한 명이 타 있었다. 핸드폰을 보다가 열린 문으로 백한을 보고 경례했지만, 그는 이름 모를 에스퍼의 경례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치영에게 먼저 들어가라며 턱짓했다.
치영은 순순히 그 안으로 들어가 위층 버튼을 눌렀다. 백한은 그런 치영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상태였던 치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소개팅은 씨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생각이기도 했다. 며칠간 찬찬히 생각해 볼 작정이었다.
“야, 대답해 봐.”
그러자 백한이 치영을 툭툭 건들기 시작했다. 같이 타 있던 에스퍼 하나가 치영과 백한을 흘끗 바라보았다.
치영은 백한에게 대답하는 대신,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요, 우리가 센터에 그 유명한 병신 커플이에요. 서로 떠나지도 못하고 파괴하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굴러온.’
심드렁하게 그런 생각을 한 뒤 다시금 앞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