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밤사이 또라이 같은 하마 새끼에게 시달린 덕분에 치영의 두 눈은 살짝 부어 있었다.
에스퍼들은 치영에게 라면 6봉은 끓여 먹고 잔 거냐며 물었지만, 치영은 딱히 해 줄 말이 없어 애매하게 웃을 뿐이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센터 내 가이드 처우 개선 날이라 가이딩실이 일찍 마감했다. 덕분에 치영은 오후 2시가 넘지 않아 퇴근했다.
일찍 나온 김에 희정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에 백연으로부터 호출이 떨어졌다.
치영은 백연이 저를 부르는 게 간만이라고 생각하며 군말하지 않고 이제 막 성사되려던 떡볶이 약속을 취소했다.
“그럼 다음에 꼭 같이 먹어요. 요새 우리랑은 놀아 주지도 않고.”
“다음에는 꼭… 함께하겠습니다. 제, 제가 살게요.”
치영의 말에 희정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가이딩실 식구들에게도 더 많이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가이딩실을 나왔다.
센터 내에 상시로 운행하는 카트에 올라탄 치영은 무덥던 날씨가 서서히 개운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백연의 집무실로 향했다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꽤 오래간만에 춘란대에 임무가 배정된 것이다.
“자세한 브리핑은 따로 있을 거니까 질문은 그때 하도록 한다.”
기백연은 간단하게 설명한 뒤 질문도 받지 않았다. 치영은 “예, 알겠습니다.” 하고 착실히 대답해 놓고도 의문이 들었다.
치영에게도 임무 중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백연의 말이 의아했기 때문이다. 치영은 방금 백연에게서 전달받은 내용을 속으로 곱씹어 보다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는 춘란대도 아닌데…….”
상관 앞이니 제대로 뒷말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리되지 않은 머리 때문에 말꼬리가 잘렸다.
기백연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왜. 기백한이, 이 새끼가 또 자네를 갈구나?”
백연이 무심하게 대답하다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고는 치영에게 물었다.
치영은 백한의 눈썹과 닮은 백연의 것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저는 동죽대 소속이니 말씀드린 겁니다.”
백연이 치영의 말에 웃기지도 않는다는 어조로 대꾸했다.
“동죽대는 무슨. 기백한이 자네를 동죽대에서 파 가려고 본관을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모른다.”
기백한이 백연에게 치영의 춘란대 이대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 의외기는 했다. 치영은 잠시 묘한 기분이 되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잠깐일 겁니다.”
서류를 팔랑거리던 백연이 다시 치영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쓸 곳이 있어 잠시 이관시킨 뒤 동죽으로 다시금 돌려보낼지도 모릅니다.”
“아니라고 본다.”
백연은 심드렁한 어조로 부정했다. 치영은 백연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대놓고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속으로나마 ‘그래도 제 말이 맞습니다.’ 하고 고집을 부렸다.
너무 조용한 고집이라 백연이 듣지 못한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백연은 서류 몇 가지에 사인을 하며 그 앞에 기립해 있는 치영을 흘끗 바라보았다.
“…자네 근래에 등급 검사는 다시 해 본 적 있나.”
“예, 있습니다.”
기백한이 며칠 전 가이드 병동에서 간이 등급 검사를 시킨 얘기를 들었을까? 치영은 백연이 등급을 재검해 봤냐 묻는 것이 의아했지만 일단 그렇노라 대답했다.
그 말에 백연이 반색을 하고 물었다. 그녀답지 않게 드물게 놀란 표정이었다.
“어땠는데.”
“그냥 똑같았습니다. 최저 등급이니 더 내려갈 것도 없었습니다.”
“아니, 등급이 내려갔냐고 묻는 게 아니라……. 일단 알겠다.”
백연은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말았다. 치영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부하 군인으로서 상관이 입을 다문 일에 또 한 번 질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물론 백한 역시 치영의 상관이기는 하지만 치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백한은 그냥 아는 양아치 정도로 여기는 것도 아까울 지경이었다.
때문에 치영은 백연의 시원찮은 반응에도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뭔가 제게 말해야 할 사항이라면 백연이 알아서 말해 주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말없이 서류에 사인을 다 마친 뒤 치영을 문 쪽으로 에스코트했다.
“아무튼 임무 내용은 기백한이한테 자세히 듣도록 한다. 극비 임무라서 본관은 아는 게 없다.”
백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치영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감정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저것이 사람을 걱정하는 눈빛이라는 걸 아는 치영은 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백연의 팔뚝을 팔꿈치로 툭 쳤다.
