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60화 (60/114)

60화

“옳은 말만 하니까 기가 죽네.”

기백한의 고개가 제 쪽으로 기울어졌다.

치영은 작게 숨을 들이 삼켰다. 그는 마치 키스라도 하듯 턱을 틀고 있었다.

진회색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집요한 응시가 버거울 정도였다.

“내 가이드가 이렇게 옳은 말만 하는데, 나도 자기 확신이라는 걸 좀 가져 봐야겠지?”

“…개소리 그만하고 비키십시오.”

“비키긴 어딜 비켜. 내 확신에는 네 도움이 필요하댔잖아.”

백한은 그대로 치영에게 입술을 붙였다. 확신과 입맞춤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맞붙은 입술의 감촉은 선연하기만 했다.

그의 향수 냄새가 비강을 타고 전해졌다. 제 입안에서 뭘 가져간 건지, 백한의 굵은 목울대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읏…….”

입술 사이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치영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이번에도 그 시도는 헛수고로 돌아갔다.

에스퍼들처럼 골격이 장대한 건 아니지만, 치영 역시 170cm 후반대의 키를 갖고 있다. 성실한 성격 때문에 훈련을 게을리한 적도 없어 몸이 다부졌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범주에서나 받을 수 있는 평가였다. 에스퍼, 그것도 기백한 정도 되는 에스퍼들은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으나, 전혀 다른 힘을 가진 존재들이니까.

아무리 신체를 갈고닦아도 인간과 맹수의 완력 차이가 현저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

있는 힘껏 밀어 봤자 밀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볼 때마다 열이 뻗쳤다. 저도 남자인데 힘 한번 못 써 보고 매번 끌려다니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애 다루듯 끌고 다니는 걸 언제까지 받아 줘야 할까.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치영 역시 그런 것들은 고작해야 열등감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기백한이 저보다 잘난 것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라, 보상받지 못한 사랑과 애초에 저울이 기울어진 채로 시작한 감정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치영은 단 한 번이라도 기백한 앞에서 대단해 보이고 싶었다. 이제는 그가 저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하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그만 못나 보이고 싶었다.

그는 제 짝사랑 앞에서 너무 못난 꼴을 많이 보였다. 그게 가장 비참했다.

“하지, 마.”

그러나 입술 사이로 빠져나간 것은 들끓는 듯한 목소리였다. 각인을 나눈 에스퍼와의 접촉은 에스퍼뿐만 아니라 가이드에게도 깊은 흥분을 유발한다.

에스퍼가 갖는 흥분이 제 안을 파고 들어오는 가이딩에 대한 염원과 급속히 안정화되는 것에 대한 쾌감이라면, 가이드가 느끼는 것은 에스퍼를 만족시켰다는 정신적 희열이다.

가이드가 가이딩을 통해 흥분을 느낀다면, 그것은 상대 에스퍼가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신적 교감에 대한 흥분인 것이다.

치영은 그것이 아이러니했다. 기백한은 늘 저를 함부로 대하면서도, 늘 이런 식으로 치영의 가이딩을 통해 만족감을 느꼈다.

접촉 후 바로 토악질을 하더라도, 역겹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치영의 가이딩 자체에 거부를 품은 적은 없었다.

“입 좀 벌려. 맨날 하는 건데 왜 실력이 늘지를 않아.”

두 사람 사이의 입맞춤이 익숙하다는 듯 구는 태도에 기가 막혔다.

그러나 치영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맞닿은 곳으로부터 가이딩이 빠져나갔다. 원치 않으면 가이딩을 잠글 수 있는 치영도 기백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각인된 에스퍼를 향한 가이딩 파장이 불이라도 붙은 듯 찌릿거리는 것이 거슬렸다.

“흐…….”

허리를 더듬는 손길이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기백한의 에스퍼 파장이 안정화 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치영이 건네준 가이딩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치영에게는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몸속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기백한에 관해서는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제 몸까지 그러할까.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츄읍,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기백한이 한 번 더 도장을 찍듯 입술을 꾹 눌렀다 뗐다.

그가 다소 멍해 보이는 치영의 앞머리를 쓸어올려 주며 말했다. 나른하게 풀린 눈동자가 치영의 뺨을 쓰다듬듯 응시했다.

“음, 틀림없는데 왜 결과가 저따위로 나왔을까.”

알 수 없는 말만 해 댄다. 뭐라 더 묻기도 싫어 치영은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 쳤다. 꺼지라는 뜻이었다.

“손 되게 맵네.”

기백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한 뒤 치영을 스르륵 놔 주었다. 온 힘을 다해 때렸는데도 간지럽지도 않아 보여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지? 근데 네가 잘못한 거야. 왜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나 성격 나쁜 거 알면서.”

백한이 짧게 깎아 뒤로 넘길 것도 없는 치영의 옆머리를 귓바퀴 주위로 둥글게 긁어 주며 말했다.

눈빛이 다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치영은 소름이 돋았다. 재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름 끼치게 왜 그러십니까.”

“내가 너한테 사과하는데 그게 소름 끼쳐?”

