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37화 (37/114)

37화

수박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는데 어떻게 수박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수 있다는 말인가.

“무, 무슨…….”

정말 골이 쪼개졌을까 봐 놀란 치영은 뒤를 돌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이 성가신지, 백한이 치영의 엉덩이를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놀란 치영의 허리가 움찔 튀어 올랐다.

“내 앞에서 외간 에스퍼 새끼 편도 들고. 다 컸다, 안치영이.”

“…이거, 놔,”

치영은 이를 아득 깨물며 대답했다. 대체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들었다가 옮겼다가 아주 제멋대로 갖고 노는 꼴이 짜증 났다.

그러나 치영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치영을 짊어지고 있는 백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치영의 허벅지를 단단하게 움켜쥔 팔뚝에 힘을 주어 더 조여 올 뿐이었다. 허벅지가 터질 정도로 아픈 탓에 치영은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일단 자리 좀 옮기고. 가만히 계십쇼, 안 소위님.”

가벼운 어조에도 불구하고 목소리 자체는 처참했다. 목구멍을 긁고 겨우 빠져나온 짐승의 그르렁거림 같은 목소리였다.

백한은 그대로 걸어 가이딩실을 나섰다. 바깥의 공기가 먼저 느껴지고, 뒤집힌 시야로 노을이 보였다.

치영은 불쑥, 소름이 끼쳤다. 목덜미부터 꼬리뼈까지 주룩 내달리는 소름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백한에게 닿아 있는 부분부터 번지는 간지러운 감각에 미칠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올 것 같은 순간이었다.

“…가만히, 좀.”

턱을 악다물고 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발끝부터 열기가 치솟았다.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곤혹스러웠다.

이름 모르는 에스퍼가 자신에게 가이딩을 조르고, 백한이 그런 에스퍼에게 위협적으로 에스퍼 파장을 방사하고, 그다음에 저는…….

혼란스러웠다. 몸에 닿은 것은 물론이고, 닿지 않은 것까지 모두 예민하게 느껴졌다.

치영이 저도 모르게 백한의 어깨 위에서 바르작거렸을 때였다.

백한이 욕을 눌러 삼키는 듯하더니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야산에서도 이런 식으로 짐짝처럼 들렸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도 백한이 무식한 속도로 달리는 것을 견디느라 토기를 참을 수 없었던 게 떠올랐다.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어디를 가는 건가 했더니 숙소가 있는 난슬동 방향이었다. 센터 내를 달리는 험비나 가이드들을 태운 카트와 맞먹는 속도였다.

치영은 멀미가 났다. 아까까지는 감각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저 멀미만 났다. 꼭 작은 배에 올라타 몰려오는 풍랑을 견디는 기분이었다.

“미친, 놈아악……!”

욕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반고리관의 림프액이 제멋대로 돌다가 멈춘 탓에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틀렸어. 더는 견딜 수 없어. 이 새끼 등에라도 토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철제로 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기어코 춘란의 숙소까지 뛰어온 것이다.

백한은 치영을 현관 바닥에 내려 두고는 헉헉거렸다. 치영은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망연하게 두 눈만 깜빡였다.

미친, 미친 새끼 아니야……?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현관문이 백한의 등 뒤로 닫혔다. 나름 두꺼운 철로 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치영은 멍하니 백한을 올려다보았다. 현관의 센서 등이 그의 위에서 반짝 켜졌다.

곧은 눈썹뼈 때문에 음영이 진 터라 백한의 두 눈이 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아직 퇴근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숙소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 적막 속에서, 치영은 백한의 어깨 위에 들어 올려졌을 때 느꼈던 감각에 대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백한의 파장이 그걸 원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

“…….”

백한은 드물게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느낌이기도 했다.

치영은 두 눈을 깜빡였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가 저를 보는 그의 시선에 온몸이 간지러웠다.

백한은 이윽고 몸을 내리더니 치영의 턱 아래를 검지로 토옥 밀어 올렸다. 닿은 곳에서부터 열감이 빠르게 퍼졌다.

“흣…….”

치영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제 입에서 그런 소리가 튀어나올지 몰랐던 터라 지레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

“…….”

그러나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놀려 댈 줄만 알았던 백한은 아무 소리 없이 치영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볼 뿐이었다.

색소가 옅어 회갈색으로 보이는 백한의 두 눈이 집요하게 치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열기를 품은 것 같기도 하고, 꼭 목마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기백한이?

