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55화 (55/114)

55화

표정들이 하나같이 잘 걸렸다는 식이었다.

저쪽이 먼저 일어설 때까지 시비거리를 빌드업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미간을 구기고 있을 뿐 입꼬리만은 맹렬하게 올라가 있는 그들의 신난 표정을 바라보며, 치영은 조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하마들 같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씩 웃는 표정들이 기백한을 떠올리게 했다.

그 미친 하마와 팀을 이루고 오랫동안 생활해 왔으니 닮은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치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동안, 작전처의 에스퍼들이 기어코 다가와 테이블을 짚었다.

탕, 하는 반동에 의해 식기들이 울리고, 덩달아 치영의 접시들도 덜컥거렸다. 치영은 접시가 식탁 밑으로 떨어질까 봐 냉큼 잡아 떨림을 안정시켰다.

그의 그런 노력이 가소롭다는 듯이, 작전처 에스퍼 하나가 시비를 털기 시작했다. 왼쪽 가슴에 붙은 계급장을 흘끗 보니 중위였다.

“아니, 가이드 되다 만 새끼 주워 간 게 자랑이야? 시끄러워서 밥을 먹을 수가 있나.”

춘란의 에스퍼들은 입꼬리만 올린 채로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아 치영은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압축된 에스퍼 파장이 흘러나오는 것이 저릿거릴 정도였다.

그들의 그런 파장과 표정을 보지 못한 건지, 작전처의 중위가 제 일행을 돌아보며 치영을 마저 비웃었다.

“요새 군대 존나게 좋아졌다. 예전 같으면 사탕 껍질 같은 것들은 귀가나 처하시라고 놔줬는데 이제는 훈련도 시켜 주잖아? 근데 뭐가 문제야. 차별 안 하고 훈련시켜 주겠다는데.”

“…….”

“야, 사탕 껍질. 네가 말해 봐. 너 훈련 싫다고 춘란대 붙잡고 질질 짰어? 아니면 왜 우리가 호의 베풀어 주고 욕을 먹어야 되냐고.”

춘란의 에스퍼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중위가 치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필이면 어제의 근육통이 풀리지 않은 어깨라 조금 아팠다.

“야, 양심이 있으면 네가 말해 보라고.”

계속해서 어깨를 치는 힘이 조금씩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예 등이 의자 등받이에 퍽하고 밀릴 정도로 치니, 치영으로서도 미간을 살짝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비거는 데 특화된 인력들은 그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얘 봐라, 인상 쓰네. 야, 우리가 너한테 뭐 했어? 애새끼가 쪼잔하게 가이드 인권위에 찌르겠다는 건 아니지? 쓸모없는 주제에 쪼잔하기까지—.”

거기까지가 중위의 마지막 대사였다. 허인나가 다 먹은 와인 병의 병목을 잡고 휘둘러 그의 뒤통수를 퍽 하고 가격했기 때문이다.

와인 병이 퍽 하고 깨지며 사방팔방으로 유리 조각이 튀었다. 중위는 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게 무슨—! 야! 허인나! 이게 무슨 짓이야!”

중위의 일행이 허인나를 향해 고함을 쳤다. 그러나 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깨진 병목을 휙 던져 버린 뒤 정권 자세를 취했다.

“니들이 먼저 우리 가이드 폭행한 거다. 이건 정당방위고.”

인나의 그 말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김민우가 스산하게 일어나 물었다.

“뭐? 누가 우리 가이드를 폭행했다고?”

“저 새끼들인가 본데요?”

이인교가 정권 자세를 취하고 있는 허인나를 대신하여 대답한 뒤, 치영을 제 뒤로 보내 작전처 에스퍼들 시야에서 가려 주었다.

치영은 딱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싸운다고?’

저는 점심을 사 준다길래 두 번 반항 안 하고 끌려왔을 뿐이다.

어차피 때울 끼니라면 구내식당이나 누림동 레스토랑이나 그게 그거지만, 춘란대 에스퍼들이랑 먹는다고 생각하니 살짝 신나 따라왔다.

며칠 사이 그들의 팀 회식 분위기가 꽤 좋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혼자 있는 것이 나쁘진 않지만, 저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들과 있는 것 또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따라나섰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괜한 욕을 먹고, 어깨를 가격당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 시비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한두 번 당하는 일도 아니고, 그런 시비들이 가장 심했던 것은 오히려 백한과의 각인 후 버려지다시피 했던 바로 그때였다.

간혹 저런 시비가 걸리기도 했지만, 일일이 반응하기도 귀찮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때문에 치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춘란의 에스퍼들을 말리려 했다.

그다지 기분이 나쁜 편도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어린 새끼가 싸가지 없게!”

짝,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중위의 일행 중 하나가 인교의 뺨을 때린 것이다.

“이 개새끼가—.”

치영은 그대로 눈이 돌아 그 에스퍼의 다리 사이를 정강이로 퍽 까 버렸다.

치료복을 입고 있던 터라 슬리퍼 차림인 것이 아쉬웠다. 군화였다면 더 유의미한 가격을 가할 수 있었을 텐데.

