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보는 눈 없는 김민우는 가이드란 자고로 보호 본능을 일으키고, 온 힘을 다하여 지켜주고 싶은 기분이 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안 소위는 그런 타입은 아니죠. 물론 사람이 선하고 대대장님 같은 개자식, 아니 양아치… 아니 망나니… 음, 포장을 못 하겠네? 아무튼 대대장님한테는 아까울 만큼 성실하고 선량한 편이지만 뭐라고 해야 하지? 너무 군인 같지 않습니까. 경직되어 있고, 표정도 딱딱하고.”
김민우는 더 지껄이다가 님이 뭔데 안치영을 평가하냐고 허인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기백한도 김민우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백한은 보조석으로 다가가 치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센터의 가로등 등불에 의해 백한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치영의 얼굴 위로도 말이다. 조금 어두운 그곳에서도 안치영의 생김은 뚜렷했다.
“뒈지게 예쁜데.”
예뻐서 버리지 못하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 아니겠는가. 기백한은 잠시 제 사람 됨됨이를 칭찬했다.
결함이 있는 쓰레기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도 폐기 처분 하지 않고 몇 년을 봐주지 않았나. 제 긍휼함에 전율이 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일단 밥은 먹여야 한다.
“자기야, 계속 처자면 여기서 박 타자는 걸로 알게.”
백한이 치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치영은 무언가 굉장히 불쾌한 꿈을 꾼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백한은 보조석 문을 닫아 주고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운전석 문을 닫으며 바라보자, 예민한 편인지 어느새 깬 안치영이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표정은 멍하고, 시선은 앞을 향한 상태에서 잠긴 목소리로 치영이 백한에게 물었다.
“…얘기 끝나셨습니까?”
“응, 밥 먹으러 가자.”
“뭐랍니까?”
치영은 팔짱도 풀지 않고, 그렇다고 다리도 내리지 않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동을 건 기백한이 그대로 기어를 변속하여 후진했다.
“뭘 뭐래. 오리발 내밀지.”
“…그 씹새끼.”
아이고, 욕도 잘하네. 치영의 반응에 백한이 피식 웃었다.
“밥 안 먹습니다. 그냥 잘 겁니다.”
“응, 부대찌개 먹자.”
치영은 깨어나자마자 제 말은 잘근잘근 씹어 잡수시는 하마 새끼에게 짜증이 났다.
“이 밤에 무슨 밥입니까. 전 여기서 내려 주십시오. 혼자 숙소 가겠습니다.”
“우리 자기 양심이 뒈지셨는지 이 밤에 구해 주러 간 왕자님이랑 밥 한 끼 같이 안 먹어 주고, 내가 덕분에 삶의 보람이 없네요.”
왕자님? 웩. 치영의 토할 것 같은 표정을 바라본 기백한이 낄낄 웃었다.
재수 없어.
그러나 기백한의 말은 타당했다. 백연에게 보고를 한 것만으로 정말 구하러 올 줄은 몰랐는데.
백한이 아니었으면 그럴듯한 자살에 성공했겠지만, 어쨌든 살았으니 밥 한 끼 정도는 같이 먹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빨리 처드십쇼. 피곤하니까.”
“네, 상감마마.”
백한이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카 오디오에서는 10년 전 유행한 아이돌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가사가 오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이었는데 기백한은 그것을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치영은 두 눈을 감고 양 검지로 귀를 틀어막았다.
기백한은 음치였다.
* * *
“이리 와 봐.”
“…….”
치영은 짜증이 났다. 왜 또 기백한이 제 방에 와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밥 먹자고 사람을 귀찮게 하길래 순이네에서 부대찌개를 먹고 숙소로 복귀한 길이었다.
하루가 너무 길었던 치영은 다른 에스퍼들이 잠들어 어둑한 거실을 조용히 걸어 제 방으로 들어와 씻고 나왔다.
쉴 생각으로 잘 때 입는 반바지 하나만 입고 나왔는데, 제 침대에 누운 기백한이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오늘 오후, 기백한은 말도 없이 치영의 방에 에어컨을 달았다고 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못 보던 에어컨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치영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저게 뭡니까?”
“고마워? 뽀뽀해 봐.”
“안 고마운데요.”
감사 인사는 뽀뽀로만 받겠다는 기백한의 턱을 쭈욱 밀어 버렸다.
다음 주부터 중앙 장치로 에어컨을 가동해 준다고 했다. 경기 북부에 위치한 서울‧경기 센터는 밤사이에 창문을 열어 두고 자면 선선해 잠을 자기 편했다.
근처에 낮은 크기에 산들이 여럿이고 숲도 있어 나무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기온이 서늘한 편이었다.