“괜찮습니다. 잘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나는 항상 안치영이를 믿는다.”
백연리 치영의 어깨를 두들겼다. 힘이 좀 강했던 탓에 치영은 휘청거릴 뻔했지만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는 훌륭한 상관이었다. 처지가 좋지 않은 부하를 위로하고자 고군분투했다는 걸 알고 있다. 동죽대에 받아 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연이 에스퍼이자 가이드이므로 치영이 동죽에서 팀원들의 가이딩을 담당할 수는 없었지만, 치영이 근무하는 가이딩실의 처우를 개선해 주기 위해 그렇게 바쁜 사람이 실장까지 맡아 주었다.
상관과 부사수가 서로를 신뢰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키가 큰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기다란 복도 끄트머리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으니 얼굴이 보일 리가 없는데, 그가 누군지 단박에 깨달아 버렸다. 에스퍼 파장이 곧장 치영에게로 다가와 요동을 쳐 댔기 때문이다.
치영의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물고기들처럼 살랑거리며 손목을 감았다가 튕겨 오르기도 했다. 치영은 문득 이 파장들이 가이드라면 다 이렇게 꼬리를 치고 다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백한이 근처에 다가오자 씻은 듯 사라졌다. 눈에 살짝 살기를 띤 기백한이 실실 웃으며 황당한 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시스터, 영역 좀 지키자. 전에도 이 말 한 것 같은데.”
그의 그 말에 백연 역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돌은 새끼다. 네가 안치영이 버리고 사막으로 쏘다닐 때 거둬서 제구실하게 만든 게 난데, 상관이 부하에게 격려도 못 해 주나.”
그녀는 드물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아 그렇지 대번에 날카로워진 에스퍼 파장이 그것을 말해 주었다.
놀라 그녀를 올려다보자, 백한이 치영의 정수리 위에 손을 턱 올린 채 농구공 잡듯 빙글 돌려 제 쪽으로 시선을 향하게 만들었다.
“응, 좆 빠지게 고마운데 나 이제 사막에서 돌아왔잖아. 그럼 이제 신경 꺼야지. 나도 시스터네 집 맨날 놀러 가 준다?”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고 했다.”
그녀는 짐승이 그르렁거리듯 말했다. 치영은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부풀려진 그녀의 파장에 놀란 나머지, 백한이 제 손목을 휙 잡아끌어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것에 반항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는 말을 그대로 돌려준 기백한이 씩 웃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치영의 등이 닿자마자 에스퍼의 파장이 요동을 치며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에스퍼 파장이 다 이런 건 아닌 거 같고 유독 기백한 파장만 돌아 있는 건 확실하네.’
치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백연에게 경례했다.
“작전 브리핑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복귀 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백연 역시 치영의 휴전 요청을 알아들은 것인지 꽉 다물어 교근이 불뚝 튀어나온 턱을 무뚝뚝하게 끄덕였다.
백한이 그것 보라는 듯한 얼굴로 낄낄거렸다. 그러고는 치영의 어깨에 묵직한 팔을 걸치고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안치영이. 소개팅 할 생각 없나.”
“…네?”
치영은 영구 박 터진 소리 내듯 되물었다.
소개팅이라니. 그런 말이 백연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아니 치영은 그녀가 제게 한 제안이 놀라운 것에 앞서, ‘소개팅이라는 단어도 아시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백연은 치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정말 드물게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뭔 개소리야, 씨발.”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보며 기백한이 짓씹듯이 욕을 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 있는 쌍둥이 누이에게까지 욕을 내뱉는 일은 드물었다.
우애가 깊은 편이기도 했지만, 그녀와 기백한이 맞붙으면 그들의 부모는 한꺼번에 자식들을 모두 잃어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와 그녀는 호적과 적당히 싸우는 법을 모른다.
기백한이 치영의 어깨를 더욱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자매님, 나 상당히 속상하네?”
적당히 하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백연은 비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안치영이 소개팅 나가는데 네 속이 왜. 됐고, 안치영이. 대답한다.”
“소개팅이라니…….”
치영이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소개팅이라니……?
기백한이 안치영의 에스퍼로 살지 않아서 그렇지, 치영은 센터에 온 내내 백한의 가이드로만 살아왔다.
소개팅이면 다른 상대를 만나라는 말인데, 치영은 아예 전역하여 백한과의 관계를 끊는 것만 생각했지, 다른 상대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거다. 드물게 어벙한 표정이 된 치영을 보던 백연이 백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