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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41화 (41/114)

41화

뜨거운 열기, 그보다도 습한 기운.

훈련복을 젖게 만드는 습기에는 사실감이 넘쳤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치영의 기억과 학습, 아는 것을 통해 뇌리에서 만들어진 의식의 감옥에 지나지 않았다.

에스퍼의 이능과 과학기술의 접합은 늘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들을 만들어 내고는 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냄에 있어 이다지도 막힘이 없다면, 에스퍼란 진정 인류의 새로운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백한의 잔인하고 몰인정한 부분이 그저 신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어디 있는 거야…….”

그렇게 존재하는 것처럼 푹푹 찌는 열대의 섬의 가운데를 찾아 치영은 내도록 걸어야 했다.

군용 나이프 하나 챙겨 오지 않아 얼굴을 스치는 풀에 벌써 몇 번이나 뺨을 베였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치영은 섬의 정 가운데를 찾아야만 했다. 그래야 그곳에서부터 가이딩 파장을 퍼져 나가게끔 할 수 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고, 훈련이 시작한 지 10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치영은 섬의 중심을 찾아 헤맸다.

치리리—. 치와왕—.

이국의 새 떼들이 우는 소리는 이질적이기만 했다. 저것이 정말 새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 뇌는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길래 저렇게 처음 보는 새를 창조해 냈을까.

겪어 본 적 없는 이국의 습도와 살갗이 에일 정도로 따가운 햇빛까지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환각술사의 환각술도 작용을 한다고 하지만, 모든 거짓말은 1할의 진실에 섞여야 완성되는 것처럼 이 섬도 치영의 기억과 학습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정글의 신비, 뭐 이런 프로에서 봤던 거였나…….’

미디어를 통해 본 기억조차 이렇게 육감에 생생하게 구현해 내다니. 감탄스러운 기술력이었다.

“아, 여기인가…….”

멍하게 걷는 사이 섬의 중심에 도착한 듯했다. GPS를 겸하는 생체시계를 손목에 찬 치영은 시계의 액정을 들여다보며 좌표값을 확인했다.

이곳은 치영의 의식 세계와 일맥상통하고, 그 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가이딩 파장에 기초되어 있다.

따라서 섬의 중심이라는 것은 결국 치영의 가이딩 파장의 골과 마루가 갖고 있는 수학값이 되는 것이다. 훈련에 들어오기 전, 기백한이 치영에게 닿는 것만으로도 바로 알아내었던 바로 그 좌표 말이다.

“하…….”

숨을 좀 돌린 뒤 치영은 바로 정신을 집중했다. 훈련의 개요는 이국 섬 한가운데에 숨은 기백한을 찾아 가이딩하는 것이었다.

이 훈련의 목표는 이국 섬에 숨은 기백한을 섬 한가운데서 찾아 가이딩 하는 것으로,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이국 섬이라고 해도 가상의 섬이고, 기백한을 찾는 것도 실제가 아닌 의식의 섬 위에서 하는 일이지만, 가이딩이 섬 전체를 덮어야 하기 때문에 가이딩량이 작은 치영으로서는 고통스러운 훈련법이었다.

“아…….”

천천히, 고요한 연못에 물방울을 떨어트려 파문이 퍼지는 것처럼, 치영의 파장이 점점 더 늘어났다.

원의 크기는 천천히 커졌다. 처음엔 치영만 하게, 치영의 옆에 서 있던 우람한 나무만 하게, 그 나무의 군락만 하게 퍼지던 것이 밀림의 숲을 천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되네…….”

가이딩 파장이 순조롭게 퍼져나가는 것이 신기했다.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일이었고 몇 번의 시도도 해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된다. 그게 신나 짧게 감탄한 순간이었다.

“아윽—!”

천지가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었다. 그것은 그저 치영의 작은 머리통을 울리는 두통일 뿐이었다.

스스로에게는 천둥이 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돌멩이처럼 작은 파문밖에는 되지 못하는 것. 그것이 고통의 정의니까.

치영은 저밖에 알지 못하는 그 대단한 폭풍을 숨을 삼키며 참아야 했다.

