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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50화 (50/114)
  • 50화

    헉, 허억…….

    귓가에 자신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숨이 가빴다. 짧게 자른 머리는 이미 땀에 푹 젖은 상태였다.

    치영은 이러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달렸다.

    뺨 여기저기에 나뭇가지가 스치며 상처를 만들어 냈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뒤쫓아오는 에스퍼들의 소리가 지척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 그냥 잡히자?! 언제까지 도망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스퍼들은 약이 바짝 올라 소리쳤다. 치영은 뒤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리며 구르듯 산을 뛰어 내려갔다.

    군화에 와 닿는 나뭇잎들이 하나같이 축축했다. 나무가 만들어 낸 응달 때문에 이슬에 젖은 나뭇잎들이 마르지 않은 듯했다.

    미끄러워 잘 뛰어 내려갈 수가 없었지만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치영은 이를 악문 채로 발을 내디뎠다.

    그때, 멀리 나뭇가지와 수풀 사이로 민가의 주황색 슬래브 지붕이 보였다.

    어쩌면 그걸 보고 살짝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말고 달렸어야 했는데. 단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던 제 인생을 경계하는 그 마음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윽, 으아—!”

    치영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앞으로 굴러 버렸다. 군화 끈이 풀렸던 걸까? 너무 빨리 달리느라 왼발 끝이 오른 다리의 바짓자락에 걸린 것 같기도 했다.

    구르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공포심에 휩싸였다. 튀어나온 돌에 찍힌 등이 너무 아팠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척추나 머리 등을 나무에 부딪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니다. 그냥 이대로 콱 죽어 버릴까? 비참하게 죽을 필요는 없지만, 아등바등 살 이유도 없었다.

    굴러떨어지는 중에 튀어나온 바위에 머리라도 박으면 그대로 골로 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나 아주 운이 나쁘면 그러고도 살아남아 어디 한 군데 기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치영은 늘 운이 나빴기 때문에 죽으려고 자진해도 어정쩡하게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그건 싫었다.

    그러니까 치영에게는 딱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잡혀서 저들 손에 죽거나, 나무나 바위에 머리를 박고 자진하는 것.

    전자는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고, 후자는 애매하게 살아남을 시 얻게 될 후유증이 두려웠다.

    하지만 운명은 그게 언제고 치영이 결단할 시간을 넉넉히 주지 않았다. 치영은 조금 포기한 상태로 몸을 틀어 비탈길에 휘어져 자라 있는 거대한 나무 쪽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머리를 박는 것이 한 번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싶었다. 치영이 아찔해지는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넌 진짜 형 없으면 어떻게 살래.”

    치영의 몸이 공중으로 둥실 들렸다.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것처럼.

    물리값을 갖고 가속되어 굴러떨어지던 치영의 위를 짓누르던 모든 운동에너지가 소멸된 것같이 떠오른 몸에 치영은 저도 모르게 허우적거렸다.

    치영은 공중에 떠오른 채로 저를 보며 웃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기백한이었다.

    “헉—!”

    치영이 숨을 집어삼켰다. 그대로 몸이 떠오른 채로 백한의 뒤편으로 향했다. 기백한이 목을 옆으로 우득 꺾는 소리가 났다.

    “우리 안치영이한테 장난친 새끼들이 누군지 볼까.”

    치영은 저도 모르게 몹시 비탈진 언덕배기 위를 바라보았다. 에스퍼 둘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치영이 그대로 굴러떨어져 죽기를 기대한 듯했다. 백한을 발견한 그들의 얼굴 위에 낭패가 스몄다. 곧이어 뒤를 돌더니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백한이 씩 웃으며 말했다.

    “형이 싹 다 쓸어 줄게. 어디 또 반해 봐.”

    그러고는 그대로 에스퍼 파장을 풀어냈다. 지척에서 우르르 하는 소리가 났다. 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콰지직, 하고 나무 기둥이 뽑히며 뿌리로 감싼 바위와 함께 두둥실 떠올랐다.

    그것들은 곧이어 엄청난 속도로 한 곳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에스퍼들이 도주한 방향이었다.

    곧이어 기백한 역시 공중에 떠올랐다. 한쪽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상태였고, 다른 손 위에서는 자갈 몇 개가 진자 운동을 하듯 저들끼리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그는 곧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가 띄워 올린 나무, 바위, 자갈 등과 함께 언덕배기의 정상으로 향했다. 속도가 빨라 그의 뒷모습이 뭉그러져 보였다.

    미숫가루를 탄 우유 위 얼음처럼 공중에 띄워진 치영은 짧게 앓았다.

    “…내려 주고 가, 하마 새끼야…….”

    구구구—. 산비둘기가 그런 치영을 비웃듯 울었다.

    * * *

    에스퍼의 등급은 A, 이능력은 신체 투명화. 그가 받은 임무의 내용은 야산에 혼자 있는 가이드 하나를 생포해 오는 것.

