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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35화 (35/114)
  • 35화

    “뭡니까?”

    “향수 바꿨어?”

    향수는 무슨 향수. 뭐냐고 물었는데 황당한 소리만 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치영은 향수를 써 본 기억이 없다.

    어이가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빡이자, 그걸 내려다보는 백한의 얼굴이 묘했다. 치영으로서는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표정이 없는 얼굴과 반사광이 극도로 줄어든 탓에 그저 검게만 보이는 눈동자가 끈질기게 치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백한의 눈동자 색은 진한 잿빛에 가까웠다. 완전히 검다고 하기에는 색소가 옅은 먹색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검어 보였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백연이 네 타입이었나?”

    분명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 있을 때 한 말인데 어떻게 들은 건지. 괴물 같은 하마 새끼.

    치영은 살짝 질린 나머지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 본 눈빛이 꺼림칙한 탓도 있었다.

    그때, 기백한이 싱긋 웃었다. 방금 전 묘한 기색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닌데. 우리 치영이는 나같이 생긴 애들 좋아하는데.”

    열 받는 말만 하고 있다. 안 좋아한다고 부정하자니, 치영은 아직 기백한을 마음 한편에 두고 있었다.

    요령 좋게 ‘나는 너 따위는 좋아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고 말하면 좋으련만. 치영은 그런 재주가 부족했다.

    “내가 또 우리 자매님한테 뒤처지는 것도 안 좋아하는데.”

    “안 좋아하는 것도 많으십니다.”

    “응. 안 좋아했었는데 좋아진 것도 있고.”

    그러더니 치영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킁킁거린다. 간지러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치영은 백한의 턱 밑에 손바닥을 대고 쭉 밀어 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고개를 살짝 틀어 저를 밀어내는 손바닥 위에 입술을 묻었다.

    “파장은 또 어디서 묻어온 거야. 기분 더럽게, 씹.”

    “…….”

    파장? 손 처장의 것을 말하는 걸까? 백연의 에스퍼 파장을 백한이 구분 못 할 리 없으니 뭔가 묻어 있다면 손 처장의 것일 테다.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된 괴물이면 가이드에게 영향을 끼친 다른 에스퍼 파장까지 구분한단 말인가. 징그러운 하마 새끼. 치영은 대뜸 짜증이 났다.

    어지간히 잘나신 나머지, 다른 에스퍼들은 눈치도 못 채는 파장을 감지하다니.

    일반인으로 치자면 접촉도 없이 잠깐 대화를 나눈 상대의 향수 냄새를 치영의 몸에서 맡은 것과 다름없었다.

    하마는 후각도 뛰어난 편인가? 치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앞에 있는 것은 하마가 아님에도, 내내 하마라고 속으로 흉을 봐서 그런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딴생각을 하고 있는 치영의 정수리 위에 제 턱을 올린 기백한이 장난치는 아이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꽤 빨빨거리고 돌아다녀, 응?”

    “이거 놓으십쇼. 왜 이렇게 달라붙습니까?”

    제 볼을 꼬집으려는 손등을 찰싹 쳐 내고는 그의 가슴팍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다했으나, 그 역시 쉽지 않았다.

    저는 온 힘을 다하느라 헉헉거리는데, 백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치영을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같은 애들 그냥 둔 적이 없는데.”

    “…….”

    “거슬리면 다 밟아 죽여 버렸거든. 근데 넌 되게 거슬리는데 또 밟고 싶진 않단 말이지.”

    “…충분히 저를 밟고 계십니다.”

    치영의 말에 백한이 피식 웃었다.

    유려한 입술선이 위로 말려 올라가고, 동시에 왼쪽 눈매에 있는 눈물점이 아름답게 이지러지는 광경은 몇 번을 봐도 살 떨릴 정도로 예뻤다.

    그러나 치영은 이제 장미가 아름답다고 제 온 마음을 장미에 바치는 머저리 짓은 그만하기로 저 자신과 약속한 참이었다.

    “넌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 중인지 모를 거야.”

    “중령님은 참을성이라고는 없는 분이십니다.”

    “깜찍한 말 좀 그만해. 내가 여기서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애교를 부려.”

    애교? 내가 언제? 치영의 무표정 위로 어지간히 황당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엘리베이터는 막힘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시시껄렁한 말장난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이거나 놓으십쇼. 여기 중앙부 건물입니다.”

    치영의 그 말에 드디어 백한의 팔 힘이 서서히 풀렸다. 그 품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며, 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하마 새끼, 종잡을 수 없이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데 탁월하다. 치영이 미간에 실금을 그은 채로 서 있는 것을 바라보며 백한은 그의 볼을 검지로 쿡 찔렀다.

    “화났네?”

    “…….”

    짜증이 극에 달한 치영이 한마디 하려고 눈을 꾹 감은 순간이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버렸다.

    치영은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휙 내려 버렸다.

    뒤따라오는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슬슬 쫓아오는 것 같은데 사람이 거대하고 보폭이 크다 보니 금세 가까워졌다.

