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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47화 (47/114)

47화

무슨 꿈을 꿨더라?

치영은 두 눈을 깜빡였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눈이 저절로 떠지며 숙면한 덕분에 상쾌한 기분만 가득했다.

근데 여기가 어디야…….

멍하니 누워 있으려니 천장이 이상했다. 벽지나 구성은 똑같은데 전등의 위치가 미묘하게 다른 게…….

“눈떴으면 일어나. 아침 먹게.”

치영은 그제야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백한이 살구 따위를 베어 물며 머리에 핀을 꽂은 채로 치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심드렁한 얼굴을 향해 치영은 공포를 느끼고 말을 더듬었다.

“내 방에서 뭐, 뭐 하는…….”

“자세히 봐라. 여기가 내 방이지, 네 방이냐.”

치영은 시큰둥한 백한의 말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놀라 아예 침대에서 내려왔다. 우당탕 내려오느라 넘어질 뻔한 것을 백한이 낚아채려 하길래 몸을 뒤로 물려 아예 넘어져 버렸다.

기백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왜 뻘짓이야. 가만히 안기면 될 걸 왜 자빠져.”

“…제가 왜 여기 있습니까?”

“더워하길래 데려왔는데. 시원하게 잘 자 놓고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너 따먹길 했냐 뭘 했냐.”

치영은 넘어진 채로 백한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의 눈초리였다.

등을 물리며 손으로 제 양 팔뚝을 X자로 감싸자, 살구를 베어 물던 백한이 쯧, 혀를 찼다.

“눈치 빠르긴. 맛만 봤다.”

“…변태 새끼.”

“일어나서 변태 새끼가 차린 아침 밥상 좀 받아 보셔요.”

손목이 잡혀 그대로 쑥 끌어 올려졌다. 백한의 손이 축축했다. 물과 살구즙 따위가 묻어 있는 듯했다.

손을 돌려 빼 볼까 싶었지만 이내 포기해 버렸다. 그런다고 저 악력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1층으로 내려가기도 전에 주방에서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연두부 포장 좀 까라.”

“가쓰오부시 얹어야 제맛이지 말입니다.”

“돼지 불고기 양념 누가 해 주신 거예요? 순이네서 얻어 온 거 아니에요?”

“응. 사장님이 챙겨 주셨어.”

에스퍼들은 오늘도 장황한 무언가를 아침 식사로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치영은 맛있는 냄새가 나는 주방을 보며 어쩐지 허기를 느꼈다. 이렇게 아침부터 허기를 느끼는 건 잘 없는 일이라 저도 모르게 목을 쭉 빼고 그쪽을 바라보았나 보다.

“웬일로 군침을 다셔? 잘 자더니만 식욕이 좀 도나 보지?”

“배가 고프긴 합니다.”

“어쭈, 예쁜 짓도 해.”

백한이 치영의 손목을 당겨 품에 푹 안더니 관자놀이쯤에 입술을 쪽 붙였다 뗐다. 치영이 밥을 먹는 게 저에게 뭐 좋은 일이라고 흡족한 투였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치영은 백한에 입술에 묻어 있던 살구즙이 관자놀이에 옮겨 붙자, 티셔츠를 들어 올려 닦아 냈다.

상의를 들어 올린 탓에 아랫배가 드러났는지 기백한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어허, 윗도리는 왜 벗어. 아래층에 에스퍼 새끼들 득시글거리는데. 서비스는 둘만 있을 때 해.”

뭔 서비스, 미친 하마 놈아. 치영은 반쯤 질린 얼굴로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틀었다.

백한이 킬킬거리며 치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계단을 같이 내려갔다.

걷기 불편한데 이런 소모적인 행동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딱히 말하진 않았다. 떼어 내고 싶은데 힘으로는 밀리지도 않으니 반쯤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엇, 안 소위님 일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안 소위.”

“아, 네……. 좋은 아침입니다.”

밝게 인사하는 팀원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치영이 백한의 턱을 쭉 밀어냈지만 밀리질 않았다.

짜증이 난 치영은 결국 백한의 발등을 뒤꿈치로 퍽 밟았다.

“아야, 자기야 왜 눈치 줘. 사람들 있는 앞에서는 뽀뽀하지 말라고 해 놓고.”

“하, 씨발, 말을 말자…….”

치영이 정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허인나가 혀를 쯧쯧 찼다.

“저것 봐, 에잉, 쯧. 그렇게 괴롭히다가 소위님 도망가시면 괜히 애먼 저희나 닦지 마시고 지금부터 잘하십쇼. 애도 아니고 왜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치영은 그녀의 말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누굴 좋아해.

기백한은 비단 치영뿐 아니라 저 자신 외의 그 누구도 좋아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감정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기백한과 타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정어리 떼들 사이에 놓인 백상아리라고 해야 할까. 종족이 다른데 어떻게 사랑에 빠지겠는가. 정어리를 사랑하는 백상아리는 없다.

기백한과 뭇 인간의 차이는 그만큼 컸다. 때문에 치영은 기백한의 성격을 안 뒤로는 그가 저를 사랑해 주길 바란 적이 없었다. 얼른 잊자는 다짐을 하기 바빴지.

사람에 대해 내리는 평가가 정확한 편인 허인나가 치영도 아는 것을 놓치다니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백한도 따로 아무 말 않길래 속으로만 고개를 갸웃거리던 치영은 그냥 몸을 돌려 에스퍼들이 뭘 만드나 구경했다.

가쓰오부시 육수로 만든 간장을 차게 식혀 연두부에 부은 것과 달큼한 생강 향이 나는 돼지 불고기, 로메인 쌈이었다.