    애초에 허벅지를 노리고 던진 나이프가 빗나가 나무에 박히지만 않았어도 두 다리 외에는 별다른 무기가 없던 가이드는 덫에 걸린 사슴처럼 쉽게 잡혔을 것이다.

    아니면 그다음 공격이라도 성공했어야 했다. 그러나 저를 지킬 무기가 없는 초식동물들이 으레 그러하듯, 눈치가 무척이나 빨라 금세 도주해 버렸다.

    보통은 이게 뭐지? 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 이미 늦어 죽어 버리고야 만다. 그러나 그 가이드는 아니었다.

    나무에 박힌 나이프를 보자마자 뒤를 돌아보는 실수 따위는 하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 도주해 버렸다.

    명백히 만만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잡지 못한 이쪽의 방심이었다.

    보고서에는 분명 그 가이드가 F급이며 특출난 점 하나 없다고 쓰여 있어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가이드는 제 손이 찢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얇은 낚싯줄에 매달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 가이드가 특별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다른 가이드들이 수료하는 훈련을 짧은 시간 동안 임한 것 외에는 특이 사항이 없었다.

    오히려 어렸을 때 가이드로 발현하여 센터에 들어온 다른 가이드들의 훈련량이 월등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이드는 이렇다 할 전투 경험도 없으면서 과감하게 행동했다. 절벽에 딱 달라붙어 피가 묻은 손으로도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가파른 돌벽을 기어 내려갔다.

    에스퍼는 그런 놈들을 잘 알고 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수틀리면 죽어 버릴 생각으로 막힘없이 행동하는 놈들. 그 F급 가이드는 그런 놈들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생포가 까다로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놈이 아예 가파른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나무에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으면 끌고 갈 생각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눈이 마주쳤다. S++ 그래비티 컨트롤러, 기백한과 말이다.

    “헉, 허억—!”

    이제 쫓기는 것은 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같이 임무를 받았던 다른 한 명의 에스퍼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뜨끈한 물이 주륵 흘러내리길래 훔쳤다. 땀이라고 생각했는데 피였다. 기백한이 날린 돌멩이에 이마가 찢어진 듯했다.

    동료 역시 그 돌멩이에 맞고 의식을 잃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기백한은 시시각각으로 포위망을 좁혀 왔고, 저는 도주로가 좁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기백한이 몰아넣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퍼는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은 채 헉헉거렸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기백한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이능 파장을 갖고 있었다.

    파장이라는 것은 세력권을 갖고 있다. 그 파장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와야 이능이 발현되는 것이다. 투명화 이능을 갖고 있는 저처럼 신체 특화 및 강화 능력자들의 파장은 제 몸을 덮을 정도면 된다. 이능을 발휘해야 할 부분이 제 신체뿐이니 말이다.

    파장의 세력권이 넓으면 넓을수록 에스퍼의 신체에는 부담이 지수 배로 증가한다. 그걸 견디면서 폭주의 위험을 딛고 이능을 발현시켜야 했다.

    그리고, 기백한의 파장 세력권은 현재 이 야산 전체에 뒤덮여 있었다. 눈이 내리듯 파장이 내린 야산이 모두 기백한의 영역이 되어 버렸다.

    그게 끝이었다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백한의 무서운 점은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저는 죽어라 뛰어 도망치는데도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기백한이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이다.

    ‘미친 새끼……!’

    그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에스퍼의 등급은 그의 체능에도 영향을 미친다. D급 에스퍼라고 하더라도 비범한 체능을 자랑한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유도 선수와 D급 에스퍼가 싸운다면 당연히 D급 에스퍼의 승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A급과 S++급의 차이는 어떠할까.

    “어, 다 뛰었어?”

    별안간, 정수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퍼의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뒤에서 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커다란 밤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 있는 기백한이 그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욕을 짓씹은 그는 그대로 방향을 돌려 반대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능의 파장을 전개하여 온몸을 투명화시켰다. 가급적 이능 노출을 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진작 투명화 이능을 사용하여 도주했을 테지만, 명령이 있었던 터라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까지 재고 따질 만한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살아 도망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신체 투명화를 일으킨 에스퍼는 그대로 달렸다. 치영이 그랬던 것처럼 뒤도 바라보지 않은 채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때. 젤리로 가득 찬 풀장 안에 빠진 것처럼 에스퍼의 몸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재빨리 제 손끝을 바라보았다. 아직 몸이 투명한 상태였다.

    기백한이 그저 주위의 모든 것들에게 부가된 중력을 없앤 것이다. 아직 제 위치는 모르는 듯했다.

    그 순간, 귓가에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이렇게 쉽게 잡혀서 나쁜 짓은 어떻게 하려고 했어.”

    누군가 목을 낚아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암전되었다. 그것이 제 목뼈가 부서지는 소리라는 걸, 그 에스퍼는 끝내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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