그는 목이 마르면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누군가의 목을 따 더운 핏물을 삼킬 남자였다. 목이 마른 것을 기다릴 정도의 참을성이 전무하다는 뜻이다.

갖고 싶은 것을 부러 참은 적이 없고, 싫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치자면 안치영이야말로 백한이 싫어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 외에 기백한이 무언가를 참아 본 적이나 있을까. 식욕과 성욕을 필두로 하여 아주 기초적인 욕구부터 시작하여 거대한 욕망까지, 기백한은 늘 실현하며 살아왔다. 그에게는 그 욕구들을 실현하는 것이 인내하는 것 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저런 눈으로……. 마치 목이 말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치영이 두 눈을 깜빡이다가 백한의 이름을 부르려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이었다. 백한의 입술이 다가왔다. 달싹이던 치영의 입술 위에 그대로 닿을 것만 같았다.

치영은 백한과 했던 몇 번의 입맞춤이 생각났다. 그때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때는 백한이 미웠다. 그 입에 대고 헛구역질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결국 하지 못했고, 지금도 하지 못하겠지만 마음만은 정말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다가온 백한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 감각이 다시금 궁금해졌다.

에스퍼 파장을 미약하게나마 풀어 둔 것인지 서로 닿기도 전에 피부 표면에서 서로의 파장이 먼저 엉켜들었다. 각인한 가이드의, 각인을 나눈 에스퍼의 파장을 환영하며 말이다.

기백한의 파장은 신이 난 듯 치영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고양된 반응이었다. 살갗을 쓸어 올리는 파장의 감각이 여실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모로 젖혔다. 그 모습을 본 기백한의 두 눈이 커졌다가 느른하게 풀렸다. 치영은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 벨이 울렸다. 백한의 에스퍼 전용 핫라인이었다. 작전처나 중앙부, 중요 기관과 고위직급들이 에스퍼 기백한을 찾을 때 울리는 호출기 소리였다.

“…씨발. 장군급 아니면 호출한 새끼 꼭 죽인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치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내뱉고는 두 눈을 깜빡였다.

방금, 방금 뭐였지……? 머리가 멍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치영의 어깨를 백한이 잡아챘다.

“…너도 느꼈지.”

백한이 그렇게 묻는 순간, 치영은 제가 무얼 느꼈든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뭐, 뭐를…….”

백한의 호출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치영은 미약하게 인상을 썼다.

“다른 새끼 앞에서 다시는 그런 거 하지 마.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씹, 하고 욕을 집어삼킨 백한이 치영의 턱을 잡아 올렸다. 잡힌 턱이 아팠다. 백한은 치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꺼진 센서 등이 백한의 움직임으로 인해 다시 켜졌다.

그사이 옅은 어둠에 적응했는지, 갑작스러운 빛에 치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백한이 그런 치영을 바라보며 마땅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생긴 건 야해 빠져서는…….”

…뭐? 그건 또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 넋이 나갔다.

치영의 생김새는 단정하고 바른 편이지, 야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야한 쪽을 고르자면 가이드들 사이에서도 눈빛만으로 수태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소문이 떠도는 백한 쪽 아닐까.

치영은 억울했지만, 백한은 어느새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상태였다.

“왜요, 씨발.”

“…….”

수화기 반대편에서 대뜸 욕을 하며 받은 백한에게 호통을 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는데 누구의 것인지, 또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알아들은 단어라고는 호래자식이 다였다.

“그럼 전화를 뭐, 곱게 받아요? 지금 한 발 빼려다가 막혀서 기분 존나게 더러운데.”

백한이 치영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오싹, 치영은 또 한 번 소름이 끼쳤다. 갑자기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춥거나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이건 오히려……. 거기까지 생각한 치영은 눈을 질끈 감으며 붉어진 목덜미를 손으로 문질러 감췄다.

그러나 기백한은 그런 부분까지 핥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 자체가 끈적한 타르 같았다. 치영은 그 검은 타르 속에 맨몸으로 잠기는 기분이었다.

그때, 상대방이 수화기 반대편에서 무어라 얘기하는 것을 듣던 백한이 그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안치영을, 어쩌겠다고?”

제 이름이 들리자 치영은 놀라 백한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센서 등이 꺼졌다.

치영은 숨을 삼켰다. 불이 꺼지기 직전, 백한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그대로 망막 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