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초조한 기색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전역이 제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손 처장이 더 자세히 알게 된다면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입매를 굳히고 “그렇습니까.” 하고 단조롭게 대답하는 치영을 슬쩍 보던 손진화가 몸을 기울였다.
“근데 나는 자네 각오가 궁금해. 어디까지 할 수 있겠어?”
“무슨 말씀이신지.”
“이게 극비 임무라 나한테도 좀 중요한 사안이거든. 안 소위 각오 정도는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개소리만 지껄이는 폼이 짜증 났다. 임무 내용도 들었고, 이악의 대장도 입국했다는데 각오는 무슨 각오야.
치영은 손 처장이 저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F급 가이드의 역량이 훌륭해서, 또는 어떤 임무를 맡기든 훌륭히 해낼 것 같아서가 아니라 한 번 쓰고 버리기에 아주 적절한 폰과 다름없는 패가 아니던가.
안치영은 퀸은커녕 룩이나 비숍도 되지 못하는 말이었다. 실패한다면 모른 척 그 자리에서 바로 낙오시켜도 모를 만큼 하찮은 인사.
그것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무슨 각오씩이나 들어.
갖고 논다고 생각하니 빡이 쳤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에스퍼들은 다 똑같다.
“예, 뭐… 열심히 하겠습니다.”
“…….”
저쪽이 원하는 것은 치영의 절박함일 것이다. 치영이 지난 몇 년간의 센터에서 생활하며 깨달은 것은 사람이 절박할수록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였다.
다 싫어서 전역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전역 자체가 절박하다는 것을 손 처장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손진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치영을 바라보다가 흠, 하고 목 울리는 소리를 냈다.
“음… 그래. 사실 나로서는 안 소위를 믿는 수밖에 없지.”
“…….”
나름 관용을 베풀었는데도 믿어만 달라는 입에 발린 말 따위를 하지 않는 치영이 거슬리는지 손 처장이 불편한 얼굴을 했다.
치영은 또 한 번 초점을 흐렸다. 이럴 때는 모르는 척 구는 것이 상수다. 굳이 이쪽의 목줄을 네가 틀어쥐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할 필요는 없다.
치영같이 하찮은 인생들은 제 몸짓을 부풀리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만만하게 보이면 바로 물어뜯긴다는 걸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치영은 강하지 않지만, 약하지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고꾸라져 죽고 싶은 것과 남이 저를 무시하게끔 두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내보였는데도 치영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쯧, 하고 혀를 찬 손진화가 소파 앞 테이블에 서류를 던지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자, 이게 안 소위 위장 신분이야.”
박인수라는 이름과 함께 연도를 따라 그 시답지 않은 박인수의 일생이 어떻게 흘러왔는지가 한눈에 보였다.
치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박인수는 일반인으로 되어 있었다.
치영과 같은 F급이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으니 오히려 소프숍 종업원으로 위장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외울 건 지금 외우고, 서류는 두고 나가.”
“네.”
“슬슬 핑곗거리는 만들어 놔야 할 거야. 그래야 위장 취업이든 뭐든 할 수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치영은 단조롭게 대답했다. 손진화는 그만 나가 보라는 식으로 손을 저었다.
한 번 더 서류를 뒤적인 치영이 그대로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고는 경례 후 작전처장실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근데—.”
“…….”
“기 중령이랑은 근래에 사이가 좋은가 봐?”
뜬금없는 소리에 치영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진화를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들리는 소문에 그렇다는 얘기지.”
말의 의도가 명확했다. 너는 각인한 에스퍼에게도 버림받는 병신이니 이쪽에 붙어 아양이나 떨어 보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비열할 거면 작정하고 비열하든가. 기백한과 비교하자면 가렵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치영은 제 에스퍼가 저를 아껴 주지는 않았지만, 참 많은 단련을 시켜 줬다는 것을 인정했다.
빈정거림, 모욕, 또라이 같은 짓을 늘 당하고 살다 보니 손진화쯤은 가소로울 정도였다. 치영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네, 사이 좋은데요.”
“…뭐?”
“오늘 아침에도 뽀뽀했습니다.”
손진화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치영은 표정 없이 다시금 눈썹 끄트머리에 손날을 붙이고는 몸을 돌려 작전처장실을 나섰다.
하마 새끼가 저를 두고 갖고 노는 것에 재미를 붙인 것 같으니, 이 정도 값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마 새끼가 비열하고 비정하고 싸가지 없고 인과 예 두루두루 갖추지 못했지만, 왜 제 이름을 함부로 팔고 돌아다니냐며 치졸하게 굴 성격은 아니었다.
도리어 치영이 제 이름을 싸게 매도한 것이 흥미롭다고 낄낄거리며 웃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백한의 가이드로서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던 것은 나름의 자존심이었다. 그가 저를 가이드로 인정하면 그때 정당한 대우를 받고 싶었다.
