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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59화 (59/114)
  • 59화

    군의관은 그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친놈 같은 눈빛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식은땀까지 흘려 댔다.

    기백한이 숨만 내쉬어도 직경 1000km의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지간히 심약하네……. 군의관도 훈련은 받으니까 에스퍼가 낯선 것도 아닐 텐데.’

    치영은 그의 이마에 솟은 땀방울을 보며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애초에 이곳은 센터 내 병동이니 군의관도 에스퍼는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긴장하다니 기백한이 어지간히 무서운 듯했다.

    심약한 군의관에 비해 간호장교는 이 일과 자신은 남이며, 자신의 업무는 오로지 치영의 손등에 꽂힌 바늘에서 약액이 잘 흘러들게 만드는 것뿐이라는 얼굴로 도시플로를 조정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이제 말씀하시지 말고 계세요. 속이 조금 울렁거려도 정말 토할 것 같지 않은 이상은 말씀하시거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군의관에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치영이 판 위에 올려진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주목했다.

    어쩐지 손안에서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설명처럼 정말 속이 울렁거렸다. 치영은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있었다.

    약식 검사기라더니 정말이었는지 30초 정도 흐르자 삐빅 소리가 나며 검사가 완료되었다.

    “이제 결과가 나올 겁니다.”

    검사는 기구가 다했는데 왜 제가 후련한 얼굴인 것인지. 가운 소매로 이마에 흘린 식은땀을 닦으며 군의관이 백한을 향해 말했다.

    백한은 아무런 말 없이 기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태도가 고압적이고 단호해 보였다.

    ‘왜 저렇게 심각해.’

    치영은 의아할 뿐이었다. 대체 등급 검사를 왜 다시 하자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금 삐빅 하는 부저음이 울리고 검사값이 나왔다. 군의관이 산뜻하게 말했다.

    “F급, F급 나오셨네요.”

    “…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제 팔에 휘감겨 있는 링거줄을 정리하던 치영과 상반되게, 기백한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목구멍을 긁고 나온 듯한 소리였다. 치영이 이상함을 느끼고 그를 돌아보기도 전이었다.

    갑작스레 방 안에 에스퍼의 파장이 폭발하듯 범람했다.

    “허억! 기, 기 중령님—!”

    “여기는 가이드 병동이에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당황한 군의관보다 간호장교의 판단이 빨랐다.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치자, 기백한이 폭발시켰던 파장을 천천히 갈무리했다.

    치영은 간만에 튀어나와 보고 싶었다는 듯이 제게 엉겨 붙는 백한의 가이딩 파장이 어이없기도 하고, 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아 물끄러미 백한을 바라보았다.

    그때, 우그적 하는 소리가 났다. 등급 측정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뭔가 했더니 기구 내부에 중력을 과하게 주입해 안쪽에서부터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 하시는 겁니까.”

    치영은 기가 막혀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도 F등급이었다. 성장기라 다소 낮게 측정될 수 있다는 말에 스무 살이 넘으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대로였다.

    그러나 백한은 오히려 한 번도 치영의 등급이 낮은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의 등급이 낮은 것보다 치영이 남자인 것이 그에게는 중요해 보였다. 대략적으로 들어 알고 있는 기백한의 과거도 치영의 등급이 아닌 성별이 문제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치영의 가이딩 등급이 낮다는 걸 정확한 수치로 조사되기 전에 알고 있지 않았는가. 갑작스러운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치영을 이악의 돼지 우리에서 구해 내던 그 순간부터 치영은 제 밑천을 백한에게 들켜야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등급이 낮은 것에 파장이 폭발할 정도로 화를 내다니. 치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파삭, 소리를 낸 기구가 이제 아예 원래의 형체를 알 수 없이 구겨져 버렸다. 티타늄과 회로판으로 구성된 기구건만, 백한의 이능 앞에서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리고 그때, 백한이 입을 열었다.

    “다 나가.”

    제멋대로구만. 치영은 제 병실에서 나가라는 백한을 짜증스럽게 흘겨보고는 이동식 링거 폴대를 잡고서는 밀며 일어나려 했다.

    기백한이 기다란 팔을 뻗어 치영을 막아 세웠다. 손바닥이 하도 커 복근과 가슴이 다 덮일 정도였다.

    “너 말고.”

    그 말에 군의관이 다소 다급하게 나갔고, 간호장교는 들고 왔던 소독솜과 반창고 테이프가 담긴 트레이를 집어 든 뒤 군의관의 뒤를 따라 병실을 빠져나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닫혔다.

    치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번에는 뭐로 또 지랄을 해 대려나. 어쩔 수 없는 이유들로 백한으로 하여금 수없이 공격을 받아 온 치영은 반쯤 포기한 상태로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야.”

