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62화 (62/114)
  • 62화

    치영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저, 아이스크림을 포장해 가고 싶은데…….”

    구매해 본 적이 없을 뿐 상식이 부족한 것은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포장하면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이즈를 어떤 방법으로 구매해야 할지 모르니 종업원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런 치영에게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인 종업원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가이드분들이 드시기에는 일반 파인트 사이즈부터 인원수 따라 패밀리 사이즈까지 다양하게 고르시면 되고요, 에스퍼분들이 드실 거면 여기 에스퍼 전용 파인트부터 고르시면 됩니다.”

    종업원이 가리킨 일반 파인트 옆에 작게 1~2인용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패밀리 사이즈까지 컵이 조금씩 커지는 형태였는데, 에스퍼용 컵을 보니 파인트 사이즈가 일반 패밀리 사이즈보다 컸다.

    ‘…그 사람들 진짜 많이 먹는데.’

    치영은 춘란의 먹성을 떠올리며 뭘 사 가야 할까 하다가 에스퍼용 패밀리 사이즈를 두 개 골랐다.

    “맛은 다양하게 골라 주셔도 돼요. 한 컵에 다섯 가지 맛이 담깁니다.”

    “아…….”

    거기부터는 조금 난관이었다. 사 먹어 본 적이 없으니 어떤 게 맛있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나 종업원은 재촉하는 일 없이 그린 듯한 영업용 미소를 띈 채 기다려 주었다. 치영이 이런 곳에 익숙하지 않은 신병이라 머뭇거리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종업원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고 유리 쇼케이스 창에 붙어 있는 아이스크림의 설명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아이스크림에 럼주도 넣네. 피스타치오……. 흑미……? 흑미면 쌀 아닌가? 쌀로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만들지…….’

    개중에는 로즈라고 쓰여 있는 것도 있었다.

    ‘로즈면 장미 아닌가……. 장미로도 아이스크림을 만드는구나.’

    눈이 핑핑 돌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말아 문 치영은 결국 종업원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그럼 인기 많은 품종으로만 담아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진작 이렇게 할 것을 그랬다. 치영은 살짝 식은땀이 났다. 종업원은 그때부터 거침없이 스쿱을 이용하여 아이스크림을 푸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아까 이상하게 생각했던 흑미 아이스크림도 있었다. 그것은 뺄까 하다가 이인교의 말이 떠올랐다.

    “한국인은 밥심입니다, 안 소위님. 팍팍 드십쇼!”

    밥심이라 울부짖을 정도니 아이스크림도 쌀이 들어간 걸 보면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입맛에 맞길 바랐다.

    종업원은 내내 노련한 태도로 치영을 응대하더니, 아이스크림 푸는 기술마저 좋은지 두 통의 커다란 패밀리 사이즈 통에 아이스크림을 요령 좋게 차례로 담았다.

    에스퍼용 패밀리 사이즈는 갈빗집 앞에 놓인 공짜 아이스크림 통만 했다. 그렇게 큰 것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두 통이나 채우는 것을 보고 저분도 퇴역한 에스퍼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맛있게 드세요.”

    치영이 계산을 끝낸 뒤 아이스크림 가방을 들고 나오자, 배고팠는지 옆집에서 핫도그 두 개를 사서 양손에 들고 먹던 김민우가 단숨에 입안에 밀어 넣고는 다가와 치영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뺏어 들었다.

    “으닝 이겅 애 삿어영.”

    이걸 왜 샀냐고 묻는 듯했다. 치영은 그냥 살짝 웃었다. 쑥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새 핫도그를 꿀떡 삼킨 김민우가 “에이, 뭘 이런 걸 샀어.” 하고 말하면서도 몇 통을 샀나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통은 사야 그래도 여유 있게 먹는데, 양이 딱이네. 안 소위님이 벌써 우리 식성 다 파악했구나.”

    치영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퍼들이 좋아해 주면 좋을 것 같다. 제 돈으로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을 사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종종 간식 사 가야지.’

    어쩐지 이제부터는 누림동에 간혹 들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 *

    식사 시간은 즐거웠다. 에스퍼들은 치영의 선물을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우르르 몰려와 쇼핑백에 든 걸 구경하기까지 했다.

    “허얼, 저 여기 아이스크림 완전 좋아하는데 뭐야, 진짜 센스 어쩔 거야.”

    “헉, 여기 거 비싸서 저는 편의점 아이스크림만 먹거든요. 여긴 기분 낼 때나 먹는데.”

    허인나와 이인교가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끌어안고 기뻐하는 걸 보는데 배가 묵직하니 안 먹어도 부른 기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치영은 그들의 고맙다는 인사에 황송하여 그만해 줬으면 생각하다가도, 더 듣고 싶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에스퍼들과 치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박형인이 브라우니를 에어프라이어에 살짝 돌려 따끈하게 데운 후 스쿱으로 아이스크림을 퍼 그 위에 올려 주거나, 에스프레소를 내려 아포카토를 해 주었다.

