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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51화 (51/114)

51화

치영은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공중에 떠다녀야 했다.

그렇게 둥둥 떠다니다가, 나무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손으로 기둥을 잡고 쭉 밀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떠다니는 게 짜증 날 무렵에는 아예 기둥 하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산은 고요했다. 전투 중이라면 이런저런 소리가 날 법도 한데 조용하기만 했다.

S++급인 기백한을 걱정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지만, 치영은 이런 상황 자체가 처음이기 때문에 백한이 얼마나 강한지 실감할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승전하고 매번 이기고 돌아왔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그가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거기서 뭐 하니. 하여간 철이 덜 들었어요. 둥둥 떠다니니까 재미있어 죽겠나 보지?”

기백한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사람 하나가 축 늘어져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에도 간단한 짐을 들듯이 들어 올려진 사람이 있었다.

두 명의 에스퍼를 어깨에 이고 진 채로도 기백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다가왔다.

“…재미없습니다.”

치영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치영을 공중에 떠오르게끔 만든 뒤 내려 주지도 않고 뛰쳐 가 놓고 돌아와 철없는 취급을 하다니.

억울했지만, 급격히 피곤해져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백한이 검지를 까닥이자, 치영은 갑작스레 부가되는 중력에 놀라 떨어지며 윽, 소리를 냈다.

준비 운동도 하지 않은 채 산을 오르내리고, 절벽을 기어 내려갔다가 굴러떨어지기까지 한 덕분에 비명을 지르고 있던 근육들이 한 번 더 몸살을 앓았다.

땅에 처박힌 채로 고개 하나 들 힘조차 나지 않았다. 기백한은 여전히 남자 둘을 이고 진 채로 쭈그려 앉아 뻗어 있는 치영을 보며 낄낄거렸다.

“좀만 더 있다가 올 걸 그랬나? 이것도 나름 훈련이 됐을 텐데 말이야.”

네가 좀만 더 있다 왔다면 나는 그냥 나무나 바위에 머리를 처박고 자살할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치영은 아무런 대답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스터가 가 보라고 난리를 피우길래 뭔 일 났나 했는데 생각보다 멀쩡하단 말이지.”

치영을 따라 일어난 백한이 씩 웃었다. 치영은 그 시선을 피하며 제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어째 백한의 목소리가 수상했다. 치영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은 어투였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치영은 백한 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러게 왜 형 빼놓고 훈련을 가셔요. 다음엔 꼭 나 들고 가.”

이제는 제법 다정하게 들리기도 했다. 치영은 저 인간이 왜 저러나 싶어 대꾸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었다.

백한이 치영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너 여기 보낸 거 손진화지.”

“…….”

“형이 한 대 패 줄게. 걱정 말고 있어.”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진화의 생각이 궁금하기는 했다. 이렇게 쉽게 저를 죽일 생각이면서 왜 전역을 미끼로 임무까지 제안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내려다보니 피가 엉겨 붙은 위로 흙먼지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자잘한 나무껍질 같은 것들이 붙어 손을 쥘 때마다 상처를 파고들었다.

치영은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백한에게 물었다.

“차는 가져오셨습니까?”

“어. 일단 이 새끼들은 트렁크에 싣자.”

“…죽은 겁니까?”

“음? 모르겠는데?”

정말 모르겠다는 투라서 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백을 받아내야 하니 죽이지 말지 그랬냐고 한소리 하려다가 참았다.

어디 저 물건이 남의 말을 듣는 놈이어야 말이지. 치영은 남자 둘을 아무렇지도 않게 안정적으로 들고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는 기백한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소쩍—.

이제 막 어둠이 내리고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이르게 잠에서 깬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

산비둘기는 자러 들어갔는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치영은 고개를 돌리고 백한을 따라 걸었다.

…그냥 잡힐 걸 그랬나. 총이 아닌 나이프를 먼저 썼던 것을 보면 곱게 죽일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쉬운 죽음이 좋다. 너무 어렵게 살았으니 말이다. 치영은 고개를 가로젓고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산에는 이제 막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 * *

“이게 무슨 짓이야!”

손 처장의 날카로운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백한은 그의 집무실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왔어요? 앉지 뭘 서 있어.”

주객이 전도된 인사가 손진화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기백한은 곱상한 얼굴로도 양아치같이 낄낄 웃어 대고 있었다.

자세 또한 품위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야산을 구르다 와서 흙먼지가 가득한 워커를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올려 두더니 발목을 까딱거리는 모양새가 심히 불량했다.

죽은 벌레의 시체와 썩은 부엽토 따위가 그의 워커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려 테이블 위를 더럽혔다.