물론 소용없는 짓거리들이었다.
이제 이 임무를 성공시키기만 하면 치영도 전역이니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 본인도 신경 쓰지 않는 이름 하나 빌린다고 해서 거슬릴 것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안치영이.”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기백연이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작전처의 여러 방들이 모여 있는 층을 벗어나지 못한 참이었다.
치영 같은 한미한 인사가 이곳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치영은 속으로 좆됐다는 생각을 했지만 표정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백연이 저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이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안 소위가 왜 여기 있나.”
기백연은 슬쩍 인상을 쓰고 있었다. 백연을 모르는 이들이 보면 서슬이 퍼렇다 생각하겠지만, 치영은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치영은 예전부터 준비해 둔 변명을 꺼냈다.
“저등급 가이드 대상 특별 심사가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치영은 제 엄지로 제 뒤편 복도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작전처가 한 층 전체를 쓰기는 하지만, 맨 끄트머리에는 가이드 심사 부서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로 등급이 낮은 가이드들을 위한 심사 부서인데, 워낙 부서도 작고 하는 일도 없어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아예 없애자니 가이드 인권회에서 벌떼같이 들고 일어설 것이 자명해 방 한 칸만 내준 실정이었다.
백연 역시 에스퍼이기 전에 가이드지만, 그녀 같은 고등급 가이드들을 담당하는 부서는 다른 층에 따로 있었다.
“…그렇군.”
게다가 백연은 어째서인지 치영의 가이드 등급이 낮음으로 해서 받는 미미한 차별들을 싫어했다.
치영의 등급이 낮은 것이 백연의 탓도 아니고, 그녀는 오히려 치영에게 꽤 많은 편의를 제공했음에도 안타까움에 얼굴을 굳히고 태도조차 삐걱거렸다.
그런 백연을 흘끗 본 치영은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만 살짝 웃었다.
“어디 가시는 길이셨습니까.”
“음, 나도 작전처 왔다가 가는 길이다. 가이딩실 가는 길이면 태워다 줄까?”
그 말에 치영은 군 보급품으로 지급되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꽤 많이 흐른 터라 케이스 컨퍼런스는 벌써 끝났을 테니, 이대로 가이딩실로 가도 될 것 같다.
“네, 감사합니다.”
“가지.”
백연이 자연스럽게 앞장서고, 치영은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 천천히 얘기를 나누었다. 기백연 역시 말이 많지 않고 과묵한 편이지만, 꽤 생각이 잘 맞아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지 않았다.
둘 다 시끄러운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말소리가 크지도 않았다. 백연은 치영이 말을 나누기에 편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백한이 치영을 외면한 시간 동안 백연이 책임감을 갖고 챙겨 주기도 했는데, 그게 오해를 사기도 했다.
“김한나 대위님이랑은 잘 지내십니까?”
“…묻지 마. 대답할 말이 없다.”
백연은 답지 않게 착잡한 얼굴을 했다. 김한나 대위는 동죽대의 에스퍼였다.
백연과 치영 사이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치영과 백연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무얼 상상하든 사실이 아니니까.
그러나 김한나의 오해는 특별했다. 특히 백연에게 말이다.
“잘생기셨으면서 연애는 못하시는 게 웃깁니다.”
“본관이 웃긴가? 안 소위라도 웃었으면 됐다.”
백연이 무뚝뚝하게 말하며 엘리베이터의 문으로 시선을 돌린 그때였다.
“그러게. 뭐가 그렇게 웃길까? 나도 알려 주지 그래.”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던 것은 기백한이었다. 치영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기백한은 팔짱을 낀 채로 그런 치영을 내려다보았다.
꼭 파충류의 그것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어디 갔다 온 건가.”
백연이 의아한 기색으로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백한은 그대로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을 뻗어 치영을 끌어당겼다.
“엇,”
방비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러운 힘에 끌어당겨진 치영의 이마가 백한의 가슴팍에 퍽 부딪혔다. 딱딱한 품에 잔뜩 끌어안긴 터라 어안이 벙벙했다.
백연이 저도 타려 발 하나를 엘리베이터를 향해 내디딘 순간이었다. 백한이 그대로 닫힘 버튼을 눌러 버렸다.
“이게 뭐 하는—.”
“자매님은 계단으로 와. 운동 좀 하셔야지.”
그러고는 닫히는 문틈 사이로 윙크를 했다.
치영은 그 작은 틈새로 백연의 황당해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딱 봐도 근육이 장난 아닌 백연더러 운동 좀 하라니.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엘리베이터는 막힘없이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치영은 숫자가 내려가는 계기판을 바라보다가 어이가 없어 백한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