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마른 편이긴 하지만, 키가 177cm에 지상 훈련과 체력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도 백한이 두 손을 펼치자 치영의 등은 한 줌에 잡혀 버렸다.
상의를 입지 않고 있던 터라 맨살에 와 닿는 따뜻한 손바닥의 감촉이 묘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긴장한 채로 무리한 움직임을 하던 근육들이 백한의 손바닥 아래서 뭉그러지듯 이완되었다.
“아…….”
치영은 볼이 침대 위에 눌리는 것도 모르고 두 눈을 감았다. 아프면서도 시원해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승모근과 광배근을 더듬듯 문지르던 손이 이제 어깨 아래로 내려가 삼각근과 상완근들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이런 기술을……. 치영은 기백한이 마사지까지 잘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멍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두 엄지가 허리를 지그시 누르자 놀라 움찔거렸다.
“아, 거기는…….”
“거기는 뭐. 진도 더 나가고 싶은 거 아니면 입 좀 다물어.”
무슨 진도? 치영의 머리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금세 사라졌다. 허리 부근을 뭉근하게 눌러 주자 기분이 좋았다.
기백한의 목소리가 유달리 낮게 느껴졌다. 왜 저래, 싶기는 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지금 만큼은 원수 같은 저 에스퍼도 달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정도로 훌륭한 안마였다.
손이 엉덩이 부근으로 내려왔을 무렵이었다. 기백한이 몸을 조금 뒤로 물려 이제는 치영의 허벅지에 앉았다. 치영은 불편함을 느끼며 허리를 조금 뒤챘다.
“엉덩이에, 뭐가 닿습니다.”
뭉툭한 무언가가 볼기를 지그시 찌르는 기분이었다. 밀대 같은 것으로 꾹꾹 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기백한은 대꾸하지 않고 치영의 엉덩이와 둔근을 손바닥의 넓은 면으로 눌러 살살 풀어 주기만 했다.
…그래, 뭐로 찌르든 말든 시원하면 되지.
치영은 더 지적하지 않고 몸을 이완시켰다. 이대로 잠이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가물가물한 정신에 앞서 숨소리가 낮아졌다.
“얘 좀 보게. 뭘 믿고 자냐.”
기백한이 저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것이 느껴졌다.
몰라. 내버려 둬. 잘 거야.
치영은 대꾸하고 싶었으나 나오는 대답은 으응, 하고 앓는 소리뿐이었다.
기가 막힌 듯, 백한이 코웃음을 쳤다. 손이 허벅지와 엉덩이 경계로 내려와 지그시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 기분 좋다……. 치영은 제가 누구에게 안마를 받고 있는지도 잊은 채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중간에 누군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손해라느니, 어이가 없다느니 하며 툴툴거리는 소리였다.
제가 먼저 안마를 해 주겠다고 해 놓고 치사하기는.
치영은 잠결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 * *
치영이 피습당한 사건에 대해 작전처의 대처는 미미하기만 했다.
치영은 거기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럴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 돌아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손 처장을 붙잡고 따져 봐야, 하극상이라고 헌병대에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더 따져 봤자 유감이라는 말만 들었겠지.
분개한 것은 오히려 춘란의 대원들이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가이드 혼자 훈련 보낸 것도 어이가 없는데, 뭐? 저희도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가리를 깨 줍시다.”
“옳소.”
오늘 치영은 가이딩실로 출근했다. 그 탓에 퇴근까지 그들을 만날 만한 일이 없었다.
대원들이 직접 가이딩실로 찾아와 점심을 먹으러 나오던 치영을 납치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치영은 그들이 분노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엔젤 헤어 파스타를 뒤적거렸다.
원래대로라면 가이딩실 식구들과 함께 구내식당에 갈 예정이었다. 누림동에 있는 구내식당은 너무 멀고, 의무 병동인 도담동에 있는 구내식당은 환자식과 함께 조리되는 터라 맛은 그냥 그렇지만, 거리가 가까운 장점이 있는 식사 장소였다.
맛있는 거 나왔으면 좋겠다고 찡찡거리는 지혁에게 “그러게.” 하고 고개를 끄덕여주던 때였다.
“안치영 소위! 우리랑 어디 좀 갑시다!”
“갑시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김민우와 허인나가 어깨를 감싸 안더니 그대로 앞으로 척척 걸어 나갔다.
이인교가 그들의 뒤편에서 치프와 가이딩실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팀 회의가 있어서요. 저희가 소위님 좀 빌려 가겠습니다. 점심시간 끝나고 바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네, 멀쩡히 돌려주세요.”
치프는 핸드폰으로 주식 창을 바라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치영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춘란대에 경계심을 푼 것처럼 보였다.
