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조신하게 기다리면 알아서 박아 줄 텐데, 그새를 못 참고 여기저기 흘리고 다녔다는 소리를 내가 꼭 다른 데서 듣게 만들지.”
“…지금 무슨.”
전화를 끊은 백한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현관의 센서 등이 치영의 움찔거림을 그대로 비췄다.
치영은 입술을 달싹였다. 백한의 말은 어조와 어투가 모욕적이기 그지없었다.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치영의 다리 사이로 군홧발을 들이밀었다. 놀란 치영이 다리를 벌리자, 백한이 피식 웃었다.
“잘 벌리는 게 습관인 것 같아서 영 불안한데.”
치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백한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말 좀 가려서…….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데도, 한참을 답이 없다.
백한은 그 눈빛에 담긴 살기가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치영을 내려다보았다.
꽤 오랜만에 마주하는 각인 에스퍼의 경멸 어린 시선이었다.
“내가 계획이 좀 있었거든?”
“…….”
“근데 네가 또 그걸 망가트려 놓네.”
“…….”
기백한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한동안 치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은 치영의 귓불이나 뺨을 훑기도 하고, 앞섶이 느슨한 치료복 상의의 안쪽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치영아, 어떨 것 같아.”
“…….”
“거슬리는 게 있어서 치워 버리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면.”
“…….”
백한은 더 말을 잇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치영은 그 뒷모습을 보면서 멍한 정신을 다스리려 애를 써야 했다.
멀쩡히 일하던 사람을 여기까지 끌고 와서 애먼 짓을 해 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저따위라니.
“…이거나 먹어라.”
현관문이 다 닫히기 전에, 치영은 빠르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려 백한의 뒤에 대고 손가락 욕을 했다.
귀가 밝은 에스퍼니 욕하는 제 말이 들렸을 텐데, 백한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대로 멀어졌다.
결국 타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치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가방도 두고 왔는데…….”
가이딩실에서 납치당하듯이 끌려 온 터라 짐을 들고 오지 못했다. 치영은 끙, 하고 앓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로가 치영의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절벽에 매달려 아등바등 버티다가도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포기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치영이 겪고 있는 것은 그런 피로였다.
행복해 본 적이 없으니 꼭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구도 없었다. 가져 봤어야 뭐가 좋은지 알 것 아닌가.
이 상태에서 더 나아지고 싶다는 열망도 없는 삶에 대한 권태가 치영이 나약해진 틈을 타 그의 몸을 짓눌렀다.
지겹고 지치고 무기력하기까지 했다. 치영은 멍한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우울증 약 먹어야 하는데……. 제 방에 약이 있음에도 가지러 올라갈 수가 없었다.
온갖 힘을 다해 싸웠는데 혼자 살아남아 적군 천 명을 눈앞에 둔 패잔병처럼, 치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이 상태로 두면 위험해질 걸 아는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띡,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의 센서 등이 또 한 번 꺼졌다.
끈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치영도 그냥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이대로 암흑에 잠겨 들고 싶었다.
* * *
“요즘은 어떠냐고요? 그냥… 모르겠어요. 똑같은 것 같은데. 근데 왜 우울증은 의가사제대가 안 돼요? …가이드만 안 된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똑같이 아픈데 왜 가이드만…….”
“안 소위.”
“에스퍼는 우울증 걸리면 사고 낼 위험이 있어서 제대가 가능하다니……. 가이드가 총 훔쳐서 다 쏴 죽이고 자살하면요? 그래도요? 그래도 제대가 안 돼요? 군법이 무슨 이런 개 같은…….”
“안 소위!”
허억, 치영은 숨을 삼키며 일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척척했다.
처음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때 꿈을 꿨다. 군의관은 형식적으로 몇 마디를 한 뒤 치영의 의가사제대를 반려했다.
가이드들도 정신병력이 있으면 제대시킨다. 그저 자신이 가이드이기 이전에 기백한의 각인 가이드이기 때문에 반려된 제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치영은 억울했다. 이 관계에서 늘 저만 피해 보는 것같이 구는 기백한이 미워 죽여 버리고 싶었다.
“아니, 왜 현관에서 자고 있어요. 어디 아파요?”
허인나가 치영을 일으키며 말했다.
춘란의 에스퍼들은 귀가하자마자 현관에 쓰러지듯 누워서 자는 치영을 발견하곤 누워 있는 그를 둘러싼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치영은 멍한 정신을 깨우려 애쓰며 두 눈을 연신 깜빡였지만, 쉽사리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치영을 보며 김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소위 힘들어 보이는데 대대장님한테 오늘은 그냥 접자고 하면 안 되나?”
