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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39화 (39/114)

39화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두 눈을 가늘게 떴으나,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 형체가 사라졌다.

“…뭐지.”

분명 뭔가를 본 것 같은데 금세 사라져 버린 것이 이상했다. 치영은 더 이상 애쓰지 않은 채로 느릿하게 걸었다.

그것도 잠이라고, 눈을 잠깐 붙인 것만으로도 심신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이 느껴졌다. 아까까지는 아예 생각 자체를 거부하던 머리도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백한이 받은 전화, 무슨 내용이었을까…….’

확실히 반응이 이상했다.

말만 들으면 대단치 않은 제 계획을 치영이 방해해 열이 받은 듯한데, 치영으로서는 애꿎은 시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동안 친한 척하던 건 다 때려치웠나 보지? 언제 들러붙었냐는 듯이 태도를 바꾼 것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몇 년 전 그때처럼, 치영의 존재가 저의 발목을 잡는다는 듯한 눈빛을 하는 것이 어이없었다.

가만히 당하는 이쪽이야말로 열불이 치솟는다는 것도 모르고. …이기적인 하마 새끼. 치영은 그때부터 속으로만 기백한에 대해 장황한 욕을 늘어놓으며 걸었다.

‘저 꼴리는 대로 사는 게 열 받는다.’부터 시작된 욕이 급기야 ‘얼굴 믿고 잘난 척한다.’까지 갔을 무렵이었다.

멀게 느껴지던 복도가 끝났다. 아까 본 것이 헛것이라고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이 복도 끝에는 아무도 없었다.

치영은 그대로 오른편으로 꺾어 소훈련실의 문을 열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사람이 뒤돌아 서 있었다. 그러나 아까 복도 끄트머리에서 본 형체는 그보다 훨씬 컸다.

치영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상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더니 아는 척을 했다.

“안치영이.”

“…안녕하십니까, 소령님.”

기백연이었다. 치영 역시 경례했다. 백연은 표정 없는 얼굴로 쉬라는 듯 손짓했다.

소훈련실은 매직미러로 관찰실과 실제 훈련실이 나누어져 있었다. 관찰실에는 그녀뿐이었다. 치영은 시선을 매직미러 쪽으로 돌렸다.

훈련실에는 기백한이 있었다. 백연은 그런 백한에게서 시선을 돌려 치영을 향해 말했다.

“보아하니 그냥 끌려 나왔나 보군. 자네도 저 자식이 왜 또 지랄인지 모를 것 같기는 했다.”

백연은 퇴근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직 치료복을 입고 있는 치영을 보며 느닷없이 끌려 나왔을 것이라 짐작한 듯했다. 치영은 동조의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본관도 모른다. 저 자식이 불러서 온 건데……. 자네한테 전투 가이딩을 훈련시키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천천히 시작하라더니 오늘은 또 갑자기 불렀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놈 옆에 있느라 안 소위 고생이 많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쌍둥이 형제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투였다. 치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 타러 간다고 들었는데 실내 훈련을 하려는 모양이다.

치영은 매직미러 안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백한을 바라보았다.

파병 나간 동안 자르지 못하고 길렀던 머리는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길게 내려온 앞머리를 어디서 주워 온 것인지 모를 리본핀으로 고정시켜 놓은 모양새가 어이없었다.

성인 남성이, 그것도 키가 웬만한 문짝만 한 인간이 어린아이나 꽂고 다닐 법한 유치한 디자인의 리본핀으로 앞머리를 긁어모아 고정시키다니.

더 짜증 나는 것은 그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선이 유려하고 반듯한 이마를 드러나게 하는 바람에, 나름 어울린다는 데 있었다.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백한은 그런 핀을 머리에 꽂고도 지상 위에 호적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훈련실 안쪽을 감싸고 있는 이능 제어 마감제가 아니었다면, 끓어 넘칠 것 같은 에스퍼 파장이 이쪽 관찰실까지 넘어왔을 것이다.

기백한은 무언가 대단히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다. 너울 치는 것 같던 파장이 점차 줄어들더니, 백한의 피부 위로 견고한 장벽을 만들어 내듯 달라붙었다.

파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갑옷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저게 가능한 일입니까?”

“글쎄. 저따위 짓을 시도하는 건 저놈뿐이긴 하다.”

치영의 물음에 백연 역시 표정 없이 대꾸했다.

그녀 또한 고등급의 에스퍼고, 센터 내의 유일무이한 에스퍼이자 가이드지만 저런 괴물 같은 짓거리는 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치영은 그녀의 무표정에서 그 뜻을 읽고도 믿을 수 없었지만 이내 수긍했다.

…하긴, 하마가 강해야지. 그저 성질만 더럽다면 하마라는 별명 대신 말티즈라 불렀을 것이다.

치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관찰실 내 스피커를 통해 기백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치영. 안으로 들어와.

그 소리에 치영이 짧게 한숨을 쉬며 백연을 바라보았다. 백연이 그를 흘끗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 자식, 자신이 온 건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다. 분명 매직미러라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다.

치영은 느린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훈련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숨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기백한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치영을 바라보지도 않고 끼고 있던 전술 장갑의 벨크로를 풀더니 다시금 꽉 조여 맸다.

