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쨌든 시비를 건 것도 그쪽이고, 먼저 치영을 밀친 것도 그쪽인데 왜 갈구나 싶기는 했다.
군기가 바짝 든 것처럼 턱을 치켜들고 있는 에스퍼들도 헌병대 대위가 그쪽을 보지 않으면 바로 치영을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딱히 무언가 변명을 하지도, 그렇다고 대들지도 않은 채 그저 그런 식으로 장난만 쳤다.
치영은 의아했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헌병대 집무실 문이 열리더니 문짝만 한 누군가가 머리를 쑥 내밀었다. 기백한이었다.
“우리 집 애새끼들이 선생님 말씀 안 듣고 반성문 쓰고 있다길래 튀어왔습니다.”
왼쪽 눈에 매달린 눈물점이 살랑 접히며 백한이 씩 웃었다.
헌병대 대위는 흠칫 놀랐다. 직접 올 줄 몰랐다는 눈빛이었다. 쪽만 주고 빨리 보내려고 했는데, 기백한이 너무 빨리 달려온 것이 의아한 것 같기도 했다.
“중, 중령님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훈방 조치 하려던 참입니다.”
김민우가 작게 “지랄.” 하고 속삭이는 것이 줄 끝에 서 있던 치영에게까지 들렸다.
기백한은 들고 들어온 유리병 주스 세트를 책상에 턱 올려 두더니 손뼉을 짝 치며 야살을 떨었다.
“아니 우리 애새끼들 잡아 두신다고 수고가 많으신데 주스도 좀 드시고, 이럴 때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라고 하길래 내가 또 딱 챙겨 왔지.”
“무슨 말씀을……. 아니 웬 주스를 다…….”
“수고가 많으셔. 자, 그럼 뭔 짓거리를 했길래 선생님한테 개털리고 있는지 죄목 좀 볼까.”
대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백한이 그의 손에서 자연스레 보고서를 가져갔다.
헌병대에 들어온 보고서니 백한이 아무리 중령이라고 해도 함부로 볼 수는 없는 것인데, 물 흐르듯 넘기는 태도에 대위는 할 말을 잃었다.
대위가 기백한의 기세에 눌려 어버버거리고 있는 사이, 허인나는 어느새 코를 파며 자세를 늘어트린 채였다. 치영만 아직까지 열중쉬어 자세였다.
“소위님, 이제 쉬셔도 됩니다. 대대장님 오셨잖습니까.”
이인교가 치영에게 속닥거렸다. 치영은 그 말에 기백한 쪽을 흘끗 보았다. 그는 기다랗고 유려한 손가락을 놀려 보고서를 팔랑팔랑 뒤집고 있었다.
“아이고 많이도 깨부수셨네.”
“네, 네……. 아무래도 누림동 상가 피해가 커서 그에 대한 피해 보상을…….”
“그래. 피해 보상을 마땅히 해야지. 나라 지키는 군인이 소상공인에게 피해를 줄 수야 있나. 그것도 전우의 가족분이신데.”
상업 지구 누림동에서 일하는 상인들 중 태반이 에스퍼와 가이드를 가족으로 둔 이들이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존재 전반에 걸친 것들에 대한 비밀 서약을 조건으로 입점 허가권을 내준 것이다.
오늘 깨부순 레스토랑 사장님도 지금은 파병 가 있는 어느 에스퍼 소령의 여동생이었다.
피해 보상 소리에 치영은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사고를 쳤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기 시작했다.
‘수리할 때까지는 영업도 못 하실 텐데…….’
상대 에스퍼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게가 입은 피해가 있을 텐데 어떻게 보상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십시일반 모아서 위자료도 전달드려야 하나 싶어졌다.
돈을 쓸 만한 데가 없어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놓기는 했지만 이렇게 위자료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얼마나 들지는 모르겠지만 돈을 모아 놓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영이 제 은행 잔고를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백한이 보고서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손바닥을 짝 쳤다. 손바닥도 무식하게 커서 짝 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자, 그럼 우리 애새끼들 맘마 먹일 시간이라 이제 데려가도 되지?”
“네……? 아니, 그게 무슨.”
“안치영이.”
기백한이 대위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치영의 이름을 불렀다. 거기서 제 이름이 나올 줄 몰랐던 치영은 조금 놀라 백한을 바라보았다.
저에게서 네 발자국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도 백한은 치영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았다. 곧 그의 시선이 치영의 관자놀이쯤을 더듬었다.
치영은 고개를 피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눈길이 꽤 집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성큼성큼 다가와 치영의 턱을 잡았다.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쩐지 민망했다. 다른 에스퍼들은 이런 상처가 없었다. 다들 공들여 싸운 것도 아니고 설렁설렁 상대편을 쥐어팼는데, 치영은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에스퍼와의 체능 차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저도 몇 대 먹여 주기는 했지만, 혼자서 장정 50명은 너끈히 감당 가능한 기백한이 보기에는 맞기만 한 걸로 보일 것이다.
치영은 기백한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이미 기백한에게 저는 약자일 텐데도 그랬다.
