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얜 또 왜 기절한 거야.”
낮고 곧은 목소리라 듣기는 좋은데 심하게 짜증을 내고 있는 말투였다. 멍한 의식 속으로 그 목소리가 스며들었을 때 치영은 반사적으로 ‘또 시작이군.’ 하고 생각했다.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은데 자세한 건 검사를…….”
“아는 게 없다 이거야? 그런 말은 의대 안 나온 나도 해.”
심드렁한 어조였지만, 치영은 기백한의 목소리가 상당히 상대방을 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갈굴 때 저렇게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듯 툭툭 던지는 것처럼 말해도 상대방은 압박을 느끼고는 했으니까.
어쩌다 레이더에 걸려들어 갈궈지고 있는 상대방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그럼 검, 검사를 진행할까요?”
“자꾸 나한테 묻네. 의사 면허 반납해라, 넌.”
왜 또 저래. 치영은 어쩔 수 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대체 왜 자신이 병실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손 처장을 만나러 갔던 것 같은데 기억이 희미하다. 그를 만나고 쓰러진 건지, 아니면 만나러 가다가 쓰러진 것인지 확실치가 않았다.
제가 있는 이곳은 가이드 병동 같은데 어째서 기백한이 와 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 깼으니까 대가리 박살 난 건 아닌지 잘 살펴보라고, 좀.”
기백한이 군의관의 가운 뒷덜미를 잡아 올려 치영에게로 끌고 왔다.
치영은 군의관이 한껏 기가 죽은 얼굴로 저를 보며 가운 포켓에서 동공 반사 검사용 펜라이트를 꺼내는 걸 바라보았다.
치영은 군의관의 검지와 엄지에 의해 눈꺼풀이 위아래로 벌려지며 물었다.
“저를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기억이 애매모호했다. 분명 손 처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깨어나 보니 의무 병동에 있지를 않나…….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 애쓰는 치영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기백한이 입을 열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치영은 의아했지만 그의 다음 말에 아연해져 버렸다.
“북문 근처 숲속.”
북문? 이상했다. 자신은 분명 손 처장을 만나기 위해 작전처가 있는 본청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본청 건물은 서문과 동문, 북문으로 이루어진 센터의 정중앙에 있다. 그로부터 십수 킬로미터가 떨어진 북문 근처 숲속에서 발견되었다니. 그것도 의식을 잃은 채로. 말이 되지 않는다.
“기억이 안 나나 봐?”
백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치영에게 물었다. 그의 어조에서 의심을 읽어 냈다. 무엇을 의심하는지도 모르겠고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와 저 사이에 신뢰라는 것이 있어야 그 눈빛은 뭐냐고 따져 묻기라도 하지. 치영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고 그냥 제가 궁금한 것만 먼저 물었다.
“저는 얼마나 이러고 있었습니까?”
군의관은 펜라이트를 제 포켓에 집어넣은 뒤 태블릿 PC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그러고는 백한의 눈치를 흘끗 보고는 대신 입을 열었다.
“안치영 소위님이 언제 의식을 소실했는지 알 수 없지만, 본청 건물 출입 기록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27시간 전, 그러니까 어제의 일입니다. 최소 12시간 이상은 기절해 계셨습니다.”
“…어제, 요?”
치영이 두 눈을 깜빡였다. 그게 어제의 일이라니. 놀라 백한을 보자, 그는 아까와 다름없는 얼굴로 치영의 시선을 마주했다.
“분명 나간 기록도 없고, 폐쇄회로 카메라에 찍힌 것도 없는데 북문 쪽 숲에서 발견되었다는 거지.”
기백한은 무언가를 살피는 얼굴로 치영에게 그 외의 것들을 설명했다. 치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두통이 유독 심한 날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의식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뿌옇던 기억이 조금 돌아왔다.
자신은 분명 손 처장을 만나기 위해 작전처장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제 안중에 없는 건 처장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나름의 보험은 있습니다. 뭔지 말씀드리기에는 자리가 조금 그렇고, 어쨌든 이렇게 보여도 제가 마냥 멍청하지는 않다는 것만 알아 두시면 되겠습니다.”
“…안 소위 지금 나 협박해?”
“역시 처장님이십니다.”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치영은 소름이 끼쳤다. 더 이상 기억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됐어. 기억 안 날 수도 있는 거야. 아까 저 돌팔이 하는 말 못 들었어? 스트레스 때문이라잖아.”
기백한이 치영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밀어 다시금 침대에 눕게 만들었다. 불시에 밀려 눕게 된 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제가 적어도 꼬박 하루는 행방을 알 수 없다가 북문 쪽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니까. 야, 뭐 하냐. 비타민 주사라도 놔 줘라. 애 얼굴이 허옇잖아.”