“…우리 말을 듣는 분이어야지.”
박형인이 마땅찮다는 듯이 혀를 쯧 차며 대꾸했다.
뭔 소리지……. 치영은 계속해서 정신을 차리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사이, 허인나가 술술 상황을 설명했다.
“대대장님이 오늘부터 안 소위님 전투 가이드 훈련 실시한다고 해서요……. 지금 그쪽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이요?”
기백한이 그 난리를 쳤던 것이 퇴근 시간 즈음이었는데, 제가 잠들었다 깼으니 시간이 못해도 한 시간은 지났을 것이다.
근데 이런 시간에 훈련을 하라니. 치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쭉 빼고 현관 밖을 쳐다보았다. 현관문의 맨 위편에 달린 장식용 유리를 통하여 바깥이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야간 훈련이라고 합니다.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안 소위님.”
박형인이 그런 말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라는 듯이 말했다.
현관에서 쓰러지듯 잠들었다 일어난 치영은 누가 봐도 몹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 시간에 훈련 소식을 전하자니 민망한 듯했다.
게다가 치영은 고작 며칠 전만 해도 훈련하다 쓰러져 병동에 들어갔다 나온 이가 아니던가.
치영은 박형인의 말을 듣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가지가지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치영은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고는 마른세수를 한 뒤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레 일어선 탓에 현훈이 일었다. 시야가 하얗게 번져 치영은 가만 선 채 그 자리에서 멍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에스퍼들이 그런 치영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런 얼굴이지 싶었는데 이인교가 망설이다 입을 떼었다.
“…소위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십니다.”
“아…….”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한번 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고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인 뒤 현관을 나섰다.
박형인이 그런 치영을 앞질러 가더니, 앞마당에 주차되어 있던 험비의 보조석 문을 열어 주고는 반대편 운전석에 올라탔다.
“타십쇼.”
“…네. 감사합니다.”
치영은 천천히 보조석에 올라탔다. 문을 닫고 창밖을 보니 에스퍼들이 아까와 같은 얼굴로 현관에서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박형인이 험비의 시동을 걸고 기어를 변속하며 물었다.
“대대장님이 작전처장실 집기들을 모두 박살 내 놨다고 하시던데, 뭐 집히는 거 있습니까?”
“…없습니다.”
험비가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출발했다. 박형인은 치영의 말을 그대로 믿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더 질문하지는 않았다.
개 같은 성격의 상사를 모시면서도 다정한 구석이 있는 박형인은 그 뒤로 동쪽 훈련 센터에 도착하기 전까지 치영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고 조용히 운전에 집중했다.
치영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어느새 훈련 센터의 거대한 돔이 보였다.
“오늘 바로 산 탄다고 들었습니다. 훈련복은 안쪽에 마련되어 있을 겁니다. …안색이 점점 별론데. 괜찮겠습니까, 안 소위?”
“네, 괜찮습니다.”
치영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험비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차가 멈추자, 치영은 바로 차에서 내렸다. 험비의 엔진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센터 내 어디든 대낮처럼 환하게 가로등이 켜져 있는데도, 훈련 센터 주변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워 보였다.
쌀쌀한 저녁 공기가 치영의 살갗을 긁어 댔다. 그제야 제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가이딩실에서 입고 온 치료복 차림 그대로였다. 뭐라도 입고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위님 감사합니다.”
“적당히 하시다가 힘들면 대대장님께 말씀드리세요.”
박형인은 어린 동생을 배웅하듯이 운전석에서 내려 졸졸 쫓아왔다. 덩치가 큰 에스퍼가 쫓아오며 이런저런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 이상해 흘끗 그를 본 치영은 별다른 대답 하지 않고 훈련 센터 문을 열었다.
박형인은 끝까지 잘 다녀오라며 등 뒤에서 소리쳤다. 치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그대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복도는 한산했다. 요즘에는 형광등을 천장에 매입하여 짓는데, 꽤 구식 건물이라 그런지 기다란 형광등 갓이 천장에 전선으로 연결되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연병장과 훈련실로 통하는 복도는 길고 폭이 좁았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음에도 복도가 긴 탓에 끝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
몇 걸음 더 걷던 치영은 복도 끄트머리에 어렴풋이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 멀리서도 그 풍채가 가늠이 되었지만, 워낙 멀리 있어 얼굴은 알 수가 없었다.
치영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