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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52화 (52/114)

52화

기백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물점이 접히는 사근사근한 눈웃음이었다.

“안치영, 기백연네 소속인데 왜 빼다가 훈련 돌렸어요?”

“…저급 가이드들 훈련 프로토콜 새로 시작한 것뿐이야. 그 외는 기밀이고. 내가 이걸 기 중령한테 꼭 설명해야 하나?”

손진화는 신중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백한은 담배의 뒤꽁무니를 빨아 댈 뿐 대답이 없었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는 바람에 드러난 아래턱과 목젖, 목덜미 등은 생명체가 갖고 있는 약점 중 가장 치명적인 부위인데도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손진화가 지금 당장 이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날카로운 나이프로 저 목덜미에 검날을 박아 넣는다고 한들, ‘아프잖아.’ 하며 목을 두둑 꺾고는 그대로 반격이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이 에스퍼의 등급 차이에서 오는 기(氣)라는 것을 깨달은 손진화는 열등감이 부여한 모욕에 주먹 쥔 손을 떨었다.

사자가 개미의 사정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기백한은 손진화의 모욕감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는 양 입을 열었다.

“음, 근데 나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네.”

으윽, 하고 기백한에게 목이 밟힌 남자가 다시 신음을 흘렸다.

손진화는 그 남자가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기를 바랐다. 그대로 죽는 것이 확실히 더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손진화가 목이 밟힌 남자를 흘끗거리는 동안, 백한이 젖혔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정말로 뭔가 궁금한 것이 있다는 듯이 눈을 살짝 치켜뜬 채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물고 볼우물이 팰 정도로 꽁지를 빨아들였다.

기백한의 소름 끼치는 점은 표정이 너무 풍부하다는 것에 있다. 뭇 인간들이 상상하는 초월적인 존재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들의 감정이 다양하다면 인간을 학살하는 것을 망설일 것이라는 관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백한은 달랐다. 모든 타인을 한꺼번에 휩쓸어 눌러 죽일 수 있는 힘을 갖고도 다양한 감정을 얼굴에 나타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욱 그를 소름 끼치게 만드는 요소였다.

타인과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손 아래 자비가 없는 괴물이라니. 손진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백한은 폐를 돌고 나와 투명하게 변한 연기를 내뱉었다. 중지와 검지 사이에는 담배를 끼운 채, 엄지로는 눈썹의 끄트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손 처장님네 애들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얘들은 어디서 왔을까?”

손진화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여기서 빌미를 제공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는 벌떡 일어나 그의 책상 앞으로 갔다. 이번에는 기백한의 이능에 농락당하지 않기 위해 수화기를 꽉 잡아 쥐었다.

신호음이 채 두 번 울리기 전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손진화는 느슨히 앉아 담배 연기를 뱉고 있는 기백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헌병대 들어오라고 해.”

기백한이 낄낄 웃으며 손 처장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 수밖에 없었냐는 듯 비웃는 것 같았다.

고개를 모로 젖힌 채 담배 필터를 빨며 저를 바라보는 기백한의 시선을 무시하며, 손진화는 짐짓 화가 난 사람처럼 전화 상대를 향해 어서 헌병대를 불러오라고 소리쳤다.

남자는 헌병대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일단은 가둬 놓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곧이어 헌병대원들이 들어왔고, 그들은 손진화의 지시에 따라 기백한의 발 아래서 남자를 빼내어 일으킨 다음 끌고 나갔다.

그 꼴을 바라보고 있던 백한이 동네 백수건달처럼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에이, 재미도 없고. 난 이만 가야겠다.”

“저놈이 뭘 어떻게 했는지, 어디서 봤고, 어떻게 잡았는지 보고서 올려. 기 중령.”

옷을 툭툭 터는 기백한을 향해 손진화가 짓씹듯 말했다.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다른 손으로는 소파 등받이에 담배를 지져 끄며, 기백한이 피식 웃었다.

“보고서?”

“…….”

“손 처장님, 나를 좀 아기자기하게 보나 봐요?”

구겨진 담배꽁초를 중지로 튕겨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린 기백한이 나머지 한 손마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삐딱하게 섰다.

“내가 뭘 보고할 줄 알고 보고서를 올리래.”

“…….”

“손진화 씨, 내가 모른 척해 준다잖아. 저 새끼 끌고 처장실 온 거 보면 모르겠어?”

“그게 무슨 소리—.”

“상황 파악 잘합시다. 넘어가 준다고 할 때 그냥 넘겨.”

손진화는 숨을 삼켰다.

넘어가 준다고? 안치영을 노린 걸 알고 경고하려고 제게 찾아왔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뭘 알고 있길래 넘어가 준다는 말을 하는 것인가.

