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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43화 (43/114)

43화

결국 그날은 백한의 군용 픽업트럭을 타자마자 다시 졸도해 버렸다.

그대로 가이드 병동에 실려 가 링거를 맞고 나서야 귀가했는데, 이미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무리해서 가이딩을 확장하는 바람에 두통과 이명 등에 시달리느라, 당연히 가이딩실엔 출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몸이 회복된 이후로도 출근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워우! 오늘은 컨디션 좋아 보이십니다, 안 소위님.”

“아… 네. 괜찮습니다.”

김민우가 저를 향해 엄지를 추켜올리는 것에 고개를 까딱거려 화답한 치영이 군화의 끈을 마저 조였다.

반갑게 아침 인사를 나누는 것이 싫은 건 아니지만, 이제 막 잠에서 깬 탓에 목소리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춘란의 에스퍼들과 합동 훈련이 있는 날이다. 전투 가이드들은 필수적으로 에스퍼와의 합동 훈련에 참여해야 했다.

지난번처럼 경기 북부에 군사 지역으로 묶인 야산이었는데 일반병이 뿌려 둔 포인트를 점령하는 것이 훈련의 주된 내용이었다.

전투 가이드들은 C등급 이하의 에스퍼 정도는 혼자 처치할 수 있어야 한다. 멀리 퍼져 있는 팀 에스퍼들에게 제 가이딩을 나눠 주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팀 에스퍼들의 전투 시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

인성이 개떡 같은 에스퍼들은 가이드를 보통 제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심으로 가이드를 아끼는 에스퍼도 있다. 전우로서, 제가 지켜야 할 대상으로서 말이다.

그런 이들은 전투 시 가이드가 지척에 있는 상황을 못 견뎌 한다. 전투 중에 혹시라도 가이드가 잘못될까 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전투 가이드들은 에스퍼와의 합동 훈련이 필수였다.

지금처럼 말이다.

“꽉 잡으십쇼, 소위님.”

공중에서 갑자기 나타난 허인나가 치영의 허리를 껴안고 다시금 튀어 올랐다. 치영은 가이딩을 시작했다.

“아, 느낌 죽이네요. 가이딩 감사합니다, 소위님.”

허인나는 치영을 훈련지의 포인트 중 한 곳에 내려주고는 다시금 튀어 올라 사라졌다.

춘란과의 훈련은 나쁘지 않았다. 에스퍼들은 모두 매너가 좋았고, 방금처럼 짧게나마 치영의 가이딩을 칭찬하고 감사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다.

“다음은 접니다, 안 소위.”

박형인이었다. 그 역시 인나처럼 치영을 들어 올린 뒤, 가볍게 다른 포인트에 내려주었다. 맞닿은 틈을 타, 치영은 박형인에게도 가이딩을 시도했다.

“가이딩 느낌이 정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안 소위.”

박형인 역시 짧게 웃고는 서편을 향해 빠르게 튀어 나갔다. 기분이 상기되었다.

팀 훈련이라는 것이 이렇게 잘 맞을 줄 몰랐다. F급이라 가이딩이라고는 공용 가이딩실에서 인사불성으로 실려 온 에스퍼들에게 해 주던 것이 다였다.

의식이 있는 놈은 그것대로 문제였다. 치영의 가이딩 등급이 낮은 걸 그의 인격까지 모독해도 되는 낙인이라 여기는 것인지, 희롱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이딩에 대한 제대로 된 인사는 거의 처음 받아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주 옛날, 기백한을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리고.

“자기야, 딴 새끼들한테는 방사 가이딩만 하라니까.”

…그래. 조용하다 싶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썩었지만, 제 허리를 휘감은 단단한 팔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기백한 역시 춘란대니 저를 다음 포인트에 내려 주기 전까지 가이딩을 마쳐야 했다.

기백한은 실실 쪼개고 있었다. 다른 에스퍼들은 전투복 상의 위에 홀스터 대신 사용하는 전투용 베스트를 입었는데, 저 혼자 얇은 섬유로 된 검은색 목티를 입고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소재라 끌어 안긴 상태에서도 백한의 단단한 몸이 여실히 느껴졌다. 치영은 짜증이 났다.

