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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63화 (63/114)

63화

그렇게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영은 악몽을 꾸었다.

아니, 악몽이라기에는 조금 더 묘한 그런 꿈을.

치영은 어느 곳 한복판에 서 있었다. 바람이 살을 에일 듯 불어오는 곳이었다. 동시에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감각들이 들끓다가도 무저갱에 던져진 듯 아무런 느낌도 들지가 않았다.

혼자 있어도 만 명과 같이 있는 듯하고, 만 명과 같이 있어도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밀접한 압박감에 숨을 쉴 수 없는 기분이 들다가도 외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두워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도리어 너무 밝아 눈을 뜰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클로린, 소듐, 명백한 무기물의 냄새와 인체의 것에서 기인한 유기물의 역한 냄새가 공기 중을 떠돌았다.

치영은 도망치고 싶었으나 그 공간이 그를 놔주지 않았다. 혼자 있어도 만 명과 함께 있는 듯 꽉 차며, 만 명과 있어도 혼자 있는 듯 외로운…….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제가 그곳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목소리만은 뚜렷하게 들렸다.

‘너는 내 역작이야.’

치영은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마치 신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일방적이기만 했다.

그가 저를 역작이라고 말한 순간, 치영은 안도한 동시에 절망했다. 어째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동시에 실패작이지.’

그러나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버려질 거라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방금 전까지는 그가 저를 포기해 주었으면 싶었다.

처음에는 분명 이 고통이 계속될까 봐 절망적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홀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널 아끼잖아.’

그가 치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속에서 치영은 머리가 아주 긴 편이었다. 이마가 드러날 정도로 짧게 깎은 지금과는 대조되게 말이다.

키가 작은 것 같기도 했다.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시야가 어린아이의 것 같았다. 치영은 이상했다.

이게 대체 언제지? 내가 옛꿈을 꾸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서산 너머에 걸려 있던 해가 역행하여 동쪽으로 지는 것 같기도 하고, 지반의 모든 것들이 차례로 일어나 치영을 덮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는 곧 나를 찾게 될 거야.’

치영은 제 몸이 별안간 커진 기분을 느꼈다. 급작스러운 성장에도 통증은 없었다. 치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치영의 얼굴을 한 마네킹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마치 병마용처럼 수많은 행과 열로 늘어선 모습이었다.

“안치영!”

“허억!”

누군가 치영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치영은 숨을 몰아쉬며 끔찍한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어디를 뛰다 온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쾅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흐윽…….”

“가위눌렸어?”

백한이 어이없다는 듯 치영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아 주었다. 어린아이의 식은땀을 닦듯 자연스럽고 거침이 없는 손짓이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치영의 이마를 연신 쓸었다.

치영은 급하게 널뛰는 숨을 통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헉헉거렸다. 기백한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커다란 손바닥에 물을 담듯 둥글게 모아 치영의 입에 대 주었다.

막힌 공기로 인해 이산화탄소가 다시금 호흡기로 들어오고서야, 치영은 과호흡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자빠져 자다가 웬 난리야. 악몽 꿨어? 형 없이 혼자 잠들어서 무서웠어? 애기네, 애기야.”

뭔 개소리야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를 어르듯 말하는데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치영은 힘없는 팔을 휘적거렸다.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한 반항이었다.

“…느끼하게 왜 이래요, 씨발.”

“알겠어. 안고 자자. 원, 어디 가지를 못 하겠네. 마누라가 그렇게 좋아요, 서방님?”

치영은 정말로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네 서방님이야, 따져 묻고 싶은데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허리가 잡혀 백한의 품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뺨이 그의 단단한 품에 짓눌릴 정도로 꽉 껴안겼다.

“왜 또 여기 누우십니까. 중령님 방 가십쇼.”

“소박 놓네. 가슴 아프게.”

아프긴. 그의 가슴팍은 근육과 장대한 뼈로 단단하게 이루어져 있어 말 몇 마디는커녕 자주포로도 상처 입히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더 상대할 기운이 없었다. 치영은 두통이 찡, 하고 머리를 달구는 것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의처증이야 뭐야. 단속도 하네.”

“그게 아니라……. 아, 됐어. 꺼지세요, 그냥. 왜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옵니까.”

“우리가 왜 남이야.”

북은 아니니까……. 치영은 가시지 않은 두통에 머리를 감싸 안으며 실없는 생각을 했다.

손 처장을 만나고 온 것 같은데 느물거릴 뿐 아무런 말도 안 해 주니 궁금하기는 했다.

갑작스러운 악몽에 잠에서 퉤 뱉어지다시피 깬 기분이 좋지는 못했지만, 치영은 그가 왜 손 처장을 찾아간 것인지, 정말 자신이 실신 전 손 처장을 만난 것 때문에 작전처로 향한 건지 궁금했다.