    “근데 우리 치영이가 중앙부에는 왜 온 걸까.”

    …왜 안 묻나 했다.

    그러나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 구구절절 변명하는 사이도 아니고, 백연에게 했던 변명이 통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또 기백한이 저를 의심하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지가 의심하면 어쩔 건데. 치영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손진화의 임무에 참여하는 것이 백한과 저, 둘 모두에게 좋은 일임은 틀림없었다.

    저는 센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기백한은 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기백한도 각인을 해제하고 싶으니 전투 가이딩 기술을 익히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말 또 씹지.”

    “훈련은 또 안 합니까? 지난번에 완료를 못 했지 않습니까.”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는 치영을, 백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았다. 탐색하는 듯한 눈이었지만 치영은 딱히 숨기는 것이 없었다.

    손 처장에게 빌붙어 받아 낸 임무로 전역을 희망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임무 내용이 극비라서 그런 것일 뿐 그를 속이려는 마음은 없었다.

    기백한도 군인이니 그런 임무에 대해 자잘하게 설명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백한도 자신에게 어떤 임무를 나가게 됐는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잘못되거나 다칠까 봐 전전긍긍하던 모든 순간마다, 백한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임무나 파병을 나가면 풍문으로 듣고 바보처럼 걱정하던 나날들만 씁쓸한 뒷맛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각인을 맺은 에스퍼와 가이드가 그런 사이밖에 못 되는데 그를 좀 속이면 어때서, 또 그가 좀 알면 어때.

    기백한이 뭘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나 싶었다. 그리고 저 요망한 하마 놈한테는 뭘 숨기겠다고 생각한 즉시 들킬 것이 뻔했다.

    “형을 물로 보네, 우리 치영이가.”

    “…….”

    “좋습니다, 안 소위님. 뜻대로 한 번 해드려야죠. 남들은 제 가이드라면 업고 다닌다는데 그동안 내가 우리 안치영이한테 너무 섭섭하게 했지?”

    다정한 척 말하는 내용도 쓰레기와 다름없었다. 그 말 한마디에 치영이 애써 왔던 모든 것들이 무용해지고 말았다.

    ‘네가 지난날 내게 이러이러했지 않느냐.’ 하고 한마디라도 따지고 들면, ‘그러니까 내가 사과했잖아.’라고 축약시켜 버리는 말과 다름없었다.

    지난 몇 년간을 죽지 못해 살다가 창창한 나이에 울화병까지 얻은 치영에게는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위로였다.

    치영은 감정이 사라진 두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딱 1년 전이었다면 치영은 기백한의 그런 언사에 꼼짝없이 속았을 것이다. 그마저도 열흘 굶은 사람처럼 매달려 고맙다고 받아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치영은 다르다. 오늘의 치영은 어제의 모든 것들을 포기한 상태였다.

    기백한이 사과하고 위로한다고 해도 그가 미워서 받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저와 그 일들이 저와 상관없기 때문에 받아 줄 수가 없었다.

    치영의 그런 기색을 모른 체하며, 기백한은 다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빌어먹을 건물에 왜 왔는지 더 안 물어볼 테니까 퇴근 같이하자.”

    백한에게도 중앙부가 빌어먹을 건물이기는 한가 보다. 처음 찾은 공통점이었다. 치영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가이딩실 들어가 봐야 합니다.”

    “거기는 씨발, 일하는 사람이 너뿐이야? 왜 맨날 너만 일해.”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자기가 중동까지 파병 나갔다 오는 것만 일인가.

    치영도 맡은 바 업무가 있는데 그까짓 것도 일이냐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애써 눌러 두었던 짜증이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중이었다.

    가이딩실 사람들을 안 좋게 말하는 것도 거슬렸다. 남들은 제 살처럼 대한다는 각인을 나눈 사이인데도, 치영에게 제 페어 에스퍼인 기백한은 가이딩실 직원들보다 멀고도 멀었다.

    지금 당장 고꾸라져 쓰러진다고 해도 보호자로 부를 사람은 치프님이나 희정, 진혁, 기백연이지, 기백한은 아니었다.

    치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백한을 쏘아보려다가, 그마저도 귀찮아 그만두었다.

    “중령님 백수 새끼십니까? 저는 아닙니다. 일 마치고 퇴근해야 합니다.”

    “너 뭐 올해의 우수 군인상 노려? 땡이 까자는데 정색하는 놈은 처음 봤다.”

    기가 찬다는 듯이 말한 백한이 치영의 어깨 위에 팔을 터억 올렸다.

    …무거워. 하마 새끼니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일인데도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남자 가이드는 혐오스럽다고 웩웩거리던 놈답지 않게 요즘 들어 스킨십이 진해졌다. 전에는 더러운 것에라도 닿은 듯 끔찍해했으면서.

    그러나 변덕이 하루 이틀도 아니기에 치영은 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백한이 제 뒤를 어디까지 따라올 것인지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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