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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42화 (42/114)

42화

언제였더라……. 돌담 벽에 담쟁이넝쿨이 잔뜩 엉켜 있는 길을 한없이 걸은 적이 있다.

벚나무 열매가 비를 맞아 후두둑 떨어져 있었다. 오디 색의 그것을 하염없이 밟으며 걸었다.

신발 밑창에 버찌 씨가 끼어 걸을 때마다 따까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게 싫어 씨앗들을 피하며 걸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너무도 많은 씨앗들이 발밑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떨어져 행인들의 발에 밟힌 버찌는 빗물에 섞여 꼭 포도주를 땅 위에 들이부은 것 같은 색을 내고 있었다.

몇 발자국 동안은 애를 쓰며 피해 보려 했으나, 그냥 포기해 버렸다. 보도블록 위에는 온통 벚나무 열매 씨앗뿐이었다.

과육은 흐무러지고 뭉크러진 채 덩그러니 남은 열매의 뼈가 치영의 운동화 밑창에 밟혀 제 친구들이 죽은 이곳 말고 그 어디든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달리는 열차에 무임으로 올라타려 애를 쓰는 피난민처럼 말이다.

치영은 곧이어 그 말 없는 것들을 그대로 밟아 버렸다. 그 소리 없는 절규를 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신발 밑에 끼어 어디든 가 보자고 속삭였다.

그래. 피해서 무엇하겠어. 이것들도 결국 그 자리에서 밟혀 뼈만 남았는데.

한철 나무 위에 얌전히 매달려있다가 폭우에 휩쓸려 땅으로 떨어진 그 신세가 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저 역시 바닥에 떨어진 그것들을 밟지 않고는 걸을 수가 없었다.

피하지 못하는 것들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는 반쯤 체념한 채로 그저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치영의 온 생애를 점철한 사고였다.

치영은 급류에 몸을 맡긴 한낱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다. 거슬러 올라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같은 강바닥 태생이라도 누구는 용이 되고, 누구는 미꾸라지가 되었다.

치영은 자신이 미꾸라지임을 의심치 않았다. 부정하기 위해 애를 쓰며 살기엔 치영의 인생은 혼곤과 피곤이 마구 섞인 익반죽이었다.

그리고 그 익반죽 안으로 과감하게 손을 집어넣고 마주 주무르는 이도 있는 법이다. 그것이 아무리 쓸모없어도 치영의 인생인데, 상대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반죽 사이를 헤쳐 치영의 의식을 깨웠다.

“이제 일어나지.”

듣기도 싫은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니.

잠겨 있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옴과 동시에 치영은 의식을 잃기 전 제가 이뤘던 것들을 모두 부정해 두었다.

내가 그럴 리 없어. 내가 성공했을 리 없어.

그런 부정이야말로 치영의 갑옷이었다. 파장을 늘려 섬 크기만 하게 만들었다고 기분 좋게 기절해 버릴 때는 언제고, 치영은 자신이 이룬 업적을 무시하려 애썼다.

기대를 품지 않는 것만으로도 실망할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냥 부정하기엔 감각이 여실했다.

넓게 퍼진 가이딩 파장이 제게 돌아오기 위해 섬 안에 있던 에스퍼의 파장을 탐색하던 바로 그 느낌이 말이다.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그 황홀한 성취감이 치영을 달궜다.

“형 허벅지에 군침 그만 흘리고 일어나라니까. 집에 안 갈 거냐고.”

좀 더 무의식을 헤매고 있던 치영은 그 말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치영은 누군가의 단단한 허벅지를 벤 채로 옆으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놀라 일어나려 했다. 커다란 손바닥이 이마를 턱 가로막기 전까지는 말이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실컷 베고 잘 때는 언제고 표정이 왜 그따위야. 내가 너 따먹었어? 네가 먼저 베고 잔 거거든.”

기백한이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치영은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마 위에 얹어진 백한의 손바닥도 치워 버렸다.

“성질 봐라. 기껏 무릎까지 빌려줬더니.”

