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결국 숙소에는 둘만 돌아왔다. 치영은 이번에도 납치당하듯 귀가했다.
“야, 너는 머리가 그게 뭐냐.”
백한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며 치영을 돌아보았다. 그는 상의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스포츠 브랜드의 반바지만 입고 있었다.
치영은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방에 딸린 욕실에서 나오다 그의 말을 들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너나 옷 좀 제대로 입고 계세요.’ 하며 핀잔을 주기에는, 저 성격에 드로어즈만 입은 위협적인 몸으로 방 안을 돌아다니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치영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살짝 어질러져 있던 방 안을 정리했다. 의자 위에 벗어 두었던 셔츠를 툭툭 털어 옷걸이에 걸었다.
물 흐르는 듯한 무시였지만 백한은 굴하지 않았다. 입술 사이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비를 끼운 채 욕실로 들어가 수건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러더니 동네 개 부르듯이 손을 까딱이며 치영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봐. 형이 말려 줄 테니까.”
…가지가지 한다.
자고 간다더니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이것저것 참견하는 꼴이 딱 질색이었다. 치영은 백한을 무시하려 했으나, 그대로 허리가 잡혀 질질 끌려갔다.
“이렇게 자면 감기 걸려요. 너 좀만 관찰하잖아? 그럼 네가 얼마나 되는 대로 사는 새끼인지 다 티나.”
“…자기소개를.”
치영의 중얼거림을 무시한 기백한은 기어코 치영을 끌고 와 침대에 앉힌 뒤, 그 뒤에 앉아 치영의 머리 위에 수건을 덮었다.
회식 자리가 파하고 다른 에스퍼들이 지켜보는데도 기백한은 꿋꿋하게 치영에게 엉겨 붙었다.
“대디랑 마미 바쁘시니까 애들은 오늘 늦게 들어와라.”
“뭐야……. 숙소가 지들 건가. 웃겨…….”
“방금 말한 새끼가 밥값 계산하고 싶다고 아가리 턴 건가?”
“아닙니다, 대대장님! 충성!”
김민우가 허공을 향해 경례했다. 반동에 떨리는 것처럼 눈썹 끄트머리에 붙인 손을 떠는 꼴이 장난스러웠다.
기백한은 허공으로 카드를 던졌다.
“대충 시간 때우다가 들어와. 볼링을 치든 포켓볼을 치든 맛세이를 까든, 새벽 3시 이전에 들어오는 새끼는 연병장 300바퀴다.”
“진짜 싫다. 안 소위님도 저런 에스퍼 진짜 싫지 않아요?”
허인나의 말에, ‘네, 진짜 싫어요. 공개적인 성희롱도 싫고 팀원 앞에서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 말도 싫어요. 쟁반으로 대가리 까고 싶어요.’ 하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허리가 붙잡혀 그대로 안기듯 식당에서 끌려 나와야 했다. 아주 지랄 염병이다.
나머지 에스퍼들은 누림동에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24시간 운영하는 당구장에 갈 것이라고 했다.
에스퍼들의 파워를 견디기 위해 당구 큐대와 당구공들이 모두 금속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데 그렇게 무거운 쇠공으로도 맛세이를 때리는 정신 나간 놈들이 있다 하니 말 다 했지.
어쨌든 그들은 기백한의 카드를 얻은 뒤로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불평 없이 물러났다. 백한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치영을 구해 주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러고는 둘만 들어온 숙소에서 바로 뭘 어쩌려나 싶었는데, 방에 따라 들어 오더니 씻고 나오란다.
“너 안 씻고 자니? 진짜 비위생적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과장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는 기백한에 질린 치영은 대꾸 없이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제가 먼저 욕실로 들어갔던 것 같은데, 그사이에 먼저 씻은 것인지 기백한 역시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었다. 치영처럼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치영의 머리를 말려 주는 손길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그게 이상했다. 저도 모르게 꾸벅 졸 정도였다.
“어쭈, 졸아?”
“…안 졸았어요.”
일단 부정해 봤지만, 기백한은 믿지 않았다.
“졸지 마. 할 거 있잖아.”
할 게 뭐가 있어. 멍한 눈을 깜빡일 때였다. 치영의 머리에서 수건을 치운 백한이 그를 침대 안쪽으로 당겼다.
그도 모자란지 아예 허리를 돌려 저와 마주하게 하더니, 발목을 잡아 쭉 끌어당겼다. 치영은 순식간에 백한의 다리 사이로 끌려 들어왔다.
잘 때 입는 반바지만 입고 있던 허벅지가 백한의 허벅지 위에 얹히고, 다리는 그대로 그의 허리에 닿은 채 뒤로 뻗어졌다.
치영은 놀라 굳었다. 다리 사이에 위협적인 것이 닿을 것만 같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어이가 없었다. 잔다고 반바지로 갈아입은 인간이 바지춤에 라이플을 챙겨 두었을 리가 없으니 저건 곧 그거란 얘긴데.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딱딱…….”
“네 방에서 좋은 냄새 나.”