게다가 그냥 넘기겠다니. 오늘 안치영이 끌려 나간 에스퍼 손에 어떻게 되었을 줄 알고. 그러나 손진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백한이 삽시에 에스퍼 파장을 풀었기 때문이다. 7평 남짓한 처장실을 꽉 채운 고등급 에스퍼 파장이 손진화를 내리누르듯 압박하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만 기압이 올라간 느낌이었다. 폐가 찌그러들고 흉곽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기백한이 그대로 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데도 아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목덜미를 드러낸 기백한보다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이 훨씬 더 무방비한 상태였다.

백한은 그런 손진화의 정수리 위에 커다란 손바닥을 터억 올려 두었다. 마치 큰 어른이 소년을 상대하듯 말이다.

“말 잘 듣고 계셔. 수틀리면 모가지 뽑으러 온다.”

그게 진심이라는 것이 닿아 있는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기백한의 에스퍼 파장은 그 주인처럼 손진화를 조롱하며 압박해 왔다.

등골이 오싹했다. 뭐라 반박이라도 하면 공을 돌리듯 머리 위의 손을 돌려 그대로 목을 꺾어 버릴 것 같았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른 뒤, 등 뒤에서 타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손진화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짚은 채로 헉헉거렸다. 압박되었던 심폐가 이제야 제 기능을 찾기 시작했다.

“크, 흐윽—.”

헛구역질을 참으며 손진화는 침을 질질 흘렸다. 뒤늦은 모멸감에 온몸이 전율했다.

“저, 개새, 끼가……. 우욱!”

구역질을 참느라 두 눈이 까뒤집히려는 것을 참아 냈다. 개새끼, 위아래도 구분 못 하고 멋대로 굴겠다 이거지.

“…군견이 말을 안 들으면 삶아 죽여야지.”

손진화는 이를 아득 갈았다.

물론 그런 말들이 문을 닫고 나가 복도를 걷고 있던 기백한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 처장님 센 척 좀 하는데.”

기백한은 피식 웃으며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지나가던 작전처 소위 하나가 놀라 백한을 바라보았다.

실내 금연법이 실행된 지가 언제인데 복도 한가운데서 담배를 꺼내다니.

그 눈빛을 흘끗 본 기백한이 물고 있던 담배 개비를 뱉어 귀 옆에 가지런히 꽂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귀 뒤로 얌전히 넘기며 말했다.

“여기 꽂으려고 꺼낸 거예요. 안 피운다니까?”

복도 천장에 정수리가 닿을 듯 덩치가 큰 기백한이 불쑥 다가와 제 결백을 주장하자, 깜짝 놀란 중위가 “아, 네. 알겠지 말입니다.” 하고는 몸을 틀어 후다닥 빠져나가 버렸다.

기백한은 그 뒷모습을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다가 후두부에 깍지 낀 두 손을 받친 채 걸었다.

한 명은 들고 오다 죽어 버렸다. 목뼈를 분질러 놓은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시체를 수색해 보니 군번줄을 비롯하여 신원을 특정할 만한 물건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작정하고 안치영을 어떻게 해 보려고 한 것 같은데, 안치영 자체가 목적인지 제가 목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한은 몇 가지 가정들을 소거하며 복도를 걸었다. 건물을 나서자마자 있는 옥외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주차되어있는 기백한의 지프가 보였다.

군용 지프의 보조석 문은 열려 있는 채였다. 치영이 의자를 한껏 젖힌 채 두 발을 대시보드 위에 올려 두고 잠을 자고 있었다.

워커에 산에서 묻혀 온 부엽토와 진흙, 썩은 나뭇잎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는데도 그대로 발을 올리고 팔짱을 낀 채.

손진화의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워커를 퍽 올려 두던 기백한처럼 말이다.

“…깜찍한 짓만 한다니까.”

기백한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깨워서 뭐라도 좀 먹여야 할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뺨이나 이마에 빨간 실금들이 잔뜩 그어져 있었다. 도망치다가 얻은 상처들로 보였다.

“하여간에 존나게 약하지.”

꼭 설탕 과자 같았다. 조금만 부딪혀도 설탕 부스러기를 우르르 떨구며 금이 가 버리는 그런 약한 것들.

꽃잎, 사탕, 케이크, 잘 세공된 유리병에 담긴 향수들. 기백한이 보기에 안치영은 그런 것들과 닮아 있었다.

“아니, 진심이십니까? 안 소위가 가이드이긴 하지만 그렇게 여리여리한 타입은 아닐 텐데요……?”

그 말을 듣고 있던 김민우가 질린 듯 말했었다.

“얼굴이 단정하게 생긴 편이잖아요. 뭐라고 해야 하지? 진중하고 신뢰 가게 생긴 얼굴? 그래서 여자 가이드들 사이에서는 인기 많대요. 본인이 워낙 죽을상을 하고 다니니까 말을 못 붙이는 모양이던데.”

…예쁜 건 알아 가지고.

본래 여자들이란 남자 새끼들보다 안목이 높아 예쁜 걸 잘 알아본다.

그러니 온몸으로 우울한 기운을 뿜어내는 안치영을 보고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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