게다가 치영은 더위를 잘 타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밤에 잘 때 덥다고 느꼈던 것은 순전히 저 미친 하마 놈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체온이 높은 기백한이 저를 끌어안고 자니 안 더울 리가 있나. ‘암세포도 자가 치유할 새끼, 왜 이렇게 체온이 높은 거야.’ 하고 짜증을 내며 새벽에 깨는 일이 잦았다.
“그냥 중령님이 니 방 가서 자면 해결될 상황이었습니다. 왜 남의 방에 함부로 에어컨을 답니까?”
“자기야, 우리가 어떻게 각방을 써.”
치영은 황당함에 말을 잊었다. 그 이후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하마와 인간은 말이 통하는 종이 아니다.
물론 기백한은 하마가 아니지만, 치영은 그가 가끔 그대로 덩치가 좀만 더 불어나 사바나의 초원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었다.
저것이 짐승이 아니라면 인두겁을 쓰고 저렇게 뻔뻔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침대 위에 짐승 한 마리가 고개를 모로 젖힌 채 치영을 향해 씩 웃고 있었다.
“이리 와 보래도.”
“또 뭡니까.”
“너 마사지 하고 자야 내일 눈이라도 뜬다.”
기백한이 웬일로 농담기 없이 말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뻐근하지 않은 곳이 없어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나온 참이었다.
아직은 젖산이 쌓일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자고 일어난 뒤부터는 근육통이 무척이나 심해질 것이다. 지금도 무릎을 굽힐 때마다 다리가 저절로 덜덜 떨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대체 기백한과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치영은 미간을 조용히 구기며 대꾸했다.
“알아서 할 테니까 가세요.”
“어허, 쓰읍. 앉아 보라니까.”
기백한은 기어코 치영의 손목을 침대 위로 끌고 갔다. 반동에 의해 반쯤 누워 버린 치영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대로 치영을 어린애 뒤집듯이 손쉽게 뒤집더니 엉덩이 위로 올라타기까지 했다.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등을 내준 치영이 민망하고 짜증스러워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애들 깬다. 사이 좋아 보이는 건 좋은데 어른들 자세한 사정은 애들 정서 교육에 안 좋아요.”
뭐라는 거야, 미친 하마 새끼가.
치영은 몸을 일으키려 해 봤지만, 그저 제 위에 기백한이 앉은 것만으로도 꼼짝 못 하고 힘이 빠져 버렸다.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근육이 평소 저장해 둔 에너지를 산을 오르고 뛰어 내려가고 난리를 치는 동안 다 써 버린 것이 틀림없다.
그사이 치영의 위에 올라탄 기백한은 제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쭉 밀어 두둑 꺾더니 치영의 어깨 위로 올렸다.
“윽……!”
이번에는 싫어서 나온 신음이 아니었다.
싫다기보다는 너무 아팠다. 근막과 근육이 딱 달라붙어 있는지 꼬집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 아파…….”
안치영은 통증에는 무디면서도 감각은 예민했다. 그러니까 느끼는 감각은 예민하고 통각도 큰 반면, 그것을 티 내지 않는 역치가 높았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남들도 다 그만큼은 참고 사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살이 심한 사람의 극단에 서 있는 경우였다. 안치영이 겪는 통각의 수치가 100이고, 다른 사람들이 통각에 아프다고 구르는 수치가 80이라면, 치영은 그 수치값이 120 정도는 되어야 미세하게 미간이나 찌푸리는 정도였다.
아이가 아픔을 호소하기 위해 울음을 터트릴 때, 주위의 누군가 돌봐주지 않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 아이는 호소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안치영의 경우가 이와 같았다. 예민한 감각에 의해 통증을 쉽게 느껴도 단 한 번도 타인 앞에서 티를 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아파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마를 침대 시트에 문지르며 상체를 푹 꺼트리고 윽, 하는 소리를 참았다.
“오늘 안 풀어 주면 내일 우리 자기 초상나는 거예요.”
기백한이 아이를 어르듯 말하며 등을 문질렀다. 광배근에 와 닿는 커다란 엄지가 둥글게 문질러질 때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흐…….”
“어허, 앓는 소리 내지 마라. 지금 분위기 되게 애매하거든?”
분위기고 나발이고 치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넓은 손바닥이 등 전체를 문지르며 통증 유발 지점을 꾹꾹 누를 때마다 시원하면서도, 동시에 그만 괴롭히라고 기백한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박아 넣고 싶었다.
시원하면서도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그만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을 벌릴 때마다 앓는 소리가 계속 나왔다.
“흐, 아흐…….”
“…얘 봐라. 야, 소리 그렇게 내지 말라니까.”
뭘 어쨌다고 이제는 앓는 소리까지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 치영은 그럼 너부터 내 위에서 내려오라며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끙끙거리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