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46화 (46/114)
  • 46화

    목덜미에도 비슷한 감촉이 스쳤다. 상의를 벗고 있는 기백한의 피부가 손 아래서 느껴졌다.

    치영은 자신이 아주 살짝 어지러울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이미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눈이 풀려 있었다.

    흐려진 두 눈동자는 숨을 할딱일 때마다 속눈썹 사이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백한은 그런 치영의 두 눈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중이었다.

    입술을 떼고 치영의 눈을 바라보았다가 다시금 입을 맞췄다.

    그는 치영의 반응까지 삼키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입을 맞추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치영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

    치영이 저와의 입맞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입술이 혀로 헤쳐지는 감각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가 궁금한 것 같았다.

    치영은 그것이 의아했다. 기백한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가 원하는 것은 가이딩일 뿐이고, 가이딩을 수여하는 데 치영의 반응 따위는 필요 없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기백한은 치영이 거기서 더 생각하지도 못하게끔 만들었다. 입맞춤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

    단단한 팔뚝이 치영을 옭아맸다.

    치영 역시 어느 정도 신장이 있는 편이라 가이딩실에 나가면 웬만한 이들보다는 키가 큼에도 불구하고, 기백한과는 비교가 불가했다. 덕분에 목이 뒤로 젖혀졌다.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점으로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아서 그렇지, 두꺼운 어깨나 갑옷을 두른 것 같은 가슴 근육 등을 움직인다면 간단하게 숨골을 눌러 다시는 호흡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 남자가 저를 끌어당겨 키스하니 입맞춤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꾸준히 훈련을 나가는 데다가 치영도 군인인지라 나름 튼튼한 신체를 갖고 있는데도, 기백한의 무기 같은 육체에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아, 잠, 깐.”

    잠깐이라고 말했는데 백한은 멈춰 주지 않았다. 안쪽에 들어온 혀가 허락한 적 없는 곳을 문지르고 있었다.

    감각이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둘 사이에 이런 스킨십은 꾸준했기 때문이다.

    의무만 남은 권태기의 부부처럼 스킨십을 통해 가이딩을 주고받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언가 조금 달랐다. 치영은 백한이 저를 보는 것에서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것을 느꼈다.

    그것은 깊고 깊어 속을 알 수 없는 우물 같기도 했고, 육지 조명에 비친 밤바다 같은 색을 내기도 했다.

    일렁이는 그 빛을 볼 때마다 치영의 속도 같이 울렁였다. 그러나, 입술을 스치는 그 감촉만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치영이 저도 모르게 호흡이 가득한 한숨 소리를 낼 정도로.

    그 소리에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어 낸 백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치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눈빛이 이상했다. 꼭 순결을 뺏은 상대 또는 치한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라 치영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기가 막혔다.

    기백한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 뭐를요…….”

    “…목소리 그렇게 내는 거.”

    목소리를 내가 어떻게 냈길래? 묻고 싶었는데 기백한이 다시 한번 입술을 막아 왔다.

    안쪽에 들어온 것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두꺼운 혀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으응, 하고 몸을 뒤척이니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더욱 조여 왔다. 맞닿은 가슴팍을 통해 백한의 호흡이 느껴졌다.

    두꺼운 흉통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가슴이 닿아 있는 치영에게는 곤혹이었다.

    손을 내려 가슴팍을 밀어내고 싶으나, 백한이 이미 잡아먹을 듯 굴고 있어 목덜미 뒤에서 깍지를 낀 손을 풀면 그대로 침대에 등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너 가이딩실에서 다른 새끼도 이렇게 입술 빨아 준 건 아니겠지.”

    “…으.”

    그 말이 상황에 맞지 않게 뜬금없다는 것도 잊은 채, 치영은 저도 모르게 비위 상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치영을 샅샅이 내려다보던 백한이 눈을 접어 웃었다. 왼쪽 눈꼬리 아래 있던 눈물점이 야살스레 접혔다.

    “좋아. 어떤 새끼가 너 건들면 인중 박살 내고 나한테 튀어와. 그 집 대를 끊어 준다, 내가.”

    “나 건드는 새끼는 중령님뿐입니다. 너네 집 대나 끊으십쇼.”

    “우리 집은 시스터가 가장이잖아. 어떻게든 해 주겠지.”

    기백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그 가벼운 웃음을 본 치영은 문득 저도 그도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를 떠올렸다. 햄버거를 처음 먹어본다는 제게 장난스레 웃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별안간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표정을 들키기 싫어 고개를 돌리자 백한이 치영의 턱을 잡아 와 저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

    “…….”

    각인을 나눈 에스퍼와 가이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의 광대뼈와 뺨 언저리를 스치기도 했고, 입술 선을 핥듯이 훑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는 치영의 젖은 입술을 다시 한번 내리눌렀다. 키스가 계속되었다.

    아예 치영의 골반을 번쩍 들어 올린 백한이 뒤로 누운 채 치영을 제 배 위에 올려 두었다.