    그 호화스러운 디저트들에 치영 역시 무척이나 즐거워졌다. 거실에 둘러앉아 간식을 먹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그들은 TV 프로를 보기도 하고, 게임기를 연결해 컨트롤러로 가상 테니스를 치기도 했다.

    손을 휘두르는 속도를 컨트롤러가 감지하여 스매싱의 강도가 정해지는 식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에스퍼들의 어깨 힘이 너무도 좋아 오류가 계속해서 생겼다.

    덕분에 치영은 1위는 아니어도 2위까지 오른 덕에 설거지에서 제외되었다.

    맨날 얻어먹기만 하고 뒷정리 한 번 도와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치영은 방사 가이딩을 시작했다. 두통이 여진처럼 머리를 울렸지만 참을 만한 정도였다.

    “요새 때깔 좋아졌다고 차였잖아.”

    김민우가 투덜거렸다.

    스테디한 상대는 아니지만 나름 작업 중이던 가이드가 치영이 춘란의 숙소로 온 다음부터 짜증이 심해졌다는 얘기였다.

    방사 가이딩이라도 춘란의 에스퍼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데다가 훈련을 하며 접촉하면 또 가이딩이 되니, 그 가이드로서는 제가 해 주지 않아도 미묘하게 가이딩을 충족시킨 채 제게 오는 김민우가 짜증 났을 것이다.

    사람 갖고 노냐며 화를 내더니, 그다음부터 연락조차 받지 않는다고 했다.

    허인나는 자유 연애 주의로 따로 만나는 가이드가 없지만, 이인교 역시 상대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다고 했다.

    박형인의 애인은 에스퍼‧가이드 특수군이 아닌 일반인으로 가이딩이라는 것이 에스퍼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예 모르는 데다가, 박형인을 전국 방방곡곡 트럭 하나 타고 돌아다니는 야채 팔이 장수로 안다고 했다.

    “…하지만 제가 해드리는 가이딩 정도로는 양을 충족 못 하셨을 텐데…….”

    치영의 가이딩 등급이 상관없는 것은 백한뿐이다. 높은 매칭률이 양적 부족함을 완전히 메워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춘란의 다른 에스퍼들은 달랐다. 기백한 만큼 높지 않다고 해도 그들 역시 S급의 에스퍼들이라 F등급인 치영의 가이딩으로는 간의 기별도 가지 않아야 정상인데, 다들 지속적으로 만나던 가이드에게 뺨을 맞거나 차였다니 걱정이 되었다.

    “아닙니다. 안 소위 가이딩은 꽤 든든합니다.”

    박형인은 참외를 깎고 있었다. 그가 가장 예쁘게 깎인 조각에 포크를 찔러 치영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치영은 포크를 받아 들며 조금 멍해졌다. 춘란에 와서 제 가이딩에 대한 칭찬을 몇 번 듣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의외였다.

    자신의 가이딩이 든든할 정도라니. 당황한 치영은 포크만 받아 든 채로 굳어 버렸다. 김민우가 접시에 있던 참외 조각을 홀랑 집어 먹으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안 소위 가이딩 꽤 든든해요. 양에 조금 안 차는 건 있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아주 맛있는 걸 한 조각 먹었을 때 배는 안 부르더라도 만족스럽잖아요. 안 소위 가이딩이 그래요.”

    “헉, 맞아요. 웬일로 비유를 그렇게 잘하세요?”

    “이게 또 상관 취급을 드문드문하네?”

    허인나의 대꾸에 김민우와 그녀는 금세 투닥거렸다. 치영은 그사이 민우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만족스러운 가이딩이라니. 가이딩실에서 일할 때는 한 번도 듣지 못한 칭찬이었다. 자세히 말해 달라고 조르고 싶은 마음 반, 예상치 못한 칭찬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결국 치영은 더 참지 못하고 귓등을 벌겋게 물들인 채 먼저 올라가 보겠다며 제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감는 내내 에스퍼들의 칭찬이 귓가에서 맴돌아 씻고 나온 뒤에도 조금 멍한 상태였다.

    자신의 가이딩이 에스퍼들로 하여금 만족감을 준다니. 지금까지 백한이 제게서 가이딩을 받아 간 것도 다 각인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치영의 가이딩 자체가 아주 훌륭한 것은 아니라도 영 쓸모없는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었다면?

    치영은 조금 들뜬 마음으로 머리를 대충 말리고 누워 버렸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에 새 둥지가 지어질 테지만 그래도 좋았다.

    들뜬 마음이 그 정도는 무시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가이딩이 나쁘지 않은 정도라고 생각하자마자 살짝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다면 백한 역시 제 가이딩을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일까? 각인 때문에 들러붙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치영이 갖고 있는 무언가가 쓸 만해서?

    그것은 치영으로 하여금 옅은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 것이 싫어 발악하고 표정을 굳히고 입을 닫았었다.

    물론 자신이 F급 가이드인 것이 변하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자신감이 살짝 생겼다.

    치영은 꿈에 부풀어 잠들었다. 더욱 훈련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역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군에 있는 동안 제 직업인 가이딩을 잘해 보고 싶었다.

    그것이 치영의 오랜 숙원이었다. 저 역시 가이드이니까. 안치영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이드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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