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36화 (36/114)

36화

“어디까지 오실 겁니까.”

“글쎄. 남편 직장 궁금해하는 게 잘못인가.”

백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남편이라니.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더 말하기도 짜증이 나 싫증 나면 가겠지 싶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치영은 그때 백한을 내쫓지 않은 것을 빠르게 후회했다. 이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뭐야. 가이딩이 부족해? 그런 건 근성으로 이겨 내야지.”

무슨 가이딩 부족을 근성으로 이겨 내. 미친놈인가?

기백한은 자기 집 안방도 아니면서 한쪽 베드에 떡하니 누워 들어오는 에스퍼마다 참견을 하고 있었다.

가이딩이 부족해 가이딩실에 왔다가, 반쯤 누워 껄렁거리는 백한을 보고 하얗게 질린 에스퍼들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정말 왜 저러는 걸까. 따라온다고 할 때부터 안 된다고 했어야 했는데. 이미 늦은 일이었다.

“가이딩 대체제도 안 먹어 보고 그대로 가이딩 받으러 왔다 이거지. 그렇게 나약해서 나라 지키겠어?”

…여기가 가이딩실이니까 가이딩을 받으러 왔겠지. 멀쩡한 공용 가이딩실을 두고 굳이 가이딩 대체제를 복용하라고 시비를 걸다니.

어이가 없어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자, 이름도 모르는 에스퍼를 갈구던 표정 그대로 이쪽에 대고 윙크를 찡긋거린다.

뭘 잘 못 먹은 하마……. 치영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컨퍼런스에 간 가이딩실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당직인 진혁과 저뿐이었기 때문에, 가이딩이 밀린 상태였다.

에스퍼들이 줄을 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그게 보이지 않는지 침대 하나를 차지한 기백한은 도통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야, 고작 이 정도 수치로 후다닥 가이딩실로 튀어 왔다 이거야?”

그러는 와중에도 바둑판 옆 못된 영감처럼 훈수 두기를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는 치영이 가이딩 하려는 에스퍼의 차트를 들여다보더니, 가이딩 고갈 때문에 끙끙 앓고 있는 에스퍼에게 으르렁거리기까지 했다.

“그걸 왜 중령님이 보십니까. 개인 정보법에 위배됩니다.”

치영이 어이가 없어 그의 손에서 차트를 낚아채려고 하자, 손으로 치영의 뺨을 쭉 밀어내며 차트를 높이 들어 올렸다.

어른에게 무시당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라 정강이라도 차 주고 싶었지만 상대는 중령. 증인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기백한의 정강이를 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야, 너 이 정도면 삼박 정도는 노상에서 잠복할 수도 있는 양인데 굳이 가이딩 받아야겠냐?”

“네, 네……?”

파리하게 질린 에스퍼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기백한은 그의 가이딩 잔존량을 보며 쯧, 혀를 찼다.

“난 이만큼 남았을 때도 사막에서 물 안 먹고 사흘을 잠복했었는데. 제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웃기는 소리 하네. 치영의 눈빛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에스퍼의 가이딩 잔존량은 꽤 심각한 상태였다. 기백한이 그 상태에서도 철수하지 못하고 사막에서 굴렀다는 말은 임무에 같이 나선 가이드가 없었다는 얘기다.

각인을 한 가이드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가이딩을 굶고 다닌다고 대놓고 얘기하다니.

그런 말들은 보통 그 에스퍼의 각인 또는 페어 가이드들이 게으르다는 말과 같다.

더불어 그들 사이가 형편없어 일부러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해 주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하마 새끼, 이제는 남 앞에서도 망신을 주는구나.

백한 앞에서 잔뜩 졸아 있던 에스퍼만이 그 뜻을 알아챘는지 덩달아 안색이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치영은 백한을 밀치다시피 하며 그 에스퍼에게 방사 가이딩을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얘 꾀병이라니까.”

옆에 있다가 치영의 방사 가이딩을 느낀 것인지 백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치영은 방사 가이딩을 거둬들이고는, 곧바로 그 에스퍼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안치영, 너 뭐 하냐?”

“접촉 가이딩 시작하겠습니다. 수치 안정화 될 때까지 움직이면 안 됩니다.”

치영은 낮게 깔린 백한의 말을 무시하고는 곧바로 접촉 가이딩을 시작했다. 그 에스퍼는 가이딩 고갈 현상이 꽤 심한 상태였고, 저는 등급이 낮으니 예방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적어도 하마 새끼는 빡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냅다 가이딩을 들이붓던 순간이었다.

“읏, 잠, 아—.”

치영에게 손을 잡힌 에스퍼의 체온이 훅 올라가며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팍에 붙은 노드를 따라 모니터에 송출된 심박수 또한 아주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이 씨발, 이 새끼 지금 느낀 거야?”