그를 사랑하면서부터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굳이 다른 데서도 맞고 다닌다는 것을 이 에스퍼만은 몰랐으면 했다.
그러나 기백한은 치영의 상처 위를 골고루 훑었다. 치영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리려는 것을 내리눌렀다.
“근데 우리 가이드 얼굴에 이렇게 흠집 낸 새끼는 지금 어디 있나, 대위?”
백한은 여전히 치영의 턱을 잡은 채로 대위를 돌아보았다.
“네……? 그게…….”
“춘란대 새끼들만 잡아 와서 이렇게 쪽 주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리고 얘는 가이드인데 이거, 얼굴 꼴 좀 봐. 얘는 볼 만한 게 얼굴밖에 없는데 이거 어쩔 거야.”
그 말에 치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미친 새낀가. 치영의 얼굴은 평범한 편이었다. 눈꼬리가 쪽 빠져 새초롬한 구석이 있지만 그게 뭐 매력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단정하게 생긴 인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기는 했다. 군견에 걸맞은 얼굴이라는 멸평도 들었었다.
피부가 하얀 편인 데다가 햇빛 아래 오래 있어도 그저 빨개지고 마는 편이긴 하지만, 그 외에는 이렇다 할 특색이 없었다.
그러니 얼굴 빼고는 볼 게 없다는 말은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치영이 제 턱을 잡고 있던 기백한의 손을 치워 냈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쳐 내는 바람에 제 턱까지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백한은 계속해서 대위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린 탓에 치영 쪽에서는 얼굴이 어떤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는 걸 보아하니 상냥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가이드 얼굴에 멍 자국 남기고 토낀 새끼들 어디 있냐고.”
“토, 토낀 게 아니라 부상이 심각하여 입원을…….”
“그게 토낀 거잖아. 애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깽값 아깝다고 토껴?”
“그, 그건…….”
“그리고 자네는 그걸 그냥 내버려 뒀나 보지?”
“그게 아니라—.”
“아, 씨발. 근데 아가리가 아프네? 민우야.”
“네, 대대장님.”
대위가 굳은 채로 변명하는 말에 기백한이 두 눈을 감더니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핥으며 김민우를 불렀다. 그 표정이 딱 건달 그 자체였다.
그는 스산하게 몸을 돌려 대위에게로 다가갔다. 평균 신장이 큰 에스퍼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큰 키가 위협적으로 대위 앞을 막아섰다.
대위는 긴장한 얼굴로 기백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 위로 백한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질 지경이었다.
“우리 대위님이 반성하라 어째라 씨불이실 때 안치영이 얼굴에 멍든 거 언급은 하셨니?”
“안 하셨습니다.”
김민우가 느지럭느지럭하며 대답했다. 기백한의 고개가 모로 젖혀졌다. 분명 웃고 있으나, 눈빛만은 얼굴이 예쁘고 생김이 훌륭한 것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했다.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처럼 대위가 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기백한은 피식자가 공포에 질린 틈을 놓치지 않는 맹수처럼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우리 대위님은 하는 일이 뭘까?”
“주, 중령님.”
“부상당한 가이드 살펴보지도 않아, 가이드가 폭행당했는데 헌병대에는 폭행당한 가이드만 끌고 와, 저녁밥 다 지어 놓고 애새끼들 기다리던 선량한 대대장인 내가 굳이 직접 연락 돌려서 행방 묻고 애들 찾으러 올 때까지 연락도 안 해.”
“연락이 늦은 건 절차상의…….”
“아, 절차 좋지. 그럼 우리 애들 데려가는 절차도 마무리된 거지?”
대위는 거기서 아니라고 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았는지 아주 잠깐 망설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백한이 웃으며 대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좋아. 우리는 자네가 가래서 간 거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뭐 하니 얘들아. 찌개 식겠다. 저녁 차려 놓은 지가 언젠데 애새끼들이 귀가를 안 해서 애비 맘이 찢어졌어요, 아주.”
백한은 학원 끝난 아이들 기다린 학부모처럼 너스레를 떨면서 치영의 등을 쭉쭉 밀어 헌병대 집무실 밖으로 나가게 했다.
에스퍼들이 콧노래를 부르며 따라 나왔다. 치영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헌병대 대위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들이 나가는 꼴을 지켜보는 게 보였다.
허인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백한에게 물었다.
“진짜 밥 차려 두셨어요?”
“응. 박형인이가.”
그럼 그렇지. 허인나와 김민우가 피식 웃었다. 치영은 점심때 싸웠는데 어쩌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일이 소강되었나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저어 버렸다.
여름이 곧이라 해가 길어져 밖은 아직 밝았지만, 시간을 보니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치영은 그제야 제가 아직 치료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저……. 저는 가이딩실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먼저 숙소 가 계시면…….”
“야, 니들끼리 먼저 가서 밥상 차려 놓고 있어. 얘 데리고 금방 다녀올 테니까.”
기백한이 치영의 정수리 위로 손을 터억 얹어놓고 김민우를 향해 말했다.
김민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예, 그러십쇼.” 하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