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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49화 (49/114)
  • 49화

    땅에 뱀딸기가 핀 걸 보고 허리를 굽혔던 치영은 무언가 피슉 대기를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앞에 있던 나무에 나이프가 날아와 꽂혔다.

    칼자루를 보아하니 길이 약 9cm경의 살상용 소형 나이프였다.

    “……!”

    약간 먼 거리의 뒤편에서 누군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멈추지 않고 달렸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이프가 나무에 박힌 길이를 미루어 볼 때 상대는 에스퍼였다.

    일반인이 던졌다기에는 칼자루까지 깊숙하게 나무에 박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런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에스퍼밖에 없다.

    뭐지. 뭘까. 누가 대체 왜 저에게 살의를 담아 칼을 던진 걸까. 짚이는 곳이 전혀 없었다.

    적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살해 위협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손진화? 손진화일까? 손진화라면 그럴듯했다. 치영이 죽으면 각인 가이드를 잃은 기백한은 폭주를 일으킬 것이다.

    그의 이능력은 양날의 검인지라, 폭주 시 서울과 경기도 일대가 일시에 날아가 버린다.

    군부에서는 그를 막기 위해 기백한을 ‘폐기 처분’할지도 모른다. 그는 아주 훌륭한 무기지만 동시에 너무 위험하다.

    각인 가이드를 잃은 에스퍼의 말로란 비참하기 마련이다. 만일 그 에스퍼가 고등급이라면 더더욱. 백한과 치영이 허울뿐인 각인을 나눴다고 해도, 가이드를 잃는 순간 백한의 유전자에 남은 각인이 그를 옭아맬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손진화일 수도 있고, 아예 다른 세력인 반정부군일 수도 있다.

    저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치영을 처치함으로써 기백한을 폭주시키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 깨달은 것이 분명하다.

    죽을 때도 누군가의 부속품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니. 치영은 이 와중에도 비참했다.

    다행인 것은 장마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탓에 땅이 무르지 않다는 거다. 그 사실 하나만이 위안이 되었다.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딱 그 하나만이.

    뒤를 쫓는 이들은 신체 능력이 특화된 에스퍼. 일반 성인 남성인 치영이 아무리 군사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쉽게 떨치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치영은 소년 시절을 산에서 보냈다. 산의 지리적 특성을 잘 아는 편이었다.

    지급품 중에는 강화 낚싯줄이 있었다. 군에서 개발한 물건인데, 정말 낚싯줄인 것은 아니고 낚싯줄처럼 투명하고 얇아 그렇게 불렸다.

    탄성과 전단력을 견디는 강도가 뛰어나 치영의 무게 정도는 너끈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치영은 속도가 떨어지지 않게 산등성이를 달려 올라가며 훈련용 조끼에서 낚싯줄을 꺼냈다. 이것을 낚싯줄이라 부르는 이유는 실의 첫머리에 작은 납덩이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쉬릭 거리는 소리가 나며 줄이 풀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치영은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모든 폐포가 오그라든 뒤 확장되는 시간이 부족하여 폐의 첨단으로밖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치영은 심박 수를 조절하기 위해 숨을 훅 하고 끝까지 뱉은 다음, 풀어낸 낚싯줄을 군용 나이프로 갈듯이 끊었다.

    가파른 언덕의 끄트머리쯤에 그물처럼 쳐져 있는 나뭇가지와 수풀 사이로 이제 노을로 변해 가는 햇빛이 끼쳐 들었다.

    목덜미에 바람이 휙 하고 끼쳤다.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막 빠져나온 모양이다. 치영을 지척까지 따라잡은 것이다.

    “제길!”

    아니나 다를까 욕설이 들렸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목덜미를 잡힐 뻔했지만, 치영은 끝까지 뒤돌지 않았다.

    저승의 입구에서 아내를 돌아본 남자, 빠져나오던 악의 구렁에서 뒤돌아봐 소금 기둥이 된 여자. 치영은 그 이야기들을 들었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것들이 정말 무서웠다.

    망설임과 미련이 언젠가는 제 목을 조를 것이라고 직감했는지도 모르겠다. 기백한의 옆자리에서 버틴다는 건 그런 형벌이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 적에게 일격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아야 한다.

    근 몇 년간은 망설임과 미련 속에서 살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때도 그렇게 멍청하게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치영은 아슬아슬하게 저를 쫓는 이를 피해 정상에 도달했다. 그러고는 낚싯줄의 끝에 달린 납덩이를 돌팔매질하듯 날려 나무의 동이에 묶고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곳은 절벽이었다.

    처음 와 본 산이었지만 보통 바위가 많은 경사가 지나면 절벽이 나오고는 한다.

    치영은 모험하는 심정으로 달렸다가, 정말로 절벽이 나오자 작게 안도했다. 낚싯줄이 손아귀에서 휘리릭 풀리며 치영의 무게를 견뎠다.

    그대로 끈을 잡은 채 반동을 이용해 옆으로 누인 U자처럼 생긴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절벽 위에서 저를 찾으면 바라볼 수 없도록 말이다.