“돌려드리겠습니다. 거지같이 딱딱해서 베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예쁜이는 한마디를 안 지더라.”

예쁜이라는 말도 듣기 싫었다.

누가 봐도 그런 외모는 아니었기에 들을 때마다 그저 자신을 놀리려는 멸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예쁘다는 표현보다는 남자답다는 말이 듣기 좋았다.

게다가 둘 중에 예쁜 얼굴을 따지자면 기백한 쪽이 월등한데, 그런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는 것이야말로 조롱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을 잃은 시간이 짧았는지, 치영은 훈련실 밖 관찰실의 4인용 의자에 누워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그때, 백연이 관찰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백한을 타박했다.

“깨어나면 바로 일어나지 못하게 하라고 했지. 말을 안 듣는다, 기백한.”

그녀는 무감한 어조로 제 혈육에게 잔소리를 했다. 백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자매님 잘 보셔요. 못 일어나게 이마 딱 막았는데 이 성질 더러운 게 내 손 치우고 기어코 일어나신 거잖아요?”

치영은 두 사람의 말싸움을 자르고 백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훈련 기록되어 있습니까?”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그거였다.

실망하고 싶지 않아 기대를 덜어내고 덜어내도 손안에서 가이딩 파장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던 그 감각을 잊을 수가 없었다.

훈련 기록을 확인하여 그것이 제 착각이 아닌 실제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백연은 그런 치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가이드로서 그 마음을 알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기록은 다 되어 있으니 걱정 하지 않는다.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돌아가고 내일 내 집무실로 찾아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얘 봐라. 또 기백연 말만 고분고분 듣네. 형아 섭섭해요, 치영아.”

제게 모욕적인 말을 퍼부은 뒤 아예 없는 사람처럼 저를 무시하던 주제에 또 변덕스레 마음을 바꾼 것인지, 기백한은 옆에 달라붙어서 꽤 근사하게 웃고 있었다.

치영은 그런 백한을 팔꿈치로 밀어냈다. 안타깝게도 미동조차 없었다.

하마를 고작 팔로 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꼼짝않는 것이 억울하긴 했다.

백연이 그 꼴을 보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애 그만 괴롭히고 둘 다 가 봐. 늦었다. 저녁 점호하러 가라.”

“자매님 아직도 동죽 애들 저녁점호 시키고 그래? 쿠데타 안 일어나니?”

백한이 기가 막힌다는 듯 대답했다.

일반병들, 그것도 징병된 병장 계급 이하가 사는 생활관에서나 하는 점호를 에스퍼들에게 시키다니. 치영도 조금 놀란 참이었다.

그러나 백연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군인이 저녁 점호를 하는 게 뭐가 이상하지? 춘란에서도 실시하도록 해라.”

“아니, 우리는 그런 거 안 할 거라니까.”

“실시하도록 해라.”

백연은 마치 고장 난 전투 로봇처럼 똑같은 말을 엄중하게 반복했다.

백한이 약간 질린 얼굴로 치영의 허리를 끌어당겨 올렸다. 또 짐짝 취급을 당한 것이다. 치영이 짜증을 내며 바둥거려도 백한은 끄떡없이 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자매님 잔소리 시작된 거 봤지? 얼 타고 있다가 좆되기 전에 토끼자고.”

“아, 이거 놔요.”

“앙탈은. 들어 옮겨 줄 때 입 다물고 고맙습니다, 해. 너 지금 다리 풀려서 혼자선 걷지도 못하는데 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백한은 치영의 반항을 일축시킨 뒤, 관찰실의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러고는 흥얼거리며 걸었다.

걸, 프리티걸, 뭐 이딴 노래였는데 기백한의 덩치와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아 토가 쏠릴 지경이었다.

“닥치든지, 내려놓든지 하십쇼.”

“야식 먹고 가자.”

“…아, 짜증 나.”

치영의 대답에 백한이 피식 웃는 게 느껴졌다.