방사 가이딩을 위해 파장을 넓게 개방하면 통증은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것이라, 치영은 이겨 내려 노력하며 다시금 가이딩을 펼쳤다.

“으, 흐으—.”

치영이 고통에 시달리는 순간에도, 기백한은 어디로 간지 모르게 숨어 버렸다. 이곳은 정신의 세계고, 환각술을 다루는 에스퍼가 만들어 낸 허상의 땅인데도 그는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완벽하게 숨기고 있었다.

문득, 깨질 듯한 두통 사이로 오기가 솟았다.

기백한이라는 에스퍼는 치영에게 버겁기만 했다. 아무리 매칭률이 좋아도 그의 등급은 하늘처럼 높기만 했고, 치영은 땅도 아닌 지하 폐기물 처리장 수준이었다.

그 때문에, 치영은 기백한이 저를 5년 동안 버려 둔 것에 대해서 머리로는 백번 이해했다.

자신이 백한이라도 마땅찮은 각인에 화가 났을 것이다. 그렇게 높은 등급의 에스퍼가 가이드 욕심이 없을 리가 있나. 없다고 한다면 속세에 탈을 벗고 열반에 오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치영 역시 원하던 각인이 아니었다. 그와 각인을 나눈다면 보다 감정적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사고처럼 나눠야 할 각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치영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게 백한에게 중요했을까?

그 누구도 대신 십자가를 짊어져 주지 않는데, 고작 저를 위해 백한이 그런 이해심을 발휘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도 오기가 났다. 제 잘못이 아닌데도 마치 네 존재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백한에게 말이다.

…씨발,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 욕을 짓씹은 채, 치영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일어났다.

그는 이 하잘것없는 거짓의 땅 위에서도 마치 실제처럼 온 곳을 누비고 다니는데, 자신은 방사 가이딩 하나 제대로 개방을 못 하여 두통에 절절매는 꼴이 우습기만 했다.

전투 가이딩의 시작은 방사 가이딩으로 넓은 원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가이딩 파장 안에 여러 에스퍼들을 두고, 그 에스퍼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 오는지를 파장으로부터 판가름하는 것이다.

치영은 천천히 자신의 파장 범위를 넓혔다. 치영을 중심으로 한 방사 가이딩 원이 점점 넓어지다가 어느새 섬의 반 정도를 덮었다.

반, 또 그 반을 넘어. 치영은 결국 그 의식 위에 떠 있는 섬을 전체적으로 에워싸는 데 성공했다.

물론 충분치 않은 가이딩 때문에 부작용을 감내하며 말이다.

“헉, 우윽—!”

헛구역질이 나왔다. 눈이 까뒤집힐 것 같은 충격이 두개골을 강타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으려던 순간이었다. 땅이 점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제가 머리부터 꼬라박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치영의 허리를 낚아챘다.

단단한 팔, 목련과 자작, 머스크 향이 섞인 익숙한 냄새. 치영보다 훨씬 높은 체온의 몸.

“우리 모지리 또 쓰러질 뻔했어요?”

거기에 다정하게 긁는 말투까지. 기백한이었다. 치영은 흐려지는 시야에도 그를 거부했다.

“이거, 놔요…….”

“응, 그래. 미인이 좀 튕기고 그래야 매력 있지.”

치영은 단단한 그의 품에 끌어 안겨진 채로 웩웩대다가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기백한은 되지도 않는 반항을 한다는 듯 허리에 둘렀던 팔을 더욱더 조여 왔다.

그에게 있어 치영의 버둥거림 정도는 어린애가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는 미약한 반항이었다. 치영은 그의 품 안으로 더욱더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넓어진 파장은 계속해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치영이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까.

손을 빠져나간 가이딩의 파장이 웬일로 치영의 말을 아주 잘 듣고 있었다. 손끝이 찌릿거렸다. 아파 죽겠는데도 고양감이 들었다. 이 사이로 구토감을 눌러 죽였다.

원이 좁혀지지 않도록 애를 쓰느라 치영의 골이 수박처럼 쩍 갈라질 것만 같았다.

