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푸핫! 안 소위님 가만히 보면 짱 세지 않아요?”
“대대장님이 안 소위한테 너무 질척거리니까 그렇지.”
“알아서 하시겠다잖아요. 가이드한테 왜 그렇게 집적거리세요, 대대장님.”
이인교, 김민우, 허인나 할 것 없이 기백한을 향해 낄낄거렸다.
치영이 닭날개 하나를 뜯을 때 서너 개는 해치우고 있던 기백한이 혀로 뺨을 밀어내며 말했다.
“근데 이 새끼들 지난번부터 왜 이렇게 안치영이한테 친한 척들을 하지?”
“친한 척이 아니라 친한데요.”
허인나가 맥주병 뚜껑을 어금니로 딱, 하고 따더니 훅 뱉으며 말했다. 치영은 그 말에 눈이 커졌다.
친한, 친한 건가……. 그러고 보니 춘란의 에스퍼들도 가이딩실 사람들처럼 저에게 곧잘 농담을 건네고는 했다.
친한가 봐……. 치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앞에 놓인 쟈스민 차만 홀짝였다.
기백한이 한쪽 눈만을 가늘게 뜬 채 테이블 앞에 앉은 에스퍼들을 응시했다.
“작작들 해라. 남의 거에 침 바르지 말고.”
말투는 장난스러운데 순식간에 퍼진 에스퍼 파장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것도 주위에 중력으로 된 배리어를 친 뒤 그 안에만 파장을 꽉꽉 채워 넣은 탓에, 넓은 식당 중 춘란이 앉은 테이블만 표정들이 안 좋아졌다.
치영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가지가지 한다. 이제는 팀원들까지 닦아대는구나. 상대를 가리지 않는 양아치력에 질려 버렸다.
“윽, 체하겠…….”
“으억, 토할 것 같은……. 어억—!”
대원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안 좋아졌다. 넘치는 파장을 견디지 못한 이인교의 낯빛이 정말 금방이라도 게워낼 것처럼 샛노래지자, 치영이 백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쳤다.
“그만 좀 하십쇼. 밥 먹다 말고 이게 뭡니까.”
“나 안 볼 때 떼X이라도 했니? 묘하게 편든다.”
“진짜, 주둥이 좀 어떻게 안 됩니까?”
치영이 인상을 구기며 말하자, 백한이 산뜻하게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에스퍼들을 짓누르던 파장이 삽시에 걷혔다.
“아무튼 우리 어린이들, 대장님 거는 넘보는 게 아니에요. 니들 매형이 말리니까 나도 참아 주는데, 수작 부리다 걸리면 다들 의가사제대 가는 거야.”
매형 같은 소리 하네. 치영은 웩웩거리는 이인교를 흘끗 보다가 백한의 말에 짜증스레 고개를 돌렸다.
백한은 맥주병 주둥이에 입술을 붙인 채로 그런 치영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윙크까지 하며 웃는데, 가히 또라이 다운 웃음이었다.
어쨌든 기분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기 또라이가 제게 지랄해 대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무시할 수 있는 정도였고, 훈련 역시 무사히 마치지 않았던가.
게다가 팀과의 훈련이라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인지 몰랐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밥을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 소위님 그래도 오늘은 많이 드시네요.”
“그러게. 이제 양이 조금 느셨나 봅니다.”
“엇, 그럼 뭐 좀 더 시킬까?”
지금도 충분히 많은 양인데 어떻게 다 먹으려고 뭘 더 시킨다는 것인지. 이러다가 딤섬집 직원들이 먹을 밥까지 뺏어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에스퍼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그들이 전공 시험 전날 책을 들여다보는 대학생보다도 높은 집중력으로 메뉴를 분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양념돼지갈비 솥밥 어때.”
“밥 말고 고기를 더 시키라니까요?”
“안 시켰다가는 아주 패겠다, 허 중위야.”
“도삭면 하나만 더 시켜 주세요.”
“딤섬도 골라 봐. 골고루 시켜. 하나만 조지지 말고.”
김민우와 허인나가 투닥거리는 사이에, 이인교가 슬쩍 눈치를 보다가 도삭면을 주문했다. 그런 막내를 바라보며 박형인이 메뉴 선택에 훈수를 뒀다.
진지한 어조로 저들끼리 토론을 여는 것을 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치영은 젓가락을 든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그때였다. 그 왁자지껄함 속에서 백한이 치영의 귓등에 입술을 붙였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 역시 치영의 팔뚝에 붙은 채였다. 이곳에서 꼭 해야 할 비밀 이야기가 있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얼음 컵에 담긴 콜라의 청량한 단내가 살짝 풍겼다. 치영은 제 귓등에 달라붙는 입술의 감촉에 어깨를 움츠리며 컵 위로 탄산이 튀어 오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한의 체향과 섞여 있어 촉감과 함께 후각세포까지 자극당하는 느낌이었다.
제게로 몸을 기울이느라 팔뚝에 가슴팍이 달라붙자, 느껴지는 체온이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했다. 치영은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치영만 들을 수 있게끔 속삭였다.
“오늘 네 방에서 좀 자자.”
…그러면 그렇지. 제가 뭘 기대한지도 모르고 실망한 치영은 극도로 혐오스러운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백한을 야려 보았다.
“지랄하십니다.”
기백한은 치영의 거절에도 끄떡없는 얼굴이었다. 치영이 정말로 싫어서 거절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표정.
그것은 비단 치영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을 거절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남자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오만함이었다.