    멀리서 욕설과 함께 서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퍼는 한 명이 아닌 듯했다. 절벽에는 치영이 바짝 붙어 서면 간신히 설 수 있는 틈이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낚싯줄을 붙잡은 채 몸을 그 틈 위로 올렸다. 줄이 붙잡고 있던 손바닥을 파고드는 바람에 놓지 못해 그대로 중심을 잃을 뻔했으나 운이 좋았다.

    군화 뒷굽에 절벽의 틈이 걸린 것이다. 내전근에 힘을 준 채로 다리를 오므리듯 올라탔다.

    심장이든 폐든 어디 한 군데는 딱 터질 것만 같았다.

    “헉, 허억……!”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니 놈들도 곧 치영이 절벽 틈에 매달려 있다는 걸 눈치채겠지만, 다행히도 절벽의 높이는 30m 이상이었다. 기백한 정도의 에스퍼가 아니라면 그 정도 높이에서 바로 뛰어내릴 수는 없다.

    그들이 절벽 아래에 도달하기 전까지 치영이 먼저 내려가야 한다.

    클라이밍을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죽을 위기에 처하니 몸이 저절로 움직이기는 했다.

    틈과 틈 사이에 피에 젖은 손가락을 밀어 넣고 군화의 앞꿈치를 퍽 치듯 돌 틈에 박아 넣어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산 아래로 내려가 차가 다니는 자유로 근처까지만 가면, 목격자가 있고 CCTV도 있으니 쉽게 죽이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목숨을 1분씩 연장하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 절벽은 반 정도가 나뉘어져 산의 중반 정도 오는 언덕과 이어져 있었다.

    치영이 뛰어내린 자리에서 그대로 미끄러졌다면 바로 높이 30m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겠지만, 사선으로 내려간 덕분에 맞닿아 있는 언덕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은 아예 손으로 짚거나 군홧발을 밀어 넣을 수 있는 틈이 없어 그대로 뛰어내려야 했다.

    낙법을 익히기는 했지만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의 가이드들은 무술 훈련을 하지 않는다.

    전투 가이드가 아닌 이상 에스퍼들은 자신의 가이드가 사격을 잘하거나 전투 무술이 뛰어난 것을 싫어했다. 본인의 무능력으로 가이드를 고생시킨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영은 센터에 들어와 기초 무술을 익히는 시간들을 절대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기백한의 가이드가 되려면 다방면으로 훌륭한 것이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무술 훈련에 매진하고, 코피를 흘려 가며 전술을 익혔다.

    육해공, 모든 군을 합쳐 가장 엘리트들만 모여 있다는 에스퍼‧가이드 특수군에서 기백한의 가이드로 예정되어 있던 치영은 나름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때문에 지금도 써먹을 것은 많았다. 기백한 때문에 일어난 위기에 기백한을 위해 익힌 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치영을 살리고 있었다.

    그 모순에 반쯤 질린 얼굴을 한 치영은 말없이 흔적을 남기지 않게 조심하며 하산했다.

    공포탄이 아닌 실제 총탄만 갖고 있었어도 살 확률은 더 올라갔을 테지만, 수중에는 낚싯줄뿐이었다. 이쯤 되자 손진화가 의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상스러운 훈련을 지시한 것도 그쪽이고, 사격 훈련을 하라고 해 놓고 공포탄을 내준 것도 작전처였다.

    치영이 이곳에 훈련을 오는 걸 아는 이는 작전처와 기백연밖에 없으니, 작전처가 치영을 사지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 아니라면, 작전처의 정보들이 외부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전자든 후자든 손진화의 책임이 명백한 일이었다.

    “훅, 허억…….”

    숨이 가빠진 것을 다스리며 청각에 집중하려 했다. 여름이 목전이라 땅에 낙엽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풀들은 군화에 짓밟혀도 바스락 소리를 내지 않았다. 청각 능력이 특화된 에스퍼라고 한들 치영을 쉽게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치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구구구 우는 소리가 났다. 산비둘기였다.

    푸드덕하고 날아가는 소리에 치영은 등골에 소름이 쫙 번지는 것을 느끼며 바로 주저앉았다.

    “이 새끼 어디로 갔어?”

    “숨었나 본데. 가이딩 파장도 안 느껴져요. F 등급이라더니 파장도 존나 약하고 지랄.”

    숨소리가 거친 에스퍼 두 명이 풀숲을 뒤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지척에 와 있는 상태였다. 치영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숨소리를 참으려 노력했다.

    폐가 찢어질 것 같은데 여기서 마음 놓고 숨을 쉬었다가는 그대로 들킬 것만 같았다.

    치영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땀방울이 눈꼬리를 타고 들어와 눈앞이 흐려졌다.

    “야, 가만히 있어 봐. 너무 조용하지 않냐?”

    “…그러게요.”

    “아주 산을 벗어난 건 아닌가 본데.”

    -씨발, 눈치는.

    치영은 욕을 짓씹었다.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일어나 달려 나가야 할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고민을 하는 것에 수십 시간을 쓴 것 같은데 실제로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치영은 일어나 바로 에스퍼들의 반대편을 향해 달렸다.

    “저, 씹! 잡아!”

    뒤에서 고함이 들렸다. 치영은 정신없이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달렸다. 귓가에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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