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40화 (40/114)

40화

“이리 와서 서.”

백한은 치영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머리에 리본을 매단 우스꽝스러운 모습임에도 일에 집중한 얼굴은 또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처럼 보인다.

벼려 낸 듯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치영은 속으로나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지만, 치영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나마의 감상도 ‘그러든지’가 다였다.

하도 변덕스러워서 맞춰 주기도 어려울뿐더러, 지난 몇 주간 이상할 정도로 달라붙었던 게 이상한 것이지. 원래 기백한과 제 사이는 딱 이 정도의 거리감이었다.

때문에 치영은 아무런 반항 없이 백한의 앞에 섰다. 조용히 다가온 치영의 어깨 위로 백한이 가만히 손을 올렸다.

“대대장님이 작전처장실 집기들을 모두 박살 내 놨다고 하시던데, 뭐 집히는 거 있습니까?”

박형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치영은 어쨌거나 사실관계에 대해 명확히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생각했다.

그래서 백연에게 물었다. 박형인의 말이 사실이냐고.

“그래. 손 처장의 집무실이 저놈 손에 개박살이 났다. 왜 그런 난리를 쳐 놨는지 본관도 모른다. 저놈이 자네를 여기 부른 거 보면 자네 때문인 것도 같기도 하고.”

백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원체 표정이 없는 타입인지라, 그것만으로도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손 처장이 하극상 명목으로 저 자식을 헌병에 넘기겠다는 걸 위에서 쉬쉬하며 막은 모양인데, 그렇다고 위에서 기백한을 마냥 예뻐하는 건 아니다. 저놈과 나는 위든 아래든 적이 많은 편이니까.”

그녀는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치영의 등을 퍽 쳤다. 나름으로 격려하는 것 같은데, 힘이 워낙 좋은 탓에 치영은 반동으로 앞으로 두 발자국이나 밀려났다.

백연은 그런 치영을 조금 머쓱하게 바라보더니 밥 좀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녀의 잔소리에 대충 대답하며 치영은 생각에 빠졌다.

처장실은 왜 부숴 놨을까? 치영은 그가 뜬금없이 성질을 그쪽에 터트려 놓은 것이 신경 쓰였다.

하마 새끼가 남의 집구석에서 성질을 부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또 이유도 없이 부린 패악에 휘둘리고 싶지도 않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알고 그런 건지, 현관 앞에서 받았던 전화가 어떤 내용이었기에 그런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작전처장실에는 무슨 볼일이 있으셨습니까?”

치영의 어깨에 손을 올려 둔 채로 훈련실의 좌표를 조정하고 있던 기백한의 미간에 금이 갔다.

그는 서늘한 눈으로 치영을 내려다보았다. 기세가 험악했다. 죽이기가 귀찮아 놔 준 하룻강아지가 눈앞에서 깔짝거리는 것을 본 맹수의 귀찮음이 묻어 있기도 했다.

이걸 삶아 죽일까, 말려 죽일까 고민하는 것 같은 눈빛. 그러나 치영은 그런 백한을 흘끗 보고 말았다.

백한이 으득 턱을 갈더니 말했다.

“입 다물고 있어. 기분 좆같은 거 참고 있으니까.”

그러더니 다시금 입매를 굳히고는 다시 좌표를 조정했다. 치영은 덤덤하게 ‘참을 줄도 안단 말이야?’ 하고 생각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기백한은 말없이 훈련실 설정에 집중했다.

훈련 센터 내에서 훈련할 때는 증강 현실을 이용하게 된다. 그 안에 들어가면 환각술 이능을 가진 에스퍼 스무 명과 증강 현실 구축 엔지니어들이 합작하여 심혈을 기울인 가상 공간이 펼쳐진다.

에스퍼들의 환각술 이능은 훈련실에 들어간 에스퍼와 가이드로 하여금 몸 하나 움직이지 않고 모든 훈련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준다. 마치 환각에 빠진 듯이 말이다.

그들은 엔지니어들이 프로그래밍한 증강 현실을 실제로 보이게끔 만듦과 동시에, 훈련을 하는 사람이 느껴지는 모든 감각을 진짜라고 여기게 만든다.

때문에 좁은 훈련실 내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뇌 영역을 이용한 훈련이 가능하다.

좌표 조정은 훈련 대상자인 에스퍼 혹은 가이드 파장값에 맞춘다. 에스퍼와 가이드에게서 나오는 파장을 수치화하여 주파수의 평균값을 정해 입력하면, 그것이 대상자의 좌표값이 되는 것이다.

기백한은 치영의 어깨 위에 손을 댄 채 손목에 찬 생체시계로 제게 늘어나는 가이딩 양을 측정해, 파장을 수치화시켰다.

느껴지는 파장을 수치화시키는 데는 꽤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또한 에스퍼가 상대 가이드로부터 가이딩을 오래, 지속적으로 공여받아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 각인을 맺은 지 오래된 에스퍼, 가이드 페어도 쉽게 할 수 없다.

