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48화 (48/114)

48화

어쨌든 손진화의 훈련 명령을 불응하는 수는 없었다.

그쪽에서 내건 훈련의 목적 자체가 ‘저급 가이드들을 위한 작전 훈련 프로토콜’이었기 때문에 춘란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것 같았다.

현재는 춘란의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기백한에게 보고를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관뒀다.

대신 백연에게만 메시지로 말해 두었다. 어쨌든 치영은 아직까지 동죽대의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메시지 옆 1 표시가 사라지자마자, 백연에게서 바로 전화가 왔다.

치영이 관등성명을 하기도 전에 백연이 먼저 말했다. 성격이 급한 것은 남동생과 비슷했다.

—손 처장이 자네한테 무슨 훈련을 시킨단 건가.

“자세히는 저도 잘……. 저급 가이드들을 위한 훈련이라고만 전해 들었습니다.”

—저급 가이드? 말투가 저렴하기 짝이 없군. 안 소위, 수틀리면 인권위에 찌르도록 한다. 아니지. 본관이 대신 찔러 줘?

“괜찮습니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치영의 대답에 백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화기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기백한 이놈, 핏줄이지만 성질 고약한 거 알고 있다. 그런 자식이 자네 가이딩에 죽고 못 사는 거 보면 자네의 능력은 그저 등급으로만 판가름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건 위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뿐이다.

“…예. 감사합니다, 소령님.”

기백연의 위로는 투박했지만 그래서 진심처럼 느껴졌다. 그저 진실이 아닐 뿐.

기백한이 안치영에게 괴팍하게 구는 것은 그가 치영의 가이딩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에스퍼로서 제 영역에 들어온 가이드를 집착하는 것뿐이었다.

각인한 것이 죽도록 싫다고 해도 각인이 주는 안정감까지는 완전히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식사 뒤 포만감을 무시할 수는 있어도, 식사를 한 사실까지는 지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각인 상대인 치영에 대해 딱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겠지. 의식으로 치영을 밀어내고, 몸으로는 그를 원하는 상태일 수도 있다.

그 부분에서 오는 괴리감이 안 그래도 괴팍한 그의 성격을 날뛰는 하마처럼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기백한은 원래 괴팍하기는 했다.

—아무튼, 손진화가 무슨 짓거리라도 하는 것 같으면 바로 연락하도록 한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물끄러미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치영은 대기하던 곳에서 조금 더 기다리다가 작전처 소위 하나가 설명하는 훈련 내용을 들었다.

훈련 내용은 간단했다. 치영 말고도 훈련을 받는 가이드는 서너 명 정도 더 있었는데 그들 역시 등급이 낮았다.

모르는 얼굴에다가 살짝 어벙한 표정을 보아하니 신병 같았다. 그게 아니면 가이딩 등급이 너무 낮아 대체 인력으로 빠져 평상시에는 책상 업무를 주로 하는 군무원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왜 온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과반수였다. 가이드군으로서의 정확한 교육을 받은 것은 치영뿐인 듯했다.

서 있는 자세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립하여 서 있는 치영 옆에서 우왕좌왕하더니 일렬종대로 나란히 서기 시작했다.

치영은 그들을 흘끗 보다가 다시금 정면을 응시했다. 곧이어 교관 모자를 쓴 소위가 훈련 내용에 대해 안내를 시작했다.

“대충 안내를 해드릴게요. 오늘은 별거 없습니다. 다 시범 훈련일 뿐이고, 이것도 돈이 꽤 들어가는 거라서 위쪽에서도 몇 번 하고 말 것 같네요.”

소위는 무표정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기보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소위면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말투가 민간인처럼 풀어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치영은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가, 곧바로 눈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호명부터 할게요. 원종철 주무관님.”

줄의 끄트머리에서 어떤 남자가 “네!” 하며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치영의 이름은 마지막에 불렸다.

“안치영 소위님.”

“네.”

“지급품 가져가시고 훈련 시에 사용하시면 됩니다. 사용 방법은 아시죠? 총알은 그냥 공포탄이지만 탄피는 챙기셔야 합니다.”

기초적인 설명까지 하는 얼굴이 내내 심드렁했다.

치영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설명을 끝낸 작전처 소위는 이내 몸을 돌려 훈련생들에게 다음 장소를 안내했다.

연병장과 붙어 있는 훈련 센터에서 오늘 훈련을 진행하는 듯했다. 치영 역시 훈련 센터로 향하는 카트에 탑승하려던 때였다.

“아, 안 소위님은 그쪽 아닙니다. 오늘 훈련 센터 가상 훈련실 만석이라 안 소위님은 야산 훈련 하시랍니다.”

“…저 혼자서 말입니까?”

야산 훈련을 진행해 본 적은 있다. 그러나 춘란대와 함께였다. 애초에 가이드인 저 혼자 야산에서 뭘 하라는 건지도 의미가 불명했다.

“정확히 어떤 훈련인 겁니까.”

“가 보시면 알아요. 그냥 사격 훈련이죠, 뭐. 학생 생도 때 해 보셨을 거 아닙니까.”

작전처 소위는 어떻게 보면 참 편견이 없는 인물이었다.

기백한의 각인 가이드인 안치영이 반정부군인 이악 부대에서 구출되어 소위로 임관되었다는 것을 센터 내에 모르는 이가 없는데 학생 생도 때 해 보지 않았냐니.