치영은 치프를 부르려다가 말고 김민우의 험비에 태워져 그대로 누림동으로 향해야 했다.
그렇게 끌려온 곳이 퓨전식 레스토랑이었는데, 깻잎을 넣은 엔젤 헤어 파스타가 맛있다며 허인나가 추천하길래 그냥 그걸 골랐다.
운전을 해야 하는 김민우를 제외하고 허인나와 이인교는 이미 화이트 와인 한 병을 까고 있었다.
…근무 시간 아닌가? 의아했지만 치영은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그 새끼들이 우리를 물로 본 게 틀림없습니다. 감히 소위님 빼돌려서 야산에 처박아 두고 뺑이를 치게 만들다니!”
이인교가 분노에 찬 채로 라자냐를 잘랐다. 라구 소스가 올려진 가지 라자냐에서는 옅은 셀러리 향과 녹은 치즈의 풍미 가득한 냄새가 났다.
이인교는 제일 먼저 치영에게 라자냐를 덜어 주고 그다음은 허인나, 김민우, 그리고 제 접시 순으로 음식을 옮겼다.
치영은 인교의 접시 위에도 음식이 올라가자 라자냐를 조금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소고기를 갈아 넣어 만든 라구 소스가 훌륭했다.
깻잎과 참기름, 들깨 가루에 뒤덮인 엔젤 헤어면을 알 수 없는 매콤한 양념과 버무려 먹었을 때도 맛있었는데.
전반적으로 요리들이 훌륭했다.
치영이 제 앞에 놓인 음식들을 두 입 정도 떠먹고 있는 동안, 허인나는 와인 반병을 비웠다.
“작전처 새끼들 싹 다 조인트를 까야 해요. 애꿎은 안 소위님한테 지랄이야, 지랄이.”
“그래. 우리가 춘란의 YB들로서 이번 사건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되지.”
“누가 YB예요. 김 중위님은 OB지.”
“뭐? 내가 왜 OB야.”
YB? 영보이를 말하는 건가? OB면 올드보이겠네. 치영은 무청으로 만든 피클을 오물오물 씹으며 언성을 높이는 에스퍼들을 구경했다.
“양심 있나? 기 중령님, 박 대위님이랑 김 중위님까지가 OB고, 나랑 안 소위님이랑 인교가 YB지. 끼긴 왜 껴요. 주책이야, 할아버지.”
“이게 누구더러 할아버지래!”
김민우가 그 테이블에 앉은 네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와인을 마시지 않는 치영을 위해 인나가 시켜 준 진저 소다를 빨아 먹으며 치영은 그들을 계속 구경했다.
이인교가 또 시작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중위님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한 건 작전처 놈들이 안 소위님을 아주 물로 봤다는 거라니까요.”
“아 맞아, 지금 그거 회의하러 온 건데. 아 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이상한 말을 해요, 정신 사납게.”
허인나의 말에 김민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어쩌지 너를? 어? 걍 진짜 확 한 대 팰까?”
“패든지, 패든지!”
이번에는 허인나가 김민우의 가슴팍에 정수리를 툭툭 들이밀었다.
이인교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감쌌다. 치영은 인교의 워터 고블릿에 물을 채워 주었다.
레스토랑은 야외 테이블이 많았다. 며칠 내내 푹푹 찌더니 오늘따라 바람도 많이 불고, 날은 선선한데 햇빛이 강한 터라 차양이 쳐진 테이블 아래 앉으니 분위기도 좋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누림동에 이런 곳이 있는지 처음 안 치영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음식이 식습니다. 얼른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에스퍼들이 일제히 치영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치영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곧이어 김민우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사람이 너무 착한 거지.”
허인나가 배턴을 이어받았다.
“착해도 너무 착한 거지.”
이인교가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니까 그 개자식들이 우리 소위님한테 그따위 짓거리를…….”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뒤편에서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트러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음이 요란했다.
치영은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보았다. 험악한 얼굴의 에스퍼들 몇 명이 이쪽을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왜 저래? 치영은 의아하게 보다가 그들이 곧 작전처 소속의 에스퍼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작전처 욕만 냅다 했던 것이 거슬리는 듯했다.
치영은 의아했다. 저야 일반인과 감각이 똑같은 가이드니 몰랐다고 쳐도, 전투에 특화된 춘란의 에스퍼들이 바로 뒤 테이블에 작전처 사람들이 앉았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동죽, 추국대도 그러하지만 춘란대는 특히 A급 없이 모두 S급 이상의 에스퍼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감각이 뛰어나고 늘 주위를 살피는 훈련을 받아온 그들이 뒷자리에 작전처 사람들이 앉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치영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에스퍼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사람들 다 알고 욕한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