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66화 (66/114)

66화

“너도 정신을 좀 차려야 할 거다. 그동안은 뭣 모르는 안치영이 살살 굴려서 듣도 보도 못한 망나니처럼 사는 거 봐줬지만 이제는 안치영이 불쌍해서 안 되겠다. 너희 둘은 좀 떨어져 있어야 한다.”

백연은 무감한 어조로 말했다.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어조임에도 불구하고 백한을 힐난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자매님, 왜 자꾸 오버를 하시냐고.”

기백한이 치영의 어깨를 잔뜩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니 하도 턱을 악다물고 있어 목울대와 하악이 마치 무기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기백한의 에스퍼 파장이 살벌해졌다. 날카로운 창처럼 변해 치영의 주위를 호위하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얘들은 왜 또 이래. 제 주위를 빙빙 돌며 건달처럼 어슬렁거리는 에스퍼 파장에 치영은 다소 난감해졌다.

“아니면 뭐야, 네가 꼬셨어? 이제 하다하다 남매를 다 드셔 보려고. 욕심도 많다, 치영아.”

치영의 귓불 옆에 입술을 대고 백한이 속삭였다. 치영은 소름이 끼쳐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밀었다.

그가 내뱉은 말도 모욕적이기 짝이 없었다. 존경하는 상관인 백연과의 관계를 어림짐작하는 말은 치영에게도, 백연에게도 실례였다.

치영은 그녀와 자신이 그렇게 묶이는 게 민망하고 미안하여 화가 났다.

개소리 작작 하라는 눈으로 쳐다보는데도 백한은 백연을 향해 공격적인 에스퍼 파장을 방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연은 그렇게 살기 가득한 파장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제 동생을 향해 곧은 어조로 말했다.

“용병 놈들한테 각인 해제 방법 물어보려고 파병까지 나갔던 새끼가 말은 잘한다. 너는 그래도 되고 안치영이는 그러면 안 된다는 군법이라도 있나.”

“없지. 근데 그걸 왜 자매님이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니까?”

두 에스퍼는 금세 기색을 부풀렸다. 공기 중에 궤가 다른 두 이능 파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백한의 것은 조금 더 거칠고 공격적이었고, 백연의 것은 숨죽인 채 때를 노리는 듯 묵직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서로의 에스퍼 파장이 맞붙어 산란한 끝에 복도 천장에 매립되어 있던 전등에서 스파크가 튀어 파지직 거리는 소리가 났다.

치영은 희게 질렸다. 일신의 안녕을 추구하고 싶은데 하루도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왜 이렇게 제 인생은 시끄럽기만 한 걸까. 조용한 걸 좋아하고 남에게 피해 입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치영은 늘 자신이 태풍의 눈이 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이런 처지가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그러나 치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다는 듯이, 두 에스퍼는 치열하게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백연의 에스퍼 등급은 백한보다 두 단계 낮은 S급이지만 문제는 그녀가 센터 최초의 멀티 가이드, 이능과 가이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에스퍼이자 가이드라는 데 있다.

그녀의 능력은 마인드 리딩으로 상대의 정신에 침투하여 그의 무의식을 읽고, 공격의 수를 예측하는 것이다.

기백한이 타고난 전투 능력과 이능 등급으로 상대를 곤죽으로 만들어 놓는 것에 비해, 기백연은 노력하는 수재 타입이다.

그녀의 전투 방식은 상대의 수를 이능으로 읽은 뒤 체술로 압살하는 것에 있으니, 에스퍼끼리의 이능 싸움이 금지된 센터 내에서는 백한과의 싸움에서 더 유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전투 가이딩을 익혀 골로 보낸 에스퍼만 수두룩했다. 전력으로 맞붙게 된다면 백한이 이기겠지만, 아무런 피해 없이 완전한 승리는 아닐 것이다. 그만큼 태풍과 태풍의 싸움이었다.

그러니 두 공룡이 싸운다면 지척에 있던 치영은 거대 생물들의 싸움에 휘말린 사냥개가 되겠지.

나름 송곳니가 날카롭고 나름 잘 달리지만, 훈련된 사냥개에 불과한 치영은 거대한 두 육식 공룡들 사이에서 밟혀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치영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직 센터 내고, 두 분 다 본청 건물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내력벽이라도 무너지면 어쩝니까.”

그 말에 백연의 에스퍼 파장이 빠르게 갈무리되었다. 본인처럼 상당히 깔끔하고 청아한 파장이었다.

치영의 가이딩 파장은 백연의 에스퍼 파장이 닿는 걸 좋아하는 듯싶었다. 박하사탕처럼 상쾌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기백한의 에스퍼 파장이 치영의 가이딩 파장을 덮쳤다. 마치 중요한 것을 금고에 가두듯 말이다.

여전히 으르렁거리며 치영의 주위를 지키는 지옥의 하수견처럼 사납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기백한은 치영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말했다.