그러나 부러 주절주절, ‘저는 생도 시절이 없었습니다.’ 하고 지껄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치영은 마지못해 그를 야산으로 이동시키는 승합차에 올라탔다.

‘군용차도 아닌데 이상하네.’

치영을 태운 차는 민간에서 사용하는 7인승 승합차였다. 전면 유리창에 붙어 있는 차량 인식용 군용 패스도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전수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고, 치영은 제가 챙긴 한 자루의 라이플을 더듬었다. 사격 훈련이라면서 소총도 아닌 공포탄으로 채운 라이플을 주다니.

이상한 점이 무척 많았다. 혹시나 싶어 백연에게 훈련 위치를 전송했다.

그녀는 바쁜 것인지 메시지 옆에 1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일단 보고는 해 두었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차는 제1 자유로를 타고 신나게 달리다가 임진강 근처의 이름 모를 야산으로 향했다.

중간부터는 비포장도로였는지라 덜커덩거리는 바람에 엉덩이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시간은 아직 오후 세 시였다.

여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기 때문에 해는 늦게 지겠지만, 야산 훈련을 혼자 한다고 생각하니 약간 불안하기는 했다.

군사 지역 중 하나인 산에서 할 것이고, 그 산에는 사격장도 구비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꺼림칙했다.

게다가 운전수는 군인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별말 없이 치영을 야산 입구에 내려 주었고, 훈련복 위에 홀스터를 찬 치영만이 그곳에 내렸다.

“…나 혼자 뭘 어쩌라는 거야.”

일단 지급품이나 개인용으로 갖고 있던 군용 나이프 역시 챙겨 오기는 했지만, 훈련 내용이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격 훈련장에서 라이플을 이용한 사격 훈련을 하라니. 공포탄으로 무슨 사격 훈련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불평할 수는 없었다. 치영은 이 모든 것이 손진화 같은 변태 새끼가 벌인 괴상한 짓거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에 변태가 있다. 대놓고 변태여서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는 놈과 왠지 징그러운 느낌의 변태. 기백한은 전자였지만 손진화로 말할 것 같으면 당연히 후자였다.

백한에게 당한 것이 있어 갚아 주고는 싶은데 그에게는 대거리를 못 하겠으니 그의 각인 가이드인 치영을 골탕 먹이는 것이 분명했다.

웬 야산에 치영을 데려다 두고 하룻밤 정도 데리러 오지 않는 식으로 괴롭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 산에서 잘 자는데.”

나쁘지 않은 점은 치영이 야산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악에 있을 때도 산골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에 산이라면 꽤 잘 알았다.

에스퍼들의 심기가 불편한 날에는 괜히 얻어맞을까 봐 아예 밖에서 자기도 했다. 요컨대, 야산이라는 것은 뱀만 조심하면 된다.

“뱀 팔찌 챙겨 왔으니까.”

그리고 치영은 뱀이 정말 싫었기 때문에 지난 야산 훈련 때도 뱀 퇴치 팔찌를 챙겨 왔었다.

군에서 개발한 용품인데 뱀이 싫어하는 향초를 넣은 팔찌였다. 안쪽에 작은 광석이 있어 서로 부딪치며 뱀들이 싫어하는 주파수를 내기도 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팔찌니 팔에 차겠지만 산을 잘 아는 치영은 그것을 군화 위, 발목에 동동 감아 맸다.

치영은 뼈대가 얇은 편이고, 팔찌는 길이 조절이 가능했기 때문에 발목에도 무리 없이 들어갔다.

사격 훈련을 하라고 했으니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사격장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땅이 평평해 무언가를 깔고 자기도 좋을 것이다.

풀이 없는 곳에는 뱀도 자주 지나가지 않으니 일석이조였다. 치영은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걸었다.

배가 조금 고프긴 해서 지급품 중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없나 뒤져 보았다. 맛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군용 비스킷이 나왔다.

잼을 발라 먹으면 맛있다고 허인나가 잼 반 비스킷 반으로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정도면 그냥 잼을 퍼먹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치영에게는 당장 먹을 잼이 없었다.

그나마도 있는 게 어딘가 하는 생각을 하면 불평할 거리도 없었다. 포장지를 깐 비스킷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치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어느 야산은 완전히 군사 지역으로 묶여 있는 터라 아예 풀을 헤치며 등산해야 하는데, 이곳은 민가와 붙어 있어서 그런지 둘레길처럼 산책길이 따로 있었다.

주민들이 산나물을 캐 가는 그런 곳인 듯했다.

치영은 풀이 없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경사가 약간 가파르기는 했지만 못 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숨이 조금씩 가빠 왔다. 날은 장마를 앞두고 있어 습하고 더운데 훈련복이 긴팔에다가 통풍이 잘 되지 않는 직물이었다.

에스퍼들이 입는 옷은 신축성도 좋고 통풍성도 좋아 보이던데, 왜 가이드가 입는 옷들은 하나같이 개떡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치영은 묵묵히 걸었고, 간만에 혼자서 산을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어. 고사리다…….”

가끔가다 아기 주먹처럼 오그라들어 있는 산고사리를 발견하기도 했고, 칡넝쿨을 보기도 했다.

“더덕이네…….”

산더덕 종류는 아니고 주민이 산에 심어 놓은 듯했다. 얕은 고랑까지 있는 것을 봐서는 사람의 수고가 묻어 있는 더덕밭이었다.

군부 소유의 산에 더덕을 심은 간 큰 주민들이 웃겨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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