“어허, 왜 이렇게 뻗대. 기회 있을 때 안겨 봐.”

밀어내지 않았을 뿐, 닿는 것 자체가 극혐이라 뻣뻣하게 힘을 준 치영을 끌어안으며 백한은 아이를 어르듯 어허 소리를 냈다.

저를 내려다보는 이마가 쓸데없이 반듯해 보였다. 오늘은 아예 머리를 하나로 묶었는데, 그 와중에 머리끈이 체리 모양이다.

…어디서 자꾸 저딴 건 주워 오는 거야.

궁금했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을 섞기가 싫었다. 치영은 그냥 입을 다문 채로 가이딩을 시작했다.

“야, 닿은 김에 그냥 접촉 가이딩 하지 뭘 또 방사를 해.”

“방사 가이딩 하라면서요.”

“그건 딴 새끼들 얘기고.”

“그러니까 ‘새끼들’한테는 방사 가이딩 하라셨잖습니까.”

“아, 또 이렇게 개겨? 귀엽네.”

백한이 씩 웃자, 치영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디 팔이나 빠져 봐라, 하고 아예 온몸에 힘을 축 빼 버렸다.

그걸 느꼈는지 백한이 낄낄거렸다. 코끼리도 들고 다닐 근력의 에스퍼로서는 우스운 무게인가 보다.

치영은 제가 100kg을 증량하는 상상을 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몸무게를 늘려 기백한을 조금이라도 괴롭히고 싶었다. 그가 중력을 다루는 에스퍼인 만큼 쉽지 않은 얘기였지만 말이다.

“그래. 형이 다 데리고 가 줄게. 얌전히 계셔.”

그의 품 안에서, 치영의 뺨 위로 바람이 스쳤다. 그는 훌쩍 뛰어올라 나무를 박찼다. 그러고는 나무의 정상에 올랐다.

그와 치영의 무게가 풀꽃의 홀씨 무게만큼 가벼워졌다. 그는 구상나무의 작은 이파리들을 군화로 박차며 걸었다.

치영은 높게 오른 탓에 아찔함을 느끼면서도 구상나무 위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여 살짝 입을 벌린 채 속으로만 감탄했다.

바람이 다시금 치영의 뺨을 스치고 앞머리를 어루만졌다. 치영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야산의 꼭대기에서만 자라는 구상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백한은 그 위를 달렸다. 하늘과 맞닿은 것만 같아 치영은 자꾸 멍하니 풍경만 바라보았다.

저 멀리에 마을과 야산을 따라가는 도로들이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높이 올라와 있는 탓에 가만히 있는 치영도 숨이 찬데, 백한은 끄떡없었다.

치영의 등에 찰싹 붙은 백한의 단단한 가슴팍은 여전히 제 속도를 잃지 않은 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이었다.

치영은 멀리 바라보았다. 휘잉, 하고 바람이 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날씨가 춥지도 않은데 귓등이 얼얼할 정도였다.

“이런 거 처음 보지.”

백한이 말할 때마다 등에 닿은 그의 가슴팍에서부터 진동이 울렸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한에게 그런 순순한 반응을 보인 것은 몇 년 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러나 치영은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눈앞의 광경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넋을 놨구나. 그만 봐. 다음에 또 보여 줄 테니까.”

백한이 타박하지만 않았다면 그대로 몇 시간이고 집중하여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좋은 시간은 여기서 끝인지 백한은 그대로 낙하했다. 아까보다 더욱 심한 바람 소리가 치영의 온몸을 스쳤다.

아쉬웠다. 더 보여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 볼걸. 몇 분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은 광경이었다.

백한에게 짐짝처럼 들려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는 동안, 치영은 다시 한번 구상나무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다음에 또 보여 준다고 했으니 그 말 한마디만 딱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했다.

* * *

“대대장님, 거기 소스 좀 집어 줘요.”

“그냥 처먹어.”

“야, 여기 있다.”

허인나의 요청에 백한이 짜증을 냈다. 옆에 있던 김민우가 대신 고추기름을 건네주었다. 넙죽 받은 허인나가 홍콩식 솥밥 위에 고추기름을 뿌렸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아직 뜨거운 솥밥 위로 기름이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야, 막내야. 넌 뭐 시켰냐.”