“봤지. 소개팅 좆 까란다. 우린 브리핑 회의 들어갈 거니까 자매님은 좆이나 까 잡수셔요.”

백연은 동생의 저질스러운 욕설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로 치영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백한을 더 열받게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치영은 그냥 눈썹 끄트머리에 손날을 붙여 백연에게 정중한 태도로 경례했다.

“다녀와서 보고드리러 가겠습니다.”

“좋다. 무사 귀환하도록. 소개팅 답변은 그때 다시 듣겠다.”

“답변 같은 소리 하네. 넌 또 뭐야. 인사성이 이렇게 밝았다고?”

백한이 치영의 손목을 잡아 눈썹에 붙은 손날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그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백연에게 휘휘 꺼지라는 듯한 손짓으로 만들었다.

치영은 손목에 힘을 줘 멈춰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유치한 짓거리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백연은 같잖다는 얼굴로 백한을 슥 바라보더니 등을 돌려 제 집무실로 다시금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문을 닫는 소리까지 들리자 백한이 치영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킁킁거렸다. 덩치 커다란 개가 땅에 묻어 둔 뼈다귀라도 찾는 것 같았다. 치영은 질색을 하며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씨스터한테 가이딩 한거 같지는 않은데 왜 저러는 거야.”

기백한의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애초에 기백연은 멀티 가이드라 가이딩이 필요도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졌다. 치영은 짜증을 내려다가 맥이 풀려 시원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압니까. 중령님 하는 행동이 하도 한심해서 놀리려고 그러신 걸 수도 있습니다.”

“놀려? 우리 자매님은 누굴 놀리거나 농담 따위를 하는 분이 아니셔요.”

그건 그랬다. 화려하게 생긴 기백한에 비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미인인 백연은 그의 생김이 그러하듯 실없이 농담이나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신병들은 그녀를 겪고는 인공지능 전투 로봇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그런데 소개팅이라니. 이상하기는 했다.

그러나 확실히 환기의 효과가 있었다.

치영은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백한 외의 다른 상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단 한 번도 다른 이를 제 곁에 둘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아니,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냥 센터에 남아 다른 이와 깊은 관계가 되는 법도 있네…….’

백연의 말을 듣고 보니 꼭 소개팅이 아니더라도 다정하고 착한 이와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졌다.

에스퍼들은 자신이 백한과 각인한 걸 알고 있으니 치영을 기피 하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F급 가이드와 진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나사 빠진 에스퍼들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에스퍼보다는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가이드 여성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일단 같은 가이드이니 여러 감정들을 쉽게 공유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꿈은 단란한 가족을 만드는 것이었다. 너무 오래전이고, 또 너무 요원한 일이라 자라면서 차츰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다정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저도 그에게 애정을 베푸는 삶에 대한 청사진이 갑자기 치영의 마음에 와 박혔다.

그렇게 가상의 상대와 결혼하여 난슬동 후미에 있는 가이드 전용 주택을 같이 신청하고, 그 주택의 작은 텃밭에서 기를 토마토 모종까지 상상했다.

요즘은 대추 방울토마토가 당도도 높고 샐러드를 해도 맛있으니, 괜찮은 모종 가게에서 모종을 사다 심고 각목을 땅에 박아 토마토 넝쿨의 지지대를 만들어 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누군가 윽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강한 악력으로 치영의 턱을 붙잡았다.

“이게, 마누라 두고 딴생각하는 얼굴을 하네.”

“…아픕니다.”

그런 생각 안 했다는 말은 할 수 없어 놓으라는 말로 대처했다.

눈치가 귀신인 기백한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치영의 표정을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의심이 가득 든 눈빛이었다. 치영은 기가 막혔다.

…웃기는 놈이네. 의심해 봤자 저가 뭘 어쩌겠다고.

남 주려니 아깝나. 근래 들어 기백한은 계속 저런 식으로 치영이 제 가이드라는 걸 되짚고는 했다. 전이었으면 행복해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치영이 아닌, 한 1년 전의 치영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저를 계륵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버려 마땅한 것.’에서 ‘버리기 아까운 것.’으로 승격한 소감이 꽤 오묘했지만, 그뿐이었다. 치영은 백한의 그 눈빛을 그냥 견디다가 문득 충동이 일어 입을 열었다.

“소개팅 기대되네.”

“뭐?”

“전 처음입니다, 소개팅.”

“응, 그 처음, 안 올 거야.”

기백한은 치영의 목덜미로 고개를 숙여 목빗근 바로 옆을 콱 물었다.

“아!”

“이런 거 달고 어떻게 소개팅을 나가겠어.”

“…저한테 뭐가 달려 있습니까?”

치영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백한에게 물었다.

갑자기 제 목덜미를 깨물더니 뭘 달았으니 소개팅을 못 가겠다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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