군화 굽으로 차지 못하니 정강이의 날 부분으로 국부를 가격했다. 에스퍼가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으억—!”

강한 에스퍼라고 한들 낭심이 강철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고작 가이드의 킥을 얻어맞고도 주저앉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바라본 치영은 잠시 이성을 되찾았다.

‘…좀 심했나.’

갑작스레 저 집안의 대를 끊어 버렸을 수도 있다. 요새도 3대 독자는 군 면제던가……? 아니 그건 에스퍼 특수군이랑은 상관없는 조항인가?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누구보다 어린 인교를 때리니 갑작스레 열이 받았다. 게다가 인교는 치영에게 항상 다정했었다.

식사 때만 되면 치영의 앞자리에 가장 먼저 수저 세트를 놓아 주기도 했다. 지금은 와인 병의 잔해가 튄 라자냐도 인교가 손수 떠 준 음식이었다.

저는 그냥 그동안의 은혜를 갚는 것뿐이다. 게다가 인교는 치영보다 연하였다. 어린애를 괴롭히는 놈은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인교는 다 컸지만 말이다.

작전처 에스퍼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허리를 숙인 채 다리 사이를 붙잡고 쩔쩔매는 제 동료를 한 번, 치영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곧이어 험악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저 새끼 잡아!”

그렇게, 개싸움이 시작되었다.

* * *

“누림동 레스토랑 기물 파손 15건, 접시 그릇 등 소도구를 제외한 건수.”

“…….”

“상대측 피해 늑골 골절, 쇄골 골절로 인한 상완 신경 손상, 십자인대 파열, 전경 인대 파열, 동측 발목 관절 분쇄골절, 복근 파열, 고막 파열, 네 번째 손가락 염좌, 뇌진탕 소견.”

“…….”

춘란의 에스퍼들과 치영은 1열 횡대로 기립한 상태였다. 열중쉬어 상태로 뒷짐을 지고 윗가슴과 턱을 치켜든 에스퍼들 끝에 치영 역시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싸움 도중 헌병대가 끼어들자 춘란의 에스퍼들은 순순히 물러났다. 상대의 정수리에 그릇을 꽂고 있던 치영 역시 슬쩍 그릇을 내려놓으며 모른 척했지만 때가 조금 늦은 듯했다.

의무 병동으로 바로 후송된 상대편에 비해 춘란대 대원들은 너무도 멀쩡한 상태여서 헌병대로 끌려왔다.

헌병대 대위 하나가 보고서를 들고 횡대로 기립한 춘란의 에스퍼들 앞을 오갔다.

정신 사납게……. 앉아서 말할 것이지…….

치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대위가 등을 돌리자마자 허인나가 혀를 쭉 빼물고 눈알을 위로 돌려 질린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을 때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주 막 나가자는 거지. 춘란 명성도 다 죽었나 봐? 대낮에 누림동에서 패싸움이나 하고.”

“…….”

대위는 아주 날을 잡은 듯 갈궈 대기 시작했다.

센터 내에는 의외로 춘란의 적이 많았다. 낭중지추라 주머니 속 송곳처럼 재능은 숨길 수 없는 법이고, 튀어나왔으니 정을 맞는 것처럼 뭇 평범한 인간들의 열등감을 감내해야만 했다.

헌병대 역시 군사 경찰인 자신들보다 주목을 받는 춘란과 동죽, 추국대 대원들을 시기해 왔으나 건수가 없어 털지 못하고 있다가, 고작 이런 일로 잘 걸렸다는 식으로 갈구기 시작한 것이다.

혈기 왕성한 젊은 에스퍼들이 한 장소에 있으면 싸움쯤이야 빈번하게 난다. 이능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체술로만 상대를 발라 버렸는데 대체 뭐가 문제겠는가.

이 정도는 서로 고소, 고발도 하지 않고 상호 간의 완만한 협의로 넘기는 편이었다.

헌병대가 출동하긴 해도 그쪽에서도 웬만하면 서로 풀고 넘어가라는 식으로 말하지, 아예 이렇게 끌고 오는 일은 드물다.

상대편의 부상이 심각하다고 한들 에스퍼니 회복은 빠를 것이고, 이쪽에는 가이드가 한 명 껴 있었다.

에스퍼와 민간인의 힘의 차이는 6살짜리 어린애와 성인의 차이와 같다. 가이드는 가이딩을 할 수 있을 뿐, 민간인의 체능과 같기 때문이다.

하여 군부에서는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폭력, 강제적 접촉 등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싸움 도중 치영을 향한 구타도 있었다.

다른 에스퍼들은 어디 한 군데 다친 곳 없이 멀쩡한 것에 비해 치영의 관자놀이에는 푸르스름한 멍이 들어 있었다.

명백한 가이드를 향한 폭력 금지 위반이었는데도, 헌병대에 끌려온 것은 가이드 본인인 치영이었다.

그러나 헌병대 대위는 치영을 무시하고 있었다. 기백한의 사탕 껍질이니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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