어째서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다리를 두고 벌리니 오므리니 하는 망언을 일삼는 놈과는 제아무리 산해진미라도 입에 넣고 싶지 않았다.

치영은 격렬하게 버둥거렸다. 그러나 곧이어 골이 띵하게 아파 와 축 늘어져야 했다.

등급이 낮은 가이드들이 무리해서 가이딩을 하면 예의 겪게 되는 빈혈이었다. 현훈이 심하여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것 봐. 얌전히 있으랬지.”

허리가 백한의 팔에 꿰인 채로 들어 올려지느라 젖은 빨랫감처럼 축 처진 탓에 더 그런 듯했다. 삽시에 힘이 빠져나가고 두 눈이 저절로 감겼다.

갑자기 힘이 빠져 늘어지자 백한은 치영을 휙 돌리더니 엉덩이 아래 팔을 받쳐 앞으로 안아 올렸다.

어린애라면 모를까, 다 큰 성인 남자가 번쩍 들려 안겨 있기에는 민망한 자세였다.

어지럼증이 심해져 쇠파이프 같은 그의 쇄골에 이마를 기대면서도 치영은 원망을 멈추지 않았다.

“개새끼……. 나 쪽팔려서 죽으라고 지금……. 나를 쪽팔리게 만들어서 죽이려고…….”

핑핑 도는 머리 때문에 평소라면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 입 밖으로 마구 튀어 나갔다. 제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는 비난도 곁들이고 싶은데,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곤 “개새끼. 소새끼.” 하는 원색적인 욕뿐이었다.

백한이 그런 치영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토닥였다. 킥킥 웃는 목소리였다.

“웃기는 놈이네. 저 힘들까 봐 손수 날라다 드리는데도 욕을 하고 싶으셔요?”

“…엉덩이에서, 손 치워……. 변태 새끼…….”

“아, 닳냐? 조금만 만질게.”

치영은 어지럼증이 가시지를 않아 어쩔 수 없이 그의 쇄골쯤에 이마를 박은 채, 끙끙거리며 계속해서 욕을 내뱉었다.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이 거침없었다.

“미친 하마 새끼, 진짜 싫어…….”

여전히, 욕설이 거름망 없이 입 밖으로 줄줄 새어 나왔다.

기백한이 쯧, 혀를 차며 물었다.

“근데 너 왜 나만 보면 하마니 뭐니 하냐. 그게 무슨 뜻인데.”

“…몰라, 하마……. 콱 뒈져라…….”

“이게 진짜 깜찍하게 구네. 닥치고 좀 있어. 너 얼굴에 밀가루 바른 것 같아. 존나 하얗다니까?”

백한은 치영을 어르며 복도를 걸었다.

밤이 늦어 한산한 편인데도 아예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라, 새벽 훈련을 하는 에스퍼와 가이드 몇몇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중령 계급인 백한을 향해 먼저 경례하는 동안, 치영은 제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써 백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기서 얼굴까지 들키게 된다면 이번에는 ‘안치영이라는 F급 가이드가 기백한 중령에게 몸으로 들이대더라.’ 하는 기가 막힌 소문이 떠돌 것이다.

그러나, 치영의 사정 같은 건 전혀 고려할 줄 모르는 기백한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치영에게 속삭이며 낄낄거렸다.

“아, 자기야. 간지럽게 뭐 하는 짓이야. 왜, 못 참겠어? 급한 김에 차에서, 어떻게, 응? 할까?”

치영은 안간힘을 써서 백한의 가슴팍을 꼬집었다.

피하지방도 없는 탓에 피부밑이 바로 근육층인지라, 탄탄한 근섬유는 치영의 힘 빠진 손아귀에 잡혀 주지 않았다. 그마저도 억울했다.

“알겠어. 보채지 마. 형이 오늘은 준비가 덜 됐는데, 우리 자기 갖고 다니는 거 있니?”

…끝까지 지랄이야.

치영은 그냥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차라리 다시 기절하면 더러운 꼴은 더 안 봐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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