제멋대로 하는 사과에 감읍해 어쩔 줄 모르겠다고 해야 하는 건가. 치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개짓거리 다 하셨으면 좀 꺼지십쇼. 손 처장한테 다시 들어가 봐야겠으니까.”

“그 새끼한테는 왜 또 가.”

단박에 에스퍼 파장이 찌릿거린다. 흐물흐물 풀어져 애교라도 부리듯 치영에게 엉겨 붙던 파장들이 금세 날카로워진 것이 웃겼다.

치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도시플로를 잠그고 손등에서 링거 바늘을 아예 뽑아 버렸다. 피에 섞인 약액이 주륵 흘러나왔다.

“손 처장이랑 무슨 얘기를 나누다가 쓰러진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납니다. 처장실을 나온 기억도 없으니까 거기서 쓰러졌다는 얘긴데, 손 처장이 중령님께 아무 말 없었습니까.”

기백한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다시금 기색을 부풀렸다. 치영에게 앙탈을 부리듯 날카로워져 있던 에스퍼 파장들이 한꺼번에 화르륵 불타오르며 분노하고 있는 듯했다.

치영의 한쪽 눈썹이 저절로 추켜 올라갔다.

‘아까부터 이것들은 왜 이러는 거야.’

가이딩실에서 일하며 많은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 주었지만 이렇게 유별난 에스퍼 파장은 또 처음이었다.

‘각인한 에스퍼의 것이라 그런가…….’

그냥 그렇게 추정할 뿐이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

에스퍼의 파장은 고유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처럼 굴 때가 있다. 민감하거나 고등급의 가이드일수록 더욱 잘 느낄 수 있다는데, 치영은 에스퍼의 파장을 읽는 예민도가 높았다.

자신은 고등급이 아니니 민감한 타입이라 그렇다고 속으로 추정하기는 했다. 그게 뭐 특별한 능력인 것도 아니라서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어쨌든 에스퍼의 파장은 고유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런 비유가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마치 생령 같기도 했다.

대부분은 그의 주인인 에스퍼의 성격과 닮은 점이 많은데, 기백한의 것은 치영에게 군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어 얼굴이며 어디며 가리지 않고 싹싹 핥아 대는 덩치 커다란 개처럼 느껴졌다.

기백한이 가장 싸가지 없었던 순간조차 그것들은 치영에게 자주 애교를 떨고는 했다. 주인을 닮아 싸가지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살갑게 치영의 가이딩 파장에 섞여드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근데 지금은 전에 없이 날뛰고 있었다. 본드 불고 눈깔이 돌아 2000cc 오토바이 안장 위에 한 발로 올라타 전갈 자세로 운전을 하는 폭주족 같기도 했다.

‘…왜 저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기백한조차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좋아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그래, 그 개새끼가 그랬다 이거지.”

“뭐를 말씀이십니까.”

“너는 왜 그런 중요한 걸 이제 얘기해.”

네가 말할 틈이나 줬고? 치영은 황당하여 백한을 바라보았지만, 백한은 이미 다른 생각 중인지 손가락을 툭툭 꺾기도 하고, 목을 돌려 콰드득 소리를 내기도 했다.

“넌 숙소 가 있어. 내가 가 볼 테니까.”

“아니, 제 일인데 왜 중령님이…….”

“이게 또 사람 서운하게 말하네. 까불지 말고 가 있어. 아니다, 넌 존나 사고만 치고 다니니까 혼자 둘 수가 없어.”

기백한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안치영 깨어났으니까 가이드 병동 앞에 차 대놓고 있다가 이 자식 나오면 바로 숙소 데려가서 뭐라도 먹여.”

수화기 반대편에서 뭐라 뭐라 대거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민우인 듯했다. 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저 혼자 가도 되는…….”

“야, 빨리 이거 신어. 가게.”

백한은 대답도 하지 않고 아직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치영의 발목을 달랑 들어 올렸다.

덕분에 치영은 상체가 뒤로 발라당 넘어가 버렸다. 침대 아래 넣어져 있던 치영의 운동화를 꺼낸 백한이 능숙하게 신을 신기기 시작했다.

“뭐 하는 겁니까!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너 못한대요?”

백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다른 쪽 발목도 덜렁 들어 신을 신겨 주었다. 치영은 어쩐지 조금 쪽팔렸다.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고 아예 골반을 번쩍 들어 일으키더니, 병실 밖으로 들어 옮기다시피 치영의 옆구리를 잡아끌었다.

“왜 지랄이야, 진짜.”

“입 험한 거 봐. 넌 나만 싸가지 없다고 생각하지. 지는 더한 것도 모르고.”

백한이 피식 웃으며 치영의 뺨에 입술을 꾹 붙였다 떼었다. 치영은 어깨를 들어 올린 뒤 고개를 모로 숙여 제 옷에 뺨을 슥 닦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한이 흥얼거리며 말했다.

“집에 얌전히 가 계세요. 마누라 일 좀 하고 퇴근할 테니까.”

마누라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치영은 짜증이 났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기운이 쪽 빨린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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