…아침부터 또 고기를 먹는구나.

치영은 약간 질렸지만 도전해 봐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음식들이 하나같이 맛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냄새도 무척이나 훌륭했다. 탱글탱글한 연두부와 차게 식힌 간장 소스가 어떤 맛을 낼지 궁금했다.

“안 소위는 거기 앉아 있어요. 오늘은 양념도 순이네 사장님이 직접 해서 보내 주신 거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치영은 박형인의 말에 그래도 뭘 도와야 하는 건 아닌가 기웃거리다가 이인교에게 붙잡혀 그대로 의자에 앉혀졌다.

인교가 수저 세트를 인원수에 맞게 식탁 위에 올려놓는 동안, 기백한이 국그릇에 미역국을 담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미역을 많이 넣었냐? 이게 미역 볶음이지, 미역국이냐?”

“그거 김 중위님이 미역 양 생각 못 하고 존나게 불려 놨길래 빡쳐서 그냥 다 넣은 겁니다.”

“인나야, 자랑이다. 넌 그게 문제야. 팀워크도 없냐 넌? 그리고 요리할 때 주방 근처에 오지 말라니까.”

“뭐라도 하라고 잔소리할 땐 언제고.”

허인나와 김민우는 한동안 더 투닥거리다가, 김민우가 허인나에게 머리채가 붙잡히면서 끝이 났다. 박형인이 그러다 상 엎겠다며 이를 갈았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허허실실 사람 좋게 웃는 박형인은 식사만 준비했다 하면 밑으로 줄줄이 열두 형제를 건사하여 키워야 하는 맏이처럼 신경질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치영은 피식 웃으며 제 앞에 밥그릇을 놓아 주는 김민우에게 꾸벅 인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중위님.”

“많이 좀 드세요. 그렇게 적게 먹어서 어떻게 삽니까.”

…적정량 먹는 건데. 본인들이 너무 많이 먹는다는 자각은 없나…….

치영은 조금 억울했지만 그게 핀잔 섞인 걱정임을 알기 때문에 말없이 고개나 끄덕였다.

춘란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너무도 밝게 시작된 나머지 치영은 지난밤 느꼈던 안온한 감각과 그의 침대에서 맡을 수 있었던 안정의 향기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 * *

태풍은 고요 속에 온다. 혹은 믿기지 않은 일기 예보와 함께.

몇 호 태풍이니, 몇 년 전 왔던 매미보다 강력하다느니 하는 예보는 에이, 정말 오겠어? 하는 약간의 안일함을 좀먹고 세력을 불려 가로수와 전선주를 뽑고, 아파트 유리창을 박살 내는 것으로 증명하는 법이다.

불행이라는 것은 그렇게 방심 속에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태풍이라도 안치영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치영은 방심을 몰랐다. 마음을 놓고 살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희망에 차 누군가의 가이드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2년을 제외하고, 치영은 단 한 번도 안정 속에 산 적이 없었다.

치영은 나름으로 단단히 대비하였다. 풍랑과 싸우기 위하여 자신을 단련하고, 몰아치는 폭우를 방비하여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몸을 웅크렸다.

그럼에도 그런 비바람은 치영에게만 유독 거센 부분이 있었다. 방심한 적도 없는데, 오히려 남들보다 더욱 대비했는데도 치영은 견디기 힘들 때가 많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이 새끼 어디로 갔어?”

“숨었나 본데. 가이딩 파장도 안 느껴져요. F급이라더니 파장도 존나 약하고 지랄.”

숨소리가 거친 에스퍼 두 명이 풀숲을 뒤지고 있었다. 치영은 나무 밑동 뒤에 숨어 그들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숨을 죽인 채로.

-여섯 시간 전.

오늘도 훈련일 중 하나였다. 치영은 오전에 가이딩실로 출근했다가, 갑작스러운 훈련이 잡혔다고 해서 치료복에서 훈련복으로 환복한 뒤 명령 대기 중이었다.

아예 훈련 센터로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호출이 온 것은 작전처였다.

치영은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처럼 기백한이 저를 데리러 온 것도 아니고, 훈련 센터로 바로 향하라는 말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훈련이 있다는 말도 치프에게서 전해 들었다. 치프 또한 가이딩실에 있는 내선전화로 연락을 받은 듯했다.

춘란에서 잡은 훈련이라면 내선 전화가 아닌 치영의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훈련 명령도 명령인 법이다. 군인 주제에 항명할 수는 없는 일이라 훈련복으로 환복한 후 작전처가 있는 본청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기백한이 아닌 작전처장, 손진화였다.

“안 소위, 오랜만이야.”

“소위, 안치영.”

경례하며 관등성명을 대자 손진화는 쉬어, 하고 짧게 말하며 웃었다.

“딱딱하기는. 오늘 훈련은 나랑 진행하는 걸로 해. 임무 날짜가 코앞이니까 나랑도 배를 맞춰 봐야지.”

“예, 알겠습니다.”

어투가 성희롱이었지만, 기백한에게 하도 당한 것이 많아 미간에 실금도 가지 않았다.

손진화는 치영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한 것 같지만, 치영은 무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이제 막 임관한 신병처럼 얼굴이라도 붉히길 바란 것일까?

에스퍼들 중에 개자식은 많다. 그중 왕은 기백한이다. 성희롱 왕 옆에서 보낸 시간이 오래된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백한이 대놓고 개자식인 것에 비해 손진화는 좀 징그러운 구석이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치영에게는 다 거지 같기는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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