냄새 하나로 저렇게 되었다고? 치영은 믿기지가 않아 반쯤 질린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람 놀리는 것도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영은 이 굴레가 싫었다.
기백한의 마음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거기에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에 잠깐 멈칫하게 되는 것.
쉼 없이 절벽을 올라 이 무저갱 같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는 때에, 그 잠깐의 멈칫거림으로 다시금 시커먼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 메어진 멍에. 치영은 질린 얼굴로 눈을 감았다 떴다.
“…키스면 돼요?”
“왜. 해 주게?”
백한이 피식 웃는다. 치영은 눈을 반쯤 뜬 채로 그를 보다가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
“…….”
기백한이 드물게 그 저주스러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치영은 백한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리깐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치영은 이제 곧 임무를 나갈 것이다. 기백한의 각인 가이드로 있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휘두르는 대로 휘둘려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의 애증 관계는 무수하다.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에스퍼도 있지만, 에스퍼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가이드들도 있기 마련이다. 제 가이딩을 무기 삼아 그 대가로 에스퍼의 애정을 받으려 하는 가이드도 있다는 뜻이다.
힘만 따지자면 에스퍼가 월등하겠지만, 본질적인 우위는 가이드가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치영은 단 한 번도 제 가이딩을 무기로 기백한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치영은 제 가이딩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조금만 더 등급이 높았다면 백한에게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치영이 남자라는 이유로 경멸한다고 해도, 가이딩 등급이 높았다면 당당하게 그의 각인 가이드로서의 제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역을 앞두고 여러 번의 훈련을 하는 동안 치영에게 미미한 자신감이 붙었다.
가이딩을 잘하는 것 같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가이딩을 잘하거나 말거나 인생을 사는 데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에스퍼라면 모르겠지만, 가이드는 민간인으로 돌아가도 딱히 달라질 것이 없다. 밖으로 나가 저축해 둔 돈과 나쁘지 않은 일자리를 구해 혼자 힘으로 서고 싶었다.
드디어 제 인생 계획에 기백한이 끼어들지 못한다는 사실이 치영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키우게 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은 원하는 것을 해 줄 마음도 들었다. 가이딩을 받고는 싶은데 치영이 기고만장할까 봐 그러는 것인지, 늘 이런 식으로 저를 못살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노들도 모두 사그라들고 있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기백한에서 전역으로 변경되었다.
그것은 아주 큰 차이였다. 더는 전전긍긍하며 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치영은 기백한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뿐만 아니라 인내, 자존심, 기대와 여유를 빠르게 소진 시켰다. 망설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를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안치영의 마음속에서 기백한은 영원한 타인으로 단정 지어졌다.
그렇게, 서로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하.”
맞닿은 입술 사이로 기백한이 짧은 숨소리를 흘렸다. 그는 치영의 골반을 잡아 아예 제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올려 두었다.
백한을 올려다보며 시작한 입맞춤이 그를 내려다보며 깊어졌다. 입술 사이가 맞붙는 느낌이 여실했다. 말캉한 느낌이 기백한답지 않았다. 그에게도 이렇게 부드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저 입술끼리만 마주친 채로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었던 치영을 비웃듯, 도톰한 것이 들어와 잔뜩 헤집어 놓았다.
등골에 소름이 달렸다. 흐으, 하고 저도 몰래 고개를 뒤로 물리려 했으나,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백한의 굵고 기다란 손가락들이 치영의 젖은 머리에 엉켜 들었다.
“흐읏…….”
잠시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내뱉지 못한 호흡이 터지자, 기백한이 욕을 지껄였다. 치영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백한은 처음에는 그것을 무시했으나, 치영이 계속해서 밀어내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떼 주었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서 쪽 소리가 나며 고개가 떨어졌다. 백한이 반쯤 풀린 눈으로 치영을 보며 물었다.
“왜…….”
“…혀를, 왜 넣어요.”
“아, 쫌.”
살짝 젖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백한의 가슴팍을 밀자, 그는 짜증을 내며 치영의 손목을 끌어당겨 품으로 끌어들였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다시금 시작되었다. 치영은 맞닿은 곳으로부터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팍으로 끌려 들어간 터라 그의 호흡이 촉감을 통해 전해졌다. 두꺼운 흉통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느끼고 있자니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치영은 으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품 안에서 빠져나오려고 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백한은 치영의 젖은 입술을 핥아 주더니 그대로 입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간지러운 감각이 전해졌다.
“…네가 가이딩 해 줄 때마다 꼴려.”
“…….”
“전이랑 좀 다른데……. 검진 날짜 잡힌 거 있어?”
“없, 읏, 잠깐…….”
물어본 주제에 답은 듣지도 않고 다시금 입술 사이를 가르며 들어온다. 까슬한 혓바닥의 감촉이 부드러운 입술을 통해 전해졌다.
치영은 이번에도 도리질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는 아예 턱을 잡고 볼을 눌러 입을 벌리게 만들더니, 그 안쪽에 숨긴 것은 없는지 탐문하듯 집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