치영은 훈련실의 문을 닫고 왜 불렀냐는 식으로 멀거니 서 있었다. 기백한은 여전히 치영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뭐야. 옷 안 갈아입었어?”

“아…….”

“나가서 기백연한테 옷 달라고 해.”

내내 저를 보지 않는 줄 알았는데 옷을 갈아입지 않은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귀찮은 표정을 짓자, 백한은 치영을 무표정으로 응시했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에 치영은 질린 표정으로 다시금 등을 돌렸다.

평소처럼 이죽거리며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닌 데다가, 이쪽을 보는 눈빛엔 무기질을 바라보듯 감정이 없었다.

전이라면 그의 바뀐 기색에 전전긍긍했겠지만, 치영은 등을 돌려 훈련실을 나갔다. 그의 태도가 왜 또 변해 버린 것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알 게 뭐야.’

치영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백한이 뭘 하든 궁금하지가 않았다. 다리를 잘 벌리고 다닌다며 모욕을 줬을 때도 그 당시에만 열이 받았지, 그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저 ‘내 신세는 왜 이렇게 거지 같을까.’ 하는 한탄 때문에 무기력해졌을 뿐.

소중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상처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치영에게 기백한은 소중하지가 않았다.

그저 그에게 가 있는 제 마음이 그대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언제나 돌아오려나.

저쪽으로 간 뒤에는 늘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치영에게는 소중한 마음이다.

덩달아 표정이 굳은 채로 바로 훈련실을 나오는 치영을 보며 백연이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더니 아, 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훈련복 안 입었다고 뭐라 한 모양이지. 음, 이걸로 갈아입고 오면 된다.”

“감사합니다.”

백연이 내민 것은 검은색 점프슈트였다. 훈련용으로도, 작전용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백한 역시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치영은 얌전히 옷을 받아 들고는 관찰실을 나선 뒤 탈의실을 찾았다. 훈련 센터에는 으레 샤워실이 있으니, 거기에 딸린 탈의실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표지판을 따라 복도를 돌던 때였다.

“…아, 그럼 그게 진짜래?”

“응. 춘란대 팀장님이 가이드 새로 뽑는다는 말이 있더라고.”

멈칫. 치영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치영의 사각지대 쪽에서 에스퍼 두 명이 노가리를 까고 있었다.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두 사람 중 일회용 종이컵을 들고 있는 에스퍼가 말했다.

“그거 때문에 지금 각 팀장들 자기네 가이드 단속하려고 난리야. 다 춘란 보내 달라고 징징거린단다.”

“깝 싸네. 보내 주면 지들이 갈 수나 있고? 거기 들어가려면 최소 A급 이상은 돼야 하는데?”

“몰라. 걔 누구지? 안치영인가 밖치영인가 걔도 D등급이잖아.”

D가 아니라 F다, 개자식들아. 치영은 혀로 볼 안쪽 살을 밀어내며 생각했다.

치영이 듣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다른 에스퍼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근데 걔가 왜.”

“걔가 지금 춘란대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던데.”

“뭐? D등급이? 말이 되냐?”

F라니까. 치영은 무감하게 생각했다.

“모르지 뭐, 씨—. 걔가 기백한 사탕 껍질이잖아. 낙하산 태워 줬을 수도 있지. 암튼 그것 때문에 전국의 가이드들 다 헛꿈 꾸는 거 아냐. D도 들어가는 춘란대, 나도 들여보내 달라! 뭐 이거지.”

“와, 씨. 오바마네.”

“어이없네. 오바마가 뭐냐.”

에스퍼들은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낄낄거리다가 곧 발걸음을 돌렸다.

종이컵을 들고 있던 놈이 복도에 배치된 쓰레기통에 다 먹은 종이컵을 구겨 3점슛을 날리듯 골인시키려다가 실패했는지, 무언가 튕겨 나가는 소리가 났다.

그것도 못 넣냐 타박하며 낄낄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치영은 아까보다 조금 더 침잠한 얼굴을 했다.

“…뭐.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치영은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훈련이니 뭐니 한답시고 설쳐 댔던 것도, 저를 춘란의 숙소에 들였던 것도, 지난 몇 년간 그의 옆에서 기백한 전용 사탕 껍질로서 버틴 것에 대한 위자료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너를 춘란에 받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하며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기백한 개못됐네.”

치영은 중얼거리면서 에스퍼들이 사라진 반대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몇 걸음 앞에 탈의실이라고 적힌 문이 보였다. 치영은 착실하게 걸음을 옮겼다.

저도 완전히 넋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러나 마음의 상처라는 것은 아무리 대비를 한다 해도 그 내상을 아예 피해 갈 수는 없는 법이다.

“한 대만 패고 싶다.”

한 대만 때리고 싶었다. 저를 못살게 굴었던 것, 저 혼자 착각해서 치영을 천국에 데려다 놓은 주제에 이곳은 네 집이 아니라며 갑자기 발로 차 지옥으로 떨어트렸던 것.

모두 합하여 딱 한 대만 때리고 모두 잊고 싶었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

그러나 불가능하겠지.

치영은 소리 없이 탈의실의 문을 열었다.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괴롭다는 걸, 치영은 너무 빨리 깨달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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