결벽증이 있는 손진화가 그 꼴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기 중령!”

기백한이 그제야 소지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누가 나 귀먹었대? 소리는 지르고 지랄.”

“반말까지 해? 기 중령, 지금 하극상 한번 해 보자 이거야?!”

“—입니까.”

심드렁하게 덧붙인 존댓말에 손 처장의 얼굴이 더욱더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상관을 향한 존경이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에 손 처장은 이를 아득 갈았다.

‘저 건방진 새끼…….’

당장이라도 면전에 욕을 내뱉으며 따귀를 갈기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분노를 참는 손진화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백한은 손진화의 인내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양 소파에 늘어지게 누운 채로 가지런한 제 손톱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 밑에 후, 바람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이 에스퍼 새끼, 처장님이랑 아는 사이야? 친해 보여서 데려왔는데.”

“뭐?”

“—요.”

이번에도 뒤늦은 존대였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저를 열 받게 하려고. 그 때문에 그의 말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열불이 치밀었다.

손진화의 계급은 대령, 기백한은 중령이지만 사관학교 기수는 차이가 꽤 났다. 나이도 손진화가 다섯 살 정도 위였다.

어린놈이 이능 등급만 믿고 까불다니……. 손진화는 늘 기백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앙부에 있는 선배 한 명과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퇴근할 시간이지만 처장실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 걸음을 돌렸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처장실의 문을 열자, 기백한이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린 채 소파에 앉아 양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백화점 주차장의 안내 요원들이나 할 법한 발랄한 손 인사를 하는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얹힌 듯 화부터 났다.

놀란 손진화는 이게 무슨 짓이냐 쏘아붙였지만, 기백한은 히죽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손진화가 내선 전화기를 들어 헌병대에게 연락하려던 차였다. 그의 손에서 전화기가 두둥실 떠올랐다.

손진화는 화를 냈다. 하극상이라고 소리쳤지만, 기백한은 간지럽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제 손톱 밑만 바라보더니 이내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그러더니 제 발밑에 있는 무언가를 퍽 찼다. 둔중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끄응, 하고 막힌 신음을 냈다.

손진화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사람 하나가 테이블 밑에 웅크린 채 엎드려 있는 듯했다.

그는 기백한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에 손진화에게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등골이 쭈뼛 섰다. 기백한이 테이블 위에 얹어져 있던 발을 내려 테이블 밑에 있던 이의 목에 워커 발을 올렸기 때문이다.

당황에 물든 손진화가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묻기도 전이었다.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문 기백한이 불을 붙이며 말했다.

“나 말 잘 듣죠. 발 내리라길래 내린 거잖아.”

낄낄거리며 말하는 어투가 건들거렸다.

“저 사람은 누구길래—.”

손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읏차, 하고 소리를 낸 기백한이 테이블 밑에 있던 가방이라도 끌어 올리듯이 손쉽게 웅크리고 있던 이를 끌어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몸이 테이블 위로 떨어지며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입에 검은색 천을 물고 양손이 뒤로 묶인 남자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으윽, 하고 앓았다.

“우리 안치영이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오밤중에 야산에서 좆뺑이를 치고 있더라고.”

“우윽!”

백한이 남자를 누르고 있는 다리에 힘을 지그시 주자, 워커 발에 목을 내준 남자가 몸을 꿈틀하며 괴로워했다.

손진화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안치영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처장실까지 찾아와 저를 협박하는 꼴을 보니 그도 아닌 것 같았다.

안치영이 잘못되어도,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낭패였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손진화는 짧게 호흡을 내뱉고는 백한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표정을 관리하려 애를 쓰며 일부러 진중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그거랑 이 남자랑 무슨 상관인데. 이 남자가 누구냐고.”

기백한이 제 손톱을 쳐다보다가 그 밑에 바람을 훅 불어넣으며 말했다.

“아, 몰라요? 손 처장님 워낙 아는 거 많으셔서 이 새끼도 알지 않을까 하고 데려온 거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음, 모르는구나, 우리 손 처장님…….”

그는 씩 웃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더니 고개까지 뒤로 젖힌 채로 담배를 뻑뻑 빨아 댔다.

기다랗고 우람한 팔을 소파의 등받이 윗부분에 걸쳐 놓고는, 젖힌 고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남자다운 목에 드러난 목젖 따위를 바라보며 손진화는 손바닥의 식은땀을 훔쳤다.

기백한에게서 나오는 에스퍼 파장 따위는 없었지만, 꼭 첨예하게 벼려져 자신 주위에 빼곡히 늘어놓은 바늘 같은 파장에 뒤덮인 것처럼, 손진화는 계속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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