“뭘 또 물어봐요. 있는 건 다 시켰지. 각 메뉴당 3개씩.”

“이번에는 영수증 좀 제대로 챙겨라. 저번에 영수증 누락시켜서 대대장님이 그냥 계산하셨잖아.”

“그래도 되지 않아요? 대대장님 부자잖아요.”

“맞아요. 부자 삥뜯어 먹읍시다! 부자의 것을 우리에게로!”

“저 새끼 공산당이야?”

김민우가 이인교를 향해 묻는 말에 허인나가 대신 대답하고, 박형인의 잔소리에 김민우와 이인교가 꽥꽥거리면 기백한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툭 내뱉는 시끄러운 식탁이었다.

식탁 위에는 홍콩식 솥밥과 마파두부면, 어만두와 가지 탕수육, 우육탕면과 갖가지 딤섬들이 아예 탑을 쌓고 있었다.

치영은 이번에도 음식의 양에 반쯤 질려 버렸다. 그가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고 얇은 대나무 젓가락을 괜히 만지작거릴 때였다.

끼익, 소리가 나며 치영의 옆자리 의자가 밀려나더니 목련 향이 훅 끼쳤다. 기백한이 의자를 돌려 치영에게로 몸을 숙인 것이다.

“맥주 안 시켰냐?”

그는 쯧, 혀를 차며 물었다. 박형인이 다시금 벨을 눌렀다. 그러고는 종업원이 이쪽으로 오기도 전에 맥주 여덟 병을 주문했다.

치영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테이블이 좁은 것도 아닌데 갖가지 음식들을 모두 늘어놓느라 맥주병 놓을 자리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몇 명은 서서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기에 맥주를 더 시키다니.

치영은 더 질린 얼굴을 했다.

“누가 얘 안 처먹겠다는 거 입에 쑤셔 넣었어? 왜 이렇게 체한 얼굴이야.”

“안 소위님이 음식량에 질리셨나 봅니다. 소위님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딤섬 몇 개라도 드셔 보십쇼.”

이인교가 붙임성 좋게 대답했다. 허인나가 말없이 치영의 앞접시 위에 가지 탕수육을 놓아 주었다.

커다란 대접에 담긴 가지 탕수육을 제 앞에만 두고 날아오는 젓가락들을 다 쳐 내더니 치영에게는 한 점이라도 준 것이 감동스러울 지경이었다.

“안 소위님은 맥주 안 드시나?”

“아… 저는 괜찮습니다.”

“넌 콜라 마셔.”

갑자기 끼어든 커다란 손이 치영의 앞에 놓인 맥주컵을 앗아 갔다. 기백한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이쪽을 심드렁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기백한의 말에 이번에도 박형인이 주방을 향해 “콜라 하나도 가져다주세요!” 하고 소리쳤다.

…콜라 못 먹는데.

카페인이 든 것은 웬만하면 오후 다섯 시 이후로 먹지 않고 있다. 카페인 과민증이 있어 손을 떨기도 하고, 잠이 안 오는 것이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백한이 주문한 것도 아니고 박형인이 주문해 준 것인데 못 먹는다고 말하기도 조금 그랬다.

기백한이 시켜 주었다면 ‘너나 먹어, 하마 새끼야.’ 하며 그의 앞에 콜라가 부어진 잔을 슥 밀어 놓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오늘도 식탁은 떠들썩했다. 에스퍼들은 늘 그렇듯이 먹성이 좋았고, 훈련이 끝난 뒤에는 더욱 왁자지껄하게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

조용히 옆에 낀 치영은 매콤하게 양념한 홍콩식 닭날개 튀김을 하나 짚어 열심히 먹었다.

오래 끌지도 않았는데 기백한이 옆에서 잔소리를 했다.

“아주 하나 붙잡고 물고 빨아라. 팍팍 좀 먹어.”

“알아서 하겠습니다.”

짜증 난 치영이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하자 풋, 하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한두 명이 아니라, 식탁 앞에 앉은 이들 중 백한과 치영을 제외한 전부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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