“손 처장이 뭐랍니까.”

그래서 질문을 바꿔 보았다. 그만 빙빙 돌리고 대답 좀 똑바로 하라는 듯이.

그러자 치영을 뒤에서부터 껴안고 있던 백한이 치영의 가슴팍을 툭툭 두들겼다. 어린아이를 재울 때나 하는 손짓임에도, 손바닥이 두껍고 커다래 가슴팍을 다 덮은 것이 신경 쓰였다.

“치영아.”

기백한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오른쪽 귀에 속삭이는 바람에 몸의 오른편에 주르륵 소름이 돋았다.

백한의 숨결이 귓불을 스쳤다. 치영은 목을 움츠렸다. 그가 묵직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처장 새끼랑 무슨 거래를 했어?”

그리고 그 말에는 왼쪽, 오른쪽 가릴 것 없이 소름이 돋았다. 치영은 기백한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저렇게 떠볼 때는 무언가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다.

심장이 악몽을 꿨을 때처럼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갈비뼈와 빗장뼈를 부수고 나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뛰는 심장 때문에 치영은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청각이 예민한 에스퍼가 제 빈맥을 듣지 못할 리가 없다. 게다가 그의 손바닥이 이미 치영의 흉골 위에 올라와 있는 참이었다.

치영은 아찔한 마음으로 눈을 꾹 감았다 뗐다. 제발 멀쩡하게 말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무슨 거래면요.”

“뭐?”

“무슨 거래면 어떤가 싶습니다. 중령님이 언제부터 제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그럼 씨발, 내가 지금껏 너랑 한 게 양놈들 인사야? 찐하게 입술 부빌 때는 반항 한번 안 해 놓고 관심 어쩌고 하면서 사람 열 받게 만들어. 내숭 좀 그만 떨자, 응?”

백한이 성질을 냈다.

늘 치영의 말에 유들유들하게 속을 뒤집고 넘어가기만 했는데 웬일로 화가 났나 싶었다.

백한이 몸을 일으켜 침대와 저 사이에 치영을 가두듯 올라탔다. 치영은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보며 또 왜 이러나 싶어졌다.

“가만 보면 넌 꼭 도망갈 구석을 막아 줘야 정신을 차리더라.”

“그런 말들 다 의미 없는 거 알고 있습니다.”

“이게, 진짜…….”

치영의 말에 백한이 이를 아득 갈았다. 어둠 속에서도 백한의 교근이 불뚝 올라 솟은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냥 손 처장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나 말해 주십쇼.”

백한이 치영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치영의 무언가를 가늠하듯이 말이다.

치영으로서는 그와 손 처장이 대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 달리 숨기는 것은 없었기에 순순한 눈이었다.

기백한은 다시금 낮게 가라앉은 소리로 물었다.

“그 새끼가 네 이거야?”

치영의 어깨 옆에 팔뚝을 대고 몸의 무게를 지탱했지만 두 사람의 다리는 얽혀 있는 채였다. 기백한은 화가 나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에스퍼 파장은 치영에게 닿은 것이 기껍다는 듯 넘실거렸다.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치영은 그것을 무시했다. 백한은 다른 손을 치영의 눈앞에 들이밀어 약지를 까딱였다.

꽤 저질스러운 표정이었다. 치영을 모욕하기로 작정한 것 같기도 하고.

치영은 낯빛을 굳히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비슷합니다.”

“…뭐?”

“제 사생활입니다. 이제 중령님이 대답하실 차례네요.”

기백한의 표정이 깨지며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어둠 속에서도 그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인상을 찌푸려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치영이 보기에는 야차 같았다.

살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처자식 딸린 새끼 첩살이하고 싶은가 본데, 그 새끼 수작에 넘어갈 정도로 널 멍청하게 보지는 않았거든?”

“모르는 일 아닙니까.”

“…….”

“제 꿈이 누군가의 첩일지도.”

기백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문을 통해 난슬동에 켜진 가로등 불빛이 희붐하게 빛나 치영의 얼굴에 끼쳐 있었다.

백한은 웃는 것 같았다. 어둠 속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웃고 있는 듯했다.

“존나 원대한 꿈이긴 한데.”

“…….”

“마음에 안 들어.”

치영아, 마음에 안 든다니까.

기백한이 그의 귓불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그때였다. 기백한이 치영의 위를 올라탄 것이다.

원래도 석상처럼 꼼짝 않는데 제 무게로 치영을 짓누르고 있으니 더 했다. 가슴팍에 손바닥을 짚고 더 다가오지 못하게끔만 하는 게 최선이었지만 그도 쉽지 않아 팔이 부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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