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왜, 왜 이러십니까…….”
목소리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상황보다 감각이 당황스러웠다. 샤워를 한 건지 평소처럼 목련 향이 가득한 향수 냄새가 아닌 치영의 바디워시 향이 났다.
익숙한 향인데도 그에게서 느껴지니 영 다른 냄새처럼 느껴졌다. 치영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전에도 이렇게 닿은 적은 있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기백한의 에스퍼 파장이 공격적으로 치영의 가이딩 파장에 섞이기 시작했다.
닿은 부분에서부터 스멀스멀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것이 오롯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게 치영의 살갗을 간지럽혔다.
기백한은 치영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숨결이 너무나도 가까이서 들렸다. 지척에서, 마치 한 몸처럼, 떨어진 적 없다는 듯이 말이다.
“…저리 가라니까.”
“너 흥분도 할 줄 아네.”
기백한을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치영은 흥분의 증거가 뚜렷하지 않았었다.
그는 늘 이런 식의 깊은 스킨십이 끝나면 토악질을 하러 갔고, 남겨진 치영의 기분은 쓰레기가 되어 바닥을 굴러다녔기 때문이다.
흥분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입맞춤을 하면 설레는 것보다 가슴이 쪼개질 듯 아픈 격통이 먼저였다. 첫사랑이자 짝사랑인 상대가 저와 닿기만 하면 웩웩거리는데, 그런 상대를 옆에 두고 키스했다는 사실만으로 흥분할 정도로 무디지도 않았다.
그의 감정과 저의 것이 전혀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치영은 찬찬히 부서졌다가 재조립되고는 했다.
그래서 이런 스킨십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반만 느껴 왔던 것이다.
가끔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이 간지러울 때도 있었지만, 여실히 흥분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기백한은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둠이 익숙해지자 그의 얼굴이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했다. 저를 보며 살짝 웃는 표정이 기쁜 것 같아 보이는 착각이 일었다.
가이딩 자체가 접촉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센터의 풍조는 사회보다 살짝 더 문란한 편이었다.
에스퍼들은 에스퍼들끼리의 관계를 스포츠의 일종으로 여겼고, 마음에 드는 가이드와 한 번이라도 깊은 가이딩을 해 보기 위해 애를 썼다. 여기서 말하는 깊은 가이딩은 성관계를 통한 가이딩이다.
가이드들은 그런 에스퍼들의 풍조에 따라 아주 어린 새싹 생도 시절부터 철저한 성교육을 받는다.
에스퍼들도 성교육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두 집단의 괘가 살짝 다른 것은 사실이다.
상대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는다를 제일 먼저 교육받는 에스퍼들과는 달리, 가이드들은 성적 접촉을 통한 가이딩을 굳이 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가장 가이딩의 효과를 끌어올린다는 내용을 교육받고는 한다.
안치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교육이 의무적으로 실시되는 새싹 생도 시절을 겪지 못했다. 나중에라도 자연스레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어릴 때부터 성교육이 자연스러운 센터의 풍조 상 너무 기초적인 내용이라 아무도 치영에게 알려 주지를 않았다. 그런 걸 부러 알려 줄 만큼 친한 사이도 없었다.
물론 가이딩의 이론을 배울 때 성적인 접촉이야말로 가이딩의 효율을 끌어올린다는 내용을 배우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론 파트에 들어가는 한 줄 글귀가 전부일 뿐 성교육처럼 자세하지 않았다.
반정부군에 있을 때도 치영은 가이딩을 해 보거나 하지 않았고, 각인 에스퍼가 생긴 후로도 그와 잠자리를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스킨십이 좀만 더 제 상식을 벗어나면 심하게 당황하곤 했다.
치영은 어째서 백한이 이렇게 강도 높은 스킨십을 하고도 구역질에 자리를 뜨지 않는지 의아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저와의 접촉을 서슴없이 행하고, 접촉 후에도 헛구역질을 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하기에는 적당한 생각은 아니었을뿐더러, 백한의 행동들로 인해 머리에서 깨끗하게 휘발되어 버렸다.
“하, 하지 말라고, 했……. 아—!”
꽉 껴안긴 틈에서 치영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백한의 표정도 보이지가 않아 답답했다. 이딴 짓 하지 말고 꺼지라고 꾸준히 말하고 있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열 받을 지경이었다.
“냄새 존나 좋네. 향 좋길래 네 거 써 봤는데 나한테는 이런 냄새 안 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행동에 간지러움이 일었다.
백한의 에스퍼 파장은 물 만났다는 듯 치영을 아주 발라 먹으려고 작정한 듯했다.
넘실거리며 엉겨 붙는 통에, 안 그래도 무겁기 그지없는 백한을 제 위에 올려 두고 있던 치영은 버거워 헉헉거릴 정도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치영은 간신히 팔 하나를 꺼낼 수 있었다. 백한이 그런 치영을 보며 킥킥 웃었다.
“팔에도 뽀뽀해 달라고? 아, 해드려야죠. 이리 와 봐.”
…이 미친 새끼가. 치영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날렸다. 주먹을.
“악!”
