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치영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저를 끌고 제 차로 향하는 기백한의 뒷모습을 보며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다 이렇게 딱 붙어서 생활하게 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모두 저 뻔뻔한 성격 때문이다.
“뭐야, 차 문 열어 줘야 타? 왕자님이야?”
어이가 없어 가만히 서 있는 걸 보고 오해한 건지, 기백한이 운전석으로 향하다 말고 돌아와 보조석 문을 열어 줬다.
조용히 열어 주고 말 것이지 한마디 덧붙이는 게 얄미웠다.
“서비스 죽이지? 구하러 가 줘, 사고 치면 수습해 줘, 차 문 열어 줘, 내가 너한테 너무 잘하는 것 같지 않니?”
그렇게 말하며 뻐기는 표정이 잘생기고 재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잘생긴 것도, 재수 없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라, 치영은 심드렁하게 대꾸할 수 있었다.
“중령님은 지 꼴리는 것만 하고 사시지 않습니까. 그게 어떻게 저를 위한 겁니까.”
그러고는 그가 열어 준 차 문을 지나 보조석에 올라탔다.
근래 들어 백한의 지프에 꽤 많이 신세를 지는 기분이었다. 기백한은 보닛을 돌아오면서도 차 안에 앉아 있는 치영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윙크를 날렸다.
반응하기도 지쳐 치영은 고개를 돌려 무시해 버렸다. 운전석에 올라탄 기백한이 차 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가이딩실에 뭐 두고 왔는데?”
“그냥 제 짐입니다.”
“그래?”
기백한은 더 흥미 없는지 카 오디오 볼륨을 높이고는 흥얼거렸다. 모자란 곳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노래를 죽여주게 못 불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부르는 것이 어이없었다. 선곡 취향도 구리기 그지없었다. 치영은 음치에게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한마디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다.
“귀가 썩는 것 같습니다. 조용히 가면 안 됩니까?”
“음치는 그럼 평생 닥치고 살아라?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어도? 네가 지금 선량한 가수 지망생 하나의 꿈을 박살 냈다는 것만 알아 둬.”
기죽은 기색도 없으면서 기백한은 치영을 향해 엄살을 부렸다.
가끔 저렇게 덩치 큰 짐승이 제 몸집은 생각도 않고 뻔뻔하게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굴 때가 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고 그저 불쾌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가수 지망생?”
그 말에 돌아본 기백한이 선량한 눈빛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꿈을 간직한 눈이었다. 오디션 프로에 나갈 테니 문자 투표 부탁한다는 말도 지껄였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기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그랬다. 왜 저러나 싶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저 인간과 얽히고 나서 별생각 없이 처음으로 터트린 웃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영은 다시금 입꼬리를 내렸다.
마침 달리던 지프가 정지 신호에 멈췄다. 창틀에 올린 팔을 꺾어 슬며시 올라갔던 입꼬리를 손으로 가리고 있던 치영은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았다.
핸들을 안고 기대다시피한 기백한이 치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뭘 봐요.”
치영이 면박을 주는데도 기백한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응시했다. 요즘 들어 종종 저런 시선으로 치영을 보는데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간신히 웃겨 놨더니 도로 무표정이야.”
“…뭐요?”
“사람이 애를 써서 웃겨 놨잖아. 그럼 실컷 보게 해 줘야지, 왜 숨기냐고.”
치영은 이번에야말로 표정이 사라졌다. 또 지랄이구나 싶어진 것이다.
“내가 웃겨 놨으니까 내 건데 왜 네 멋대로 지우냐고.”
“…운전이나 하십쇼. 뒤에서 빵빵거리고 난리 났는데.”
“괜찮아. 형이 이겨.”
뭘 이겨 미친놈아. 치영은 짜증을 눌러 삼키며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오디오에서는 여전히 희한한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석양이 치영의 눈을 찔렀다. 눈살을 찌푸리자 기백한이 기다란 팔을 쭉 뻗어 선바이저를 내려주었다.
뭐라고 또 깝쭉거리려나 싶어 옆을 바라보니 의외로 그는 입을 다문 상태였다. 용암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노을빛이 그의 진한 잿빛 머리와 눈동자를 스쳤다.
그러자 꼭 끓고 있는 용암을 덮은 재처럼 군데군데가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치영은 아주 잠깐 그것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시기가 명확한 그 어느 날 이후로, 치영은 갖지 못할 것을 탐내어 내내 바라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안치영은 욕심이 없다.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영은 창밖으로 흐무러지는 풍경들을 응시했다.