그 반응에 놀라 눈만 크게 뜨고 있던 치영은, 제 옆에서 어마어마한 기세로 에스퍼 파장이 날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치영의 손목을 낚아챈 백한이 더러운 것을 떨구듯 에스퍼의 손을 팍 쳐 냈다.

“중령님! 뭐 하시는 겁…….”

“흐으, 좀만, 좀만 더 하면 되는데,”

말도 안 되는 행동에 기백한을 노려보던 치영의 손목을, 눈이 게게 풀린 에스퍼가 턱 잡아챘다.

“읏,”

억센 악력이었다. 힘이 세다, 약하다가 아니라 뭐라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무뿌리에 얽매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치영의 자력으로는 절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치영을 잡고 있는 에스퍼의 반응도 이상했다. 동공이 풀린 채로 꺽꺽거리는 꼴이, 꼭 일정량 이상의 가이딩을 한꺼번에 주입받아 과민 반응을 보이는 양상과 비슷했다.

이지를 잃고 침까지 흘려 대는 에스퍼의 얼굴을 치영은 조금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기괴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뒤에서부터 치영을 껴안듯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의 손목에 붙은 에스퍼의 손가락을 뒤로 꺾어 간단히 떼어 냈다.

“아악—!”

“수작 거는데 아주 좋다고 손잡아 주더라? 이 새끼 눈은 또 왜 이래. 약 빨았나.”

쯧, 하고 혀를 찬 백한이 빨갛게 변해 버린 치영의 손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치영에게는 괴력에 가까웠던 에스퍼를 단번에 제압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대로 잡아 내리눌러 다시는 치영에게 닿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기백한은 고작 한 손으로 에스퍼를 제압했다. 나머지 한 손은 여전히 치영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빨갛게 부어오른 곳에 엄지를 가져다 댄 후, 덧그리듯 문질렀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기백한이 왜 저는 다르다고 여기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치영에게는 갑자기 달려든 에스퍼나 기백한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손목을 확 잡아 빼자, 치영을 예민하고 새침한 사람처럼 대하며 유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 어……. 한 번만. 가, 가이드님, 한 번만 더…….”

그 와중에도 에스퍼는 여전히 치영에게로 닿지 않을 손을 뻗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백한의 기에 눌려 말대답도 못 하던 주제에, 백한이 저를 저지하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휘적거리는 태도가 이상했다.

‘왜 저러는 걸까.’

확 풀어진 동공이 꼭 며칠 전 병동 앞에서 주저앉아 치영 쪽을 바라보던 에스퍼들을 생각나게 했다.

치영은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그때였다.

휙 다가온 팔이 치영을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옅은 목련 향에 석인 자작나무와 머스크 향이 끼쳐 들었다.

단단한 품 안에 안긴 상태에서도 눈앞의 에스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치영은 등 뒤에 닿은 백한의 가슴팍으로부터 무언가를 느꼈다.

“뭐…….”

뭐냐고 물으려던 치영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무섭도록 쨍한 에스퍼 파장이 가이딩실을 뒤덮었다. 백한의 것이었다.

압박감에 치영이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저도 모르게 명치를 붙잡고 고개를 숙인 치영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뱀처럼 휘감았다.

“으, 끄윽—!”

치영에게 손을 뻗었던 에스퍼가 목이 졸리기라도 한 듯 제 목을 붙잡으며 끅끅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치영의 두 눈을 커다란 손바닥이 가렸다.

“안치영 가이드, 예쁜 것만 보세요.”

그 말뜻이 평소와 같이 자신을 놀리는 내용임이 분명한데도, 치영은 대꾸할 수 없었다.

내뱉는 음성이 서늘하기도 했지만, 방 안을 메운 에스퍼의 파장이 치영을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숨을 쉬면 호흡의 부산물이 나오는 것처럼, 가이드들 역시 자연스레 가이딩이 피부 표면에 흐른다.

방사 가이딩은 가이드가 이 흐름을 더욱 빨리, 더욱 많이 조절한 결과값이라고 할 수 있다.

치영의 경우에는 가이딩의 양이 현저히 적었기에 피부 표면을 타고 흐른다고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그 양이 0에 수렴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한의 에스퍼 파장은 치영의 이런 미세한 가이딩까지 단속하겠다는 듯이 치영의 주변에서 세를 불렸다. 마치 양이 울타리를 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서는 개처럼 말이다.

그동안, 두 사람의 눈앞에서 끅끅거리던 에스퍼는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 그만…….”

치영이 제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백한을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사이에 파장은 점점 더 강해졌다. 이능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이능을 쓰기 전에 나오는 파장만으로도 상대를 찢어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백한의 에스퍼 파장이 치영을 가두듯이 옥죄어 오고 있어 말을 내뱉기도 힘들었다.

“그, 만하라니까……!”

힘들여 말 한마디 하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 백한을 떼어 내려 할 때였다.

백한이 그대로 허리를 굽혀 치영을 제 어깨 위에 짊어지더니 그대로 에스퍼의 뒤통수를 뻑, 하고 후려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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