“그러지 말고. 나 좀 재워 주라. 가이딩 모자라.”
“멀쩡한 방 두고 왜 제 방에서 잔다는 겁니까.”
“껴안고 입술 먹으면서 가이딩 좀 채우게. 튕기지 말고. 형 자X가 다 아프다.”
그게 아프다고 제가 책임져 줘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치영은 백한의 턱 밑을 손바닥으로 주욱 밀어냈다.
손바닥에 맞닿은 감촉으로 백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달라붙지 마세요. 덥습니다.”
“그럼 내 방 갈래? 에어컨 있는데.”
수작이 아주 염병이었다. 싫다는데도 엉겨 붙는 것이 짜증 났다. 짜증 난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짜증이 났다.
에어컨 있는 방으로 치영을 불러서 뭘 하려고? 말 그대로 입술이나 좀 빨다가 또 웩웩거리고 싶어 환장한 모양새였다.
치영은 이제 답하기도 싫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에어컨 할아버지가 있어도 안 갑니다.”
“그럼 뜯어다 네 방에 붙여 줄게.”
“뜯어다 다리 사이에 다세요.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거 좆같으니까.”
“비싸게도 군다. 얼굴값 하는구나?”
또 저래. 치영은 오만상을 썼다.
백한은 킬킬거리며 여전히 치영에게 한쪽 어깨를 슬쩍 기댄 채 기다란 팔을 뻗어 맥주병을 움켜쥐었다.
아까 전 허인나처럼 어금니 사이로 뚜껑을 따더니, 그대로 주둥이에 입술을 붙이고 고개를 젖혀 맥주를 마셨다.
치영은 꿀렁이는 굵은 목울대를 열없이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신의 완벽한 피조물처럼 생긴 섬세한 외양과는 다르게 굵은 목덜미나 넓은 어깨에는 수컷의 냄새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수컷이라 함은 짐승이라는 얘기고, 무릇 짐승이란 인간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 법이다. 그 연역적 추론이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 어느새 맥주 한 병을 다 동낸 백한이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문 잠그지 말고 있어. 그깟 거 잠가 봤자 머리카락으로도 열 수 있으니까.”
“존나 치한 같으세요.”
그러나 치영의 말에도 백한은 씩 웃을 뿐이었다. 치영의 훈련 성적이 좋게 나온 걸 의외로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가상 훈련인 라돈에서 가이딩 파장을 넓히는 데 성공했을 때도, 기백한은 그전까지 열 받는 말만 지껄이던 태도를 냅다 내던지고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그의 변덕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3개의 중대를 휘하에 둔 대대장으로서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가려져서 그렇지, 군인으로서의 능력과 전술은 센터 내 최고라는 평을 듣는 자가 아니던가.
또라이처럼 살고는 있어도 나름 효율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그 효율과 실리라는 것에 제 기분에 따른 잣대를 들이대서 문제지만.
어쨌거나 이러는 이유가 있을 텐데 치영으로서는 알 수 없어 답답하기는 했다.
아무리 이런 상황을 많이 겪는다고 해도 상대가 저를 갖고 노는 것에 익숙해질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저를 두고 또 무슨 개짓거리를 하시려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이제는 가만히 당하진 않을 겁니다.”
치영과 기백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먹고 마시며 떠드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같은 식탁 앞에 앉아 있지만 그들과 저는 영영 섞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영은 저를 빤히 보는 백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색이 옅어 아직 불씨를 간직한 잿더미와 같은 색의 눈동자가 치영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 눈에 들어 있는 오만과 야성을 그 주위에 있는 눈물점이 야살스레 포장하려고 한들, 다른 사람은 다 속아도 치영은 속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것은 언제든 치영을 먹어 치워 버릴 수 있는 육식 짐승이었다. 짐승에게는 도와 인의 따위는 없으니 치영은 그에게 그따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한때나마 기대했던 날들에서 지금은 너무 멀리 와 있다는 것이 맞는 얘기겠지.
백한이 슬쩍 웃었다. 제 속을 감춘 두 눈이 여전히 치영을 응시 중이었다.
“오케이. 가만히 당하는 건 또 안 좋아하는구나. 그럼 안 소위가 올라타. 형은 기승위도 좋아해요.”
눈가가 휘어지며 눈물점이 살짝 접히는 야한 미소에도 두 눈동자의 냉엄한 기운은 가시지 않는 것이 웃겼다.
세상 사람들 다 너에게 속아도 나는 이제 너에게 속아 줄 마음이 없어. 진작 너에게 다 줘 버려서 이제 남은 마음도 없거든.
치영은 그에게 화를 내는 대신에 무감하게 지껄였다.
“웩웩거리는 주제에 포기를 않으십니다. 학습 능력 뒈지셨는지.”
“멀쩡히 살아 있고, 복상사가 꿈이에요.”
뻔한 말들,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 시끄러운 테이블, 쌓여 있는 음식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제 몫의 콜라.
이 식탁 위에 치영의 것인 건 아무것도 없어서.
“넌 개새끼야.”
별안간 툭 올라온 눈물을 다시금 욱여넣느라 붉어진 눈가로 치영은 백한을 노려보았다.
요즘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신세가 서럽다. 얼른 전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총 한 자루 훔쳐, 자는 기백한의 머리통을 바숴 놓고 저도 자살해 버릴지 모른다.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치영의 뺨을 핥듯이 응시하던 시선이 다시금 눈을 마주했다.
“아, 참 새롭다. 하루 이틀 일 아니죠?”
백한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치영은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오늘 혼자 잠들기는 그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