덧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들. 그런 것들의 편린만을 잠깐 소유했다 놓아 주는 일. 안치영에게는 그것이 더 어울렸다.
* * *
시간이란 원래 개개인의 불행은 제쳐두고 흐른다. 강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것처럼, 시간도 여타의 것들을 모두 무시한 채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안치영은 그것에 대해 딱히 반감이 없었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아침 해는 떴고, 곧 고꾸라져 숨을 멈추고 싶어도 밤은 찾아오는 법이다.
그래서 간만에 극심한 두통이 다시금 찾아왔을 때 치영은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그래. 어쩐지 근래에 드물다 싶었다.’라는 생각만 들었다.
두통은 나이를 먹을수록 치영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였다. 검사를 해 보고도 싶지만, 치영은 사실 제 몸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안 소위도 내가 부른 이유는 알 거야. 나로서도 굉장히 유감스러운 일이고…….”
손 처장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치영은 문득, 손 처장의 향수 냄새가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백한도 에스퍼 전용 향수를 쓴다. 오감이 민감한 에스퍼들을 위해 나온 향수인데 그의 향은 이렇게 역겹지 않았던 것 같다.
목련과 자작나무의 향이 기백한의 야성을 죽이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어울려 그를 이국의 왕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손 처장에게는 에둘러서라도 향수는 바꾸시는 게 좋겠다 충고하고 싶을 정도였다.
특히 오늘처럼 두통으로 두개골이 갈라지는 것 같은 날에는 말이다.
“근데 그게 우리 작전처 실수가 아닌 건 알 거야. 안 소위가 나를 좀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무슨 이해. 너도 살려고 절벽 타고 내려가다가 새끼손톱 갈려서 일주일 내내 새끼손가락으로 귀도 못 파 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
치영은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통이 이제는 이명으로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멀쩡한 사격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웬 야산에서 공포탄으로 하는 헛짓거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격장에서 말이다.
훈련 시 발생하는 소음 때문인가, 치영은 사격용 헤드셋을 벗으며 나오다가 미약한 두통에 비틀거렸다.
그때 손 처장을 만난 것이다. 이야기 좀 나누자는 말에 훈련장에 붙어 있는 소회의실로 들어온 참이었다.
“이번 일로 오해하는 거 없지?”
손 처장이 부드럽게 웃었지만, 두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치영으로서는 마주 웃어 주기가 힘들었다.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닌데. 나 네가 기백한 목 따려고 나까지 죽일 생각 했던 거 다 알고 있는데.
치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전역을 생각하면 지금 손 처장에게서 발을 빼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치영의 제대를 누구보다 원할지도 모른다. 기백한의 각인 가이드를 전역시켜 어떻게든 그를 제 앞에 무릎 꿇게 만들고 싶겠지.
속을 모르는 것은 아니니 이쪽도 손 처장을 이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은 두통이 너무 심했다. 꼭 누군가가 얼음송곳을 관자놀이에 대고 자루의 끝부분을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그냥 두통이 아니라 어지럼증을 동반한 두통이라, 가만히 있어도 같은 자리에서 백 바퀴를 돈 것처럼 눈앞이 어찔했다.
치영은 멍한 눈을 깜빡이다가 손 처장의 말에 대충 대꾸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든 살아 돌아오기도 했고…….”
“그래, 그거지. 안 소위는 정말 말이 잘 통해.”
“그런데 확실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무사히 전역만 하면 됩니다. 그 외의 것은 제 안중에 없습니다. 이건 꼭 좀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그건 내가 지켜 줄 수 있지.”
치영은 두통에 의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손 처장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창백한 탓에 기묘하게 낮아진 시선의 온도가 손 처장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말이다.
“제 안중에 없는 건 처장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나름의 보험은 있습니다. 뭔지 말씀드리기에는 자리가 조금 그렇고, 어쨌든 이렇게 보여도 제가 마냥 멍청하지는 않다는 것만 알아 두시면 되겠습니다.”
“…안 소위 지금 나 협박해?”
“역시 처장님이십니다.”
치영은 고개를 끄덕여 네 생각이 맞다고 동조해 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 처장이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지금의 치영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회의실을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회의실 문을 잡는 순간 손이 미끄러져 버렸다. 두통이 너무 심해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악……. 으윽—.”
작게 앓는 소리조차 제게는 천둥처럼 들렸다. 지천에서 땅이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물어지는 시야 속에서 손 처장이 다가와 피식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 이후로는 암전이었다. 치영은 그만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