    “…….”

    “이게 예쁘다 해 줬더니 수작도 부릴 줄 아네.”

    “무슨 수작 말입니까.”

    영문을 알 수 없어 묻자, 백한이 스산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데 눈빛이 너무나 매정해 보이고 싸가지 없어 보였다. 치영은 짜증이 났다.

    껍데기가 예쁘면 뭘 하나. 왼쪽 눈 아래 박힌 점은 백한의 그 정떨어지는 표정을 상회시켜 주지 못했다.

    “기백한 대대장님은 인상을 찌푸려도 멋있으세요.”

    언젠가 신입 가이드 중 한 명이 한 말이다. 치영은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저 표정을 짓고 제게 얼마나 정이 뚝뚝 떨어지는 말들을 많이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저 혼자 착각했다가 저 혼자 비뚤어져 치영을 버리고 상처 주었다. 치영은 그냥 오늘을 살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흘려보낸 것뿐이지, 그가 했던 말을 하나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수틀릴 때면 제게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얼마나 저를 아프게 매질하는지 말이다.

    기백한은 성난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몇 가지 기대한 게 있었거든.”

    그놈의 기대. 저 멋대로 해 놓고 또 멋대로 실망하겠지. 치영은 이 상황이 익숙했다.

    “근데 너는 그때마다 그걸 깨 먹네.”

    은근슬쩍 치영의 잘못으로 돌리는 꼴도 짜증 났다. 제 성격 나쁜 게 왜 내 탓이야. 치영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그의 주변을 떠도는 에스퍼 파장이 얼마나 날카롭게 흔들리고 있는지 닿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기가 비틀릴 대로 비틀렸다는 뜻이다.

    백한이 익숙지 않은 다른 이들이 보면 바지를 적실지도 모를 만큼 살벌한 표정이었다.

    아름다운 얼굴 속에 들어 있는 잔인함이 그대로 튀어나온 모습. 그러나 치영은 그의 그런 표정이 익숙했다. 그게 익숙해질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상처받아 오기도 했다.

    백한은 치영에게로 다가와 그의 허리를 낚아챘다. 손목에 연결된 링거줄이 침대의 낙상 방지 난간에 걸려 쭉 늘어났다.

    덕분에 바늘이 빠진 것처럼 손등이 얼얼했다. 차갑다고 생각했는데, 링거액이 피와 섞여 묽은 붉은색으로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지저분한 흔적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 방에 있는 누구도 치영의 손등에 있는 자잘한 상처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백한이 여전히 스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는 기대가 좀 되거든.”

    “…….”

    “생각보다 화가 덜 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기백한의 시선이 치영의 입술 위, 목덜미 등을 훑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이를 세워 깨물듯이 말이다.

    에스퍼의 욕정 가득한 시선을 적나라하게 마주한 치영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든 네가 나한테 유일무이하다는 거,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백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왼쪽 눈꼬리 아래 있는 눈물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웃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잘해 봐, 안치영이.”

    “…….”

    “누가 알아. 내가 언젠가는 네 발밑에 무릎 꿇고 개처럼 가이딩이라도 구걸할지.”

    치영은 두 눈을 감았다 뜨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

    “중령님은 대단한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치영은 표정 없이 말했다. 기백한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치솟았다.

    “제가 뭔가를 얻어내려고 중령님을 속였다는 착각. 하지만 저도 중령님과 얽혀서 좋았던 적이 없습니다.”

    “…말을 막 하네?”

    “너는 언제 말 가려서 한 적 있어?”

    치영의 심상한 말에 기백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이것 봐라, 싶은 얼굴이었다.

    치영은 문득 그가 저를 바짝 끌어안고 있는 것이 불편했다. 왜 이렇게 붙어서 말하는 거야. 내가 싫다며. 싫은 놈을 왜 껴안는 건데.

    백한이 저를 껴안고 있는 팔을 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치영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때까지 가만히 내려다보던 백한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망치러 작정하고 붙어 있다, 이 말인가?”

    “붙어 계신 건 중령님 쪽입니다.”

    치영은 서늘한 눈으로 말했다. 온기가 없는 눈매였다. 맞붙어 있던 에스퍼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것도 접촉이라고 각인을 나눈 에스퍼를 향해 가이딩이 스며들었다.

    그게 지긋지긋했다. 서로와 각인을 맺은 것이 후회되는 건 이제 기백한뿐만이 아니었다.

    백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치영을 안고 있는 팔을 풀어 주는 것도 아니었다. 붙어 있는 건 네 쪽이다, 싫다면서 가이딩을 받아 간 것도 너다, 하는 얼굴로 숨죽이고 있는 치영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씩 웃었다. 치영은 그가 그런 식으로 웃을 때마다 좋았던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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