기백한이 제 한 줌도 안 되어 보이는 군의관을 툭 치며 짜증을 냈다. 군의관은 기백한이 가볍게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목에 걸고 있던 청진기가 튀어 오를 정도로 흔들렸다. 그는 어서 이 방을 나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치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백한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의심스럽다는 듯 치영을 보더니, 이제는 치영이 그 화제에 대해 떠올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변덕스러운 태도가 하루 이틀인 것은 아니지만 묘했다.
“아, 그럼 수액 놔 드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검사는 지금 바로…….”
“애 깼으니까 됐어.”
기백한은 손사래를 쳤다.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이 된 군의관은 수액 키트를 준비해 오겠다며 자리를 뜨려다가 다시금 가운의 목덜미를 붙잡혔다.
“무, 무슨…….”
“다른 검사 말고 가이딩 등급 검사기 가져와. 약식이어도 괜찮으니까 내가 직접 결과 볼 수 있는 걸로.”
치영은 의아했다. 가이딩 등급 검사기는 왜? 체내에 가이딩 수치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혹시 가이딩 고갈 때문에 의식이 소실되었는지 검사하는 기계도 아닌 등급 검사기를 가져오라니.
“네넵.” 하고 군의관은 박자 꼬인 대답을 하더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가 버렸다.
내내 말을 더듬던 그가 나가자 병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치영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표정으로만 물었다. 기백한은 그런 치영의 얼굴을 봐 놓고도 흰소리만 해 댔다.
“끽하면 기절하고 뻑 하면 쓰러지는구나. 갓 태어난 멸치 새끼도 너보다는 세겠다.”
그러나 그 말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멸치보다야 제가 조금 더 세기는 하겠지만, 근래 들어 졸도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저도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치영은 다른 걸 물었다.
“여기 근데 가이드 병동 아닙니까? 에스퍼는 출입 안 되지 않나.”
“궁금한 게 그것밖에 없으셔요?”
기백한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침대 옆 콘솔 아래에 있는 간이 냉장고에서 병 음료수를 하나 꺼내 왔다.
알로에 주스였다. 저를 주려나 싶었다.
“전 안 먹습니다.”
“뭐래. 내 건데.”
치영의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은 기백한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식으로 대답하며 병의 목을 꽈드득 돌려 뚜껑을 따 버렸다. 퐁 하며 마개 열리는 소리가 쉽게 났다.
치영은 약간 민망했다.
‘난 또……. 나 주는 건 줄 알았지…….’
그간 기백한이 항상 치영의 식사를 챙겼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짜증 난다, 귀찮다 하며 무수히 많은 욕을 퍼부었지만 사실은 저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치영은 귓등이 조금 붉어졌다. 쪽팔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알아챈 것인지 기백한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넌 금식이야. 가이딩 등급 검사 할 거라니까.”
“아…….”
등급 검사는 간혹가다 속을 울렁거리게 할 위험이 있어 가능한 공복에 진행된다. 치영은 지난 몇 시간 동안 먹은 것이 없을 테니 검사하려면 지금이 적기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기능적인 측면이고, 검사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등급 검사는 갑자기 왜 하자는 겁니까.”
“이게 뭐야. 맛이 구려.”
기백한은 대답도 않고 제가 먹던 병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미끌거리는 알로에의 식감이 싫은 듯했다.
대답 안 해 주겠다 이거지. 치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백한이 저렇게 나오면 저로서는 알아 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정말 궁금했다. 왜 기절한 건지 이유도 모르고, 기억에도 없는 곳에서 발견되었다는데 제 각인 에스퍼는 뜬금없이 가이딩 등급 검사를 하잖다.
치영은 작금의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라고 구슬리면 이유를 알려 줄지 고민하던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나갔던 군의관이 간호장교와 함께 들어왔다.
“저… 등급 검사랑 수액 놔드리려고…….”
한껏 긴장한 군의관의 얼굴을 보며, 기백한이 인상을 쓰고 으르렁거렸다.
“자신감이 왜 이렇게 부족해. 진짜 돌팔이 새끼 같잖아.”
치영은 그가 아까부터 군의관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의 성격적 결함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끼어들지 않았다.
군의관의 뒤를 따라 들어왔던 간호장교는 그런 백한을 흘끗 보더니 흥미 없다는 얼굴로 치영의 소매를 걷고 손등을 두들겼다.
“따끄음.”
목소리는 친절한데 표정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간호장교가 링거 바늘을 치영의 손등 정맥에 꽂는 사이, 의무관은 반쯤 질린 얼굴로 제가 가져온 가이딩 검사 기구를 펼쳐 놓고 치영의 손바닥을 검사기의 평평한 면에 올려 두게 했다.
“약식이라 오, 오래는 안 걸리는데 조금 부정확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A등급이 갑자기 B등급이 되지는 않습니다. A등급 중 상위 수치를 갖고 있는 가이드가 B등급과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수치로 나올 수는 있겠으나, 등급 자체가 변하는 일은 없습니다.”
기백한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저 뚫어지게 검사기를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