치영은 백한이 그것을 손쉽게 해내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그와 저 사이엔 그만큼 시간도, 경험도, 신뢰도 없는데 너무도 간단하게 좌표를 조정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부러 말을 걸지 않았겠지만, 알아내야 할 것이 있기에 치영은 다시 물었다.

“손 처장이랑은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으십니까.”

“안 좋아 보여? 아닌데. 나 그 새끼랑 사이 존나 좋은데.”

기백한은 무표정하게 대답하고는 좌표 입력을 끝냈는지 치영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찬바람이 부는 것이, 몇 시간 전에 엉겨 붙던 태도와는 결이 달랐다. 치영은 저를 지나쳐 훈련실 벽에 붙어 있는 서랍장으로 다가간 백한을 흘끗 보다가 제 생각을 내뱉었다.

“제가 중령님 앞날에 방해가 됩니까?”

“…뭐?”

훈련에 사용되는 버추얼 고글을 세팅 중이던 기백한이 고개를 돌려 치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줄은 알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특히 더 그랬나 봅니다.”

“아 씨발, 말 한번 참 예쁘게 하네.”

백한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치영은 그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은 늘 화를 내는 것도 쉽고, 나를 무시하는 것도 쉽기만 하네. 그럼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치영은 백한에게 다가가 그의 발치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한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먼저 다가오는 치영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뭔가에 홀린 듯 치영의 두 눈을 피하지 않았다.

원래도 시선을 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건 그가 능동적인 인간이기에 그런 것이었다.

지금의 시선은 조금 더 피동적이었다. 마치 자의로는 치영의 두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치영은 그 느낌을 무시하며 말했다.

“손 처장이 저에 대해서 뭐라고 말이라도 했습니까?”

백한이 화를 참듯 이를 갈며 말했다.

“조용히 그냥 있자. 아님 뭐, 입술이라도 빨아 줘? 그럼 입 좀 다물래?”

변태 같은 새끼. 치영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더 개겨 봤자 좋을 게 없다. 늘 그랬듯이,

기백한은 오늘도 치영이 원하는 대답은 해 주지 않을 테니, 굳이 설전으로 기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저 반응을 보아하니 대충 알 것도 같고.

치영은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생각했는지 치영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로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일반인들은 모르는 에스퍼의 영역, 이능력의 발현이었다.

스파크의 색이 다앙했다. 이는 훈련 프로그램이 가동되었음을 의미한다.

우웅— 하는 기계음과 함께 훈련실 내부 조명이 꺼졌다. 곧이어 실내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10cm 두께의 벽 너머에 관찰실이 있다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진한 어둠이었다.

관찰실에 있는 백연은 매직미러를 통해 이곳을 볼 수 있겠지만, 치영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검어 밤하늘과 차이가 없는 호수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치영은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음과 다름없는 감각에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시각이 차단되자, 모든 감각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옅은 목련 향이 났다. 기백한의 에스퍼 향수 냄새였다.

치영은 그가 지척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절로 온몸에 솜털이 주뼛 섰다. 가이딩이 새어 나가는 미세한 감각이 느껴졌다.

등 뒤에 벽 같은 것이 닿았다. 그러나 곧 그 벽에 붙은 치영의 뒤통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느낌에 그것이 기백한의 단단한 가슴팍임을 깨달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가 소리를 낼 때마다 맞닿은 흉통에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치영은 그의 목소리를 감각으로도, 귀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눈 감아.”

치영은 반항하지 않고 두 눈을 감았다. 시스템의 안내 음성이 훈련실을 메웠다. 귀로 들린다기보다는 온몸을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에스퍼 가이드 훈련 프로토콜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안내할 라돈입니다.

맑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어조에 감정이 없어 인간의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라돈이라는 이름이 원소의 기호에서 따온 것인지 아니면 신화 속 반신반인의 열두 가지 과업 중 하나였던 괴물을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 이름이 신화 속 괴물의 것이라면, 그 괴물은 백 개의 눈과 백 개의 머리, 백 개의 목소리를 갖고 있으니 유저인 에스퍼와 가이드에 따라 수만 가지의 훈련 방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과 꽤 잘 어울렸다.

—유저들은 이제 두 눈을 뜨시면 됩니다.

여전히 맑은 음성이 다시 치영의 온몸을 울렸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귓가에 입술을 붙인 기백한이 속삭였다.

“방사 가이딩, 시작해.”

그 말이 치영을 뒤흔들었다.

꼬리뼈부터 타고 올라온 어떤 감각이 뇌수를 타고 중추신경계를 달궜다. 치영은 읏, 하는 신음과 함께 저도 모르게 무언가를 개방했다.

그리고 눈을 뜨자,

치리리—.

새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느덧 치영은 이국 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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