치영의 허리를 팔로 감아 마치 정장 상의를 팔에 걸치고 있는 것처럼 가볍게 들고 있던 백한이 혀를 찼다.

“쯧, 밥을 새 모이만큼 처먹으니 골 빈 것처럼 가볍지. 넌 내가 손가락으로도 들 수 있을걸.”

“…까.”

“뭐? 뭘 까? 자기 미쳤구나. 여기 훈련실이야. 다 모니터링되고 있는데 이런 데서 할 거 다 하고 싶은가 보지? 보기 보다 밝힌다니까.”

“우욱.”

치영은 대답 대신 헛구역질을 했다. 그 와중에도 중지만 추켜든 것을 보며 기백한이 픽 웃었다.

“이걸 진짜 쪽 빨아먹을 수도 없고. 야, 나 아직 너 짜증 나거든.”

“…….”

어쩌라는 거냐고 묻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야가 흔들렸다. 누군가 드릴을 관자놀이에 대고 골을 파 대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기백한은 빌어먹을 주둥이를 멈추지 않았다.

“요즘 부쩍 수상한 거 다 봐주고 있으니까 적당히 까불어. 예쁘면 다냐? 얼굴값 하는 것들 딱 질색이다. 잘하자, 치영아.”

예쁘긴, 씨발. 욕이 나왔다.

이 새끼를 밀어내고 혼자 힘으로 서고 싶었는데, 다리고 허리고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빠져나간 가이딩 때문이다.

체내에 가이딩 잔존량이 얼마 되지 않는 가이드들은 코마 상태에 빠진다. 잘못하면 식물인간으로의 뉴라이프를 열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도 발끝부터 희열이 몰려왔다. 파장을 넓히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저 원수 하마 새끼가 냄새를 맡고 득달같이 달려왔을 리가 없다.

“윽, 후욱—!”

치영은 다시 한번 웩웩거렸다. 나오는 것 없이 눈이 까뒤집어지려는 것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다.

백한이 그런 치영의 뒤통수를 아프지 않게 툭툭 두들겼다.

“어휴, 그래. 자라 얼른.”

“서, 성공…….”

“그래요, 안 소위님. 성공하셨어요. 가이딩 양도 좆만 한데 그걸 이렇게 늘려 놨네. 꽤 대견해.”

하, 성공했어. 치영은 속이 시원했다.

백한의 등은 커다랗기만 했고, 그를 쫓아가는 것은 버겁고 힘겨운 길이었다.

그래서 치영은 도중부터 활로를 틀었다. 자신은 굳이 기백한의 뒤를 쫓아갈 필요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나도 내 길이 있고 내 인생이 있어. 네가 없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속이 작살 맞은 고기처럼 뒤집히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리고, 상대가 없어 불편한 쪽은 오히려 백한일 것이다. 5년간 수없이 뿌려 대었던 가이드와의 염문설 중에도 각인을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 가이드와의 상성이 치영보다 더욱 잘 맞는다면 희박한 확률로나마 치영과의 각인을 제거할 수도 있는데, 그런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자신은 백한이 없어지면 마음만 편하겠지만, 상대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치영은 속으로나마 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 치영의 생각을 읽지 못한 것인지, 백한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치영의 성공이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치영은 노력한 결과물에 대한 만족감을 욕심 많은 하마가 독식하려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그 때문에 정신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내가 성공한……. 하마 새끼, 꺼져…….”

“얘 뭐라니.”

어디선가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훈련을 종료합니다. 유저들은 의식의 섬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두 눈을 감아 주십시오.

백한은 치영을 들어 올려 아이를 안듯이 껴안고는 고개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와 닿은 것이 짜증 나지만, 밀어낼 힘이 없었다.

백한이 그런 치영의 등을 쓸어 주며 말했다. 꽤 다정한 음색이었다.

“들었지. 두 눈 꼭 감고 있어. 집에 가자.”

집.

치영은 그 단어를 입안에서만 중얼거려 보았다.

집이라고. 자신에게는 집이 없는데.

어쩐지 그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집이 생긴 기분이라, 치영은 열없이 흐려지는 의식을 다시 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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