    그의 널따란 가슴팍에 엎드린 채 치영은 백한과의 입맞춤을 계속해야 했다. 허벅지 안쪽부터 장골 언저리까지가 묵직했다. 치영은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위에서 일어나고 싶은데 짚을 곳조차도 기백한의 헐벗은 가슴팍뿐이었다. 버둥거리는 치영의 허리를 백한이 끌어안았다.

    “움직이지 마. 더 대단해지면 어쩌려고.”

    “아, X.”

    “X? X 뜨자고?”

    성적인 단어에는 빠지지 않고 반응하는 양아치처럼 기백한이 킬킬거렸다. 치영은 미간을 좁혔다.

    “장난하지 마십쇼. 저 일어날 겁니다.”

    “이대로 있어. 더 안 건들 테니까.”

    “…불편합니다.”

    “진짜 불편하게 만들기 전에 가만히 있으라니까.”

    밑에서 벌떡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먼 생각 하지 말라는 듯이 백한이 치영의 뒤통수를 꾹 눌렀다.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치영의 한쪽 뺨이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에 눌렸다.

    “아, 짜증 나…….”

    치영이 결국 힘을 빼 버린 채 축 늘어지자, 백한이 킥킥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흉근 위에 올려져 있는 치영의 머리가 통통 튕길 지경이었다.

    “이대로 자자. 그냥 닿기만 해도 가이딩 되니까.”

    “존나 불편한데 이러고 어떻게 잡니까.”

    “나도 터질 것 같은데 너 한입에 털어 넣을 생각않고 눈 감고 자잖아. 우리 안 소위도 노력이란 걸 해 볼까요?”

    미친 저질 하마 새끼. 치영은 어차피 제가 기백한을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이 새끼 잠들면 바로 토낀다. 이런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먼저 잠든 것은 치영이었다. 짜증스러워 눈을 감자마자 훈련이 고단했던 탓에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새벽쯤, 자세가 불편해 뒤척였다. 조금 더운 것 같아 눈을 뜨려던 찰나였다. 조심스레 일어난 백한이 치영을 안아 들고 방을 나섰다.

    일어나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는데, 깊숙하게 가라앉은 의식이 잠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정신은 반쯤 깨어 있는데 몸이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치영은 저를 안정적으로 안아 올려 어딘가로 향하는 백한이 신경 쓰였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걸었을까. 백한은 치영을 안아 든 채로도 가뿐하게 어느 방문을 열었다.

    훅 끼쳐 오는 목련향과 자작나무 향기가 그곳이 백한의 방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는 곧 침대 위에 치영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믿을 수 없게도 백한은 치영을 깨우고 싶지 않아 하는 듯했다.

    치영이 백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 손길과 조심스러움을 애정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삑, 하는 전자음 소리와 함께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위잉, 하는 작은 소음과 함께 살갗 위에 찬바람이 와 닿았다.

    치영은 그제야 그의 방에는 에어컨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치사한 새끼. 팀원들 방에도 놔 주지.

    숙소는 주택답지 않게 중앙난방식이었다. 난슬동에 있는 모든 주택식 숙소들은 개별난방 같아도 중앙난방으로 돌아갔다.

    이능력으로 열에너지를 다루는 에스퍼들이 중앙에 있는 에너지 저장 장치에 이능을 저장해 두면, 그것으로 발전소가 돌아가 전기와 열에너지가 공급되는 식이었다.

    나름 친환경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날짜가 되지 않으면 에어컨이나 보일러를 틀어 주지 않는데, 기백한은 무슨 꼼수를 쓴 것인지 방에 따로 에어컨을 끼고 있었다.

    …어디서 훔쳐 왔겠지. 해적 하마 놈. 치영은 잠결에 제가 웅얼웅얼 욕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속에서, 백한을 향한 애정과 보답받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이 섞여 이도 저도 아닌 색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치영은 백한의 향이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 싫으면서도, 이대로 쭉 잠들어 오랜 시간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침대에는 안온이 묻어 있었다. 각인을 나눈 에스퍼의 방인 만큼, 그의 이능 파장이 고여 있을 수도 있다.

    그 파장이 각인한 상대 가이드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기백한 본인에게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안정이다.

    그러나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의 치영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은 하지 못한 채로 만족감만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깨어 있을 땐 처먹지도 않으면서 잘 때는 뭘 이렇게 오물거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 위에 뭔가가 와 닿았다. 그러더니 누워 있는 치영의 옆 매트릭스가 쑥 꺼졌다.

    허리가 끌어당겨져 누군가의 품 안으로 쑥 들어갔다. 치영은 멍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수마가 생각보다 강했다.

    위잉 하는 소리를 내며 가동되는 에어컨 바람이 기분 좋았다. 단단한 품 안은 오히려 따뜻해 덮지도 않고 춥지도 않아 잠에 깊이 빠져들기에는 딱이었다.

    치영은 저를 끌어안고 있는 누군가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체온을 나눠 갖기 위해서였다. 이불에 파고드는 몸짓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야, 진짜 자냐?”

    “…….”

    “이 요망한 게 진짜 자는 거야, 뭐야.”

    시끄러워. 귓가에 대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잠시뿐.

    치영은 곧이어 더 깊은 잠에 빠졌다. 지난 몇 년간 이렇게 깊은 숙면은 처음일 정도로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