그런데 의외로 치영의 카운터펀치가 제대로 먹혀들었다. 아래턱을 가격한 탓에 뻑 소리가 났다. 기대하지 않고 날린 펀치였다. 치영은 제가 때려 놓고도 놀라 두 눈을 깜빡였다.
어린아이가 불시에 성인의 얼굴을 손으로 퍽 내려쳐도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이런 미친—.”
백한이 치영의 위에서 데굴 굴러 옆으로 넘어졌다. 치영이 얼굴을 감싸고 악 소리를 내는 백한의 어깨를 퍽 밀어 버렸기 때문이다.
“변, 변태 새끼……. 그러니까 내가 그만하랬잖아!”
웬만하면 말을 그만 더듬고 싶었는데 아직도 감각이 여실해 목소리가 떨렸다. 온몸을 붉게 물들인 치영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침대 밑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기백한의 배를 퍽퍽 찼다.
백한은 윽, 하고 딱 한 번만 신음하더니 치영의 발목을 잡아 제 품으로 냉큼 끌어안았다.
놀란 치영이 꽥 소리를 질렀다.
“하지 말라고!”
“안 해. 더 안 잡아먹어. 애새끼들 진짜 깬다.”
백한이 조금 잠겨 까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상체를 일으킨 채로 앉아 있는 치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허벅지에 제 머리를 투욱 올려 두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십쇼.”
치영의 날 선 음성에 백한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네가 내 성질만 안 건드리면 나도 안 그래.”
“맨날 내 탓이지. 저 없으면 본인 성격 나쁜 거 탓할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분에 받쳐 짓씹듯이 내뱉은 치영의 말에 백한이 피식 웃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치영을 올려다보았다. 치영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팔을 풀어 주지도 않고 말이다.
“글쎄.”
“…….”
“너 없으면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네가 없어 본 적이 수많지만, 너는 내가 없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그러나 치영은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새삼 그의 곁을 늘 떠돌던 제 신세가 처량했다. 치영이 대답하지 않자, 백한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궁금하면 어디 손 처장이랑 그렇게 계속 짝짜꿍해 봐.”
“…….”
돌고 돌아 원점이었다. 웬일로 경고를 해 주나 싶기는 했다. 선수 필승이라고 기백한은 경고 같은 신사적인 행위를 알지 못하는 무뢰배다.
먼저 주먹을 뻗어 상대방의 코뼈를 부러트리고, 아래서 위로 턱을 올려 쳐 뇌진탕이 오게 만드는 방식을 선호한다.
준비되지 못한 상대들은 준비된 상태에서도 이기기 힘든 기백한에 의해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사람이 갖고 있는 힘이 많으면 그 힘을 뒷배로 여유로워지기 마련이다. 그 여유로움은 사람에게 점잖은 성격을 부여한다.
기백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강하고, 전 인류가 한꺼번에 덤빈다고 해도 빠르게 모두를 죽인 뒤 그 시체 산 정상에서 히죽 웃을 것 같은 강함을 가졌지만, 그런 인격적인 훌륭함은 하나도 갖추지를 못했다.
그런데 경고라니.
안 어울리는 짓이나 하고 자빠졌다고, 치영은 속으로만 백한을 비웃었다.
백한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것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자세가 바뀌자,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희붐하게 백한의 얼굴 위에 끼쳐 산맥 같은 콧날 위로 음영을 지게 만들었다.
“첩으로 들어가는 게 꿈이라고? 치영아, 너는 첩살이할 성격이 못 돼.”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개새끼야.’ 하고 반론하고 싶었지만 치영은 그의 말에 동감하여 입을 닫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꼴을 당하고도, 그 모진 수난과 고초를 당하면서도 그의 옆에 지고지순 붙어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너는 네가 존나 욕심 많은 거 모르지.”
“…….”
“넌 누군가의 처음이 되지 않고는 못 견뎌 하잖아.”
백한이 어둠 속에서 치영을 비웃었다. 치영은 단숨에 서러워졌다. 그걸 알면서도 그랬다고. 그걸 알면서도 그동안 내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고.
치영은 무언가를 찾는 듯 백한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치영을 향한 진심 같은 것들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저를 향한 감정이 한 톨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는 절망에 가까운 기대로 그를 살폈다.
그러나 희붐한 빛이 끼친 그의 눈동자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치영아, 사람을 왜 그렇게 봐. 내 말이 서운해?”
“…….”
“내가 너 칭찬한 거잖아. 기특하고 예쁘다고.”
그가 제 위에서 장난질을 칠 때보다 훨씬 더 한 모욕감이 들었다. 기백한은 오늘도 치영의 마음을 비웃고 조롱하고 있었다.
웃기다고, 더 해 보라고, 치영의 마음을 광대로 여기며.
“계속 그렇게 예쁨 떨어. 다른 거 하지 말고.”
딱 예쁨만. 다른 거 말고 저만 즐겁게 해 달라고 말하는 치영의 에스퍼.
치영은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 것인지, 아니면 저에게만 인생이 박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백한이 치영의 목덜미에 손을 대고 끌어당겼다. 치영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나락으로, 아니 기백한의 입술 위로.
지옥 같은 입맞춤이 또 한 번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