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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33화 (33/114)

33화

오후에는 병동에서 가이딩 고갈 환자 케이스 컨퍼런스가 잡혀 있는데, 그쪽에서 공용 가이딩실 사람들도 듣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해서 당직인 진혁만 남기고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공용 가이딩실은 크게 보았을 때 의무 병동의 속하기 때문이다.

병동 쪽 의료 가이드들은 하나 같이 콧대가 높은 편이라 공용 가이딩실 사람들을 자주 무시하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기백연의 입김이 들어간 듯했다.

그녀가 아니라면 병동에서 열리는 스터디에 가이딩실 사람들을 끼워 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다들 은연중에 공용 가이딩실을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그걸 배워 봤자 뭐 하냐는 태도였다.

그러나 백연의 입김이 닿으면 잡음이 싹 사라졌다. 그게 어이가 없기도 했으나, 가이딩실 사람들에게는 그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죽대의 일로 분주하여 그렇지, 기백연은 꽤 훌륭한 실장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이딩실 사람들의 역량을 늘려 줄 만한 스터디나 컨퍼런스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애써 주었기 때문이다.

“전 이런 게 재미있더라고요.”

희정이 지난 컨퍼런스 자료들이 든 파일을 끌어안은 채로 웃으며 말했다.

일반인이었을 당시 간호사였기에, 에스퍼와 일반인을 비교할 수 있는 케이스 컨퍼런스가 열리면 다른 이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듣고는 했다.

잘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조금 끄덕인 치영은 좀 나아지려나 싶어 엄지와 검지 사이 오목한 부분을 꾹꾹 누르며 말없이 걸었다.

“희정이가 간호사 선생님 출신이라 공부 욕심이 좀 있는 편이야, 그치?”

“네. 아무래도 배웠던 거랑 비교하는 게 재미있어서요.”

치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걸었다. 치영은 반 발자국 정도 뒤에 떨어져서 걸었다. 괜히 저 때문에 가이딩실 사람들까지 도마 위에 오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단정한 생김새인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인상적인 구석이 없는 외모로도 치영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생김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기백한의 사탕 껍질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병동 입구로 들어갔을 때였다.

“이게 누구야.”

“…….”

손 처장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복도로 향하려던 일행을 다른 쪽에서 나타난 그가 붙잡았다.

…왜 친한 척을 하지? 팔을 벌리며 친한 척 다가오는 것이 이상해 치영은 경례할 생각도 않고 멀뚱하게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몸을 돌린 희정이 기웃거리더니 치영의 어깨 너머로 손 처장을 발견하고 의아한 기색으로 경례했다. 치프도 마찬가지였다.

치영은 그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제가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뒤에야 손날을 귀 옆에 붙였다.

“쉬어, 쉬어. 우리 사이에 경례는 무슨.”

우리 사이? 어째 어감이 이상했지만, 치영은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손 처장은 가만히 제 말을 기다리며 서 있는 치영을 보고는 픽 웃더니 치프를 향해 말했다.

“임 치프, 내가 우리 안 소위 잠깐 빌려도 되겠지?”

“아… 지금 저희가 케이스 컨퍼런스를 가던 중이라…….”

“에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 말에 치프와 희정이 희미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병동 소속 가이드들이나 팀 소속 가이드들은 이런 케이스 컨퍼런스 참여 기회가 많았다. 오히려 업무 외 일 같다며 귀찮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용 가이딩실 사람들에겐 이런 컨퍼런스의 참석 자체가 드문 일이라, 손 처장의 말이 딱히 고깝게 들렸다.

하긴 손 처장 역시 기백한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안하무인이긴 했다.

기백한이 못난 곳 없이 잘나기만 하여 범인들의 사고방식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손 처장은 도련님처럼 엘리트 코스만을 밟은 탓에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타입이었다.

그러니까 딱히 먼저 나서서 차별하지는 않지만, 공용 가이딩실에 소속된 가이드들이 당하는 차별 자체를 그런 일 없다 못 박을 만한 인간.

치영은 치프와 희정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치프님, 제 자리 맡아 놔 주실 수 있습니까.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그럴래?”

치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치영은 손 처장에게로 몸을 돌리고는 앞장서라는 듯이 멀거니 바라보았다.

손 처장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소속 가이드들끼리 우애가 좋네?”

“네, 뭐…….”

딱히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대충 대답하자, 손 처장이 치영의 어깨에 팔을 올린 채로 그를 잡아끌었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왜 이렇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대는 거야.’

치영은 짜증이 났지만 손 처장을 기백한처럼 막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손 처장보다 기백한이 만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손 처장에게 얻어 낼 것이 있으니까.

안 그래도 손 처장을 먼저 찾아가 보려고 하긴 했었다. 임무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반항 없이, 치영은 손진화의 팔 아래 제 몸을 둔 채 얌전히 걸었다. 그가 어떤 눈을 하고 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치프에게 자리를 잡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손 처장은 치영을 중앙부 건물로 이끌었다.

또 제 집무실로 가려나. 치영은 조용히 손진화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임무 자체가 기밀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중앙부 건물에는 그다지 좋은 추억들이 없는 편이었다. 백한과의 페어를 승인받았던 곳도 이곳이었다.

재수 없는 건물이었다. 처음으로 매칭률 테스트를 하고 기백한의 가이드가 되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설명을 들으며 꿈에 부풀었던 것도 이 건물에서였다.

그때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했었다. 자신이 기백한이라는 훌륭한 군인의 가이드가 되고, 그의 곁에서 최선을 다해 군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얼마나 영광이라고 여겼던가.

물론 그 당시에는 행복한 일이었다. 그 이후가 문제여서 그렇지.

당시의 치영은 빈약한 상상력으로도 앞으로 달라질 무수한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가 기백한의 가이드가 되고, 기백한이 제 에스퍼가 되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행복에 빠져 있던 치영은 바로 이곳에서 그 발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다른 이가 보았을 때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아주 희미하게, 치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얼어 죽을 영광.’

치영이 짤막하게 지난날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손 처장의 집무실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문 앞에 서서 치영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자, 들어가자고.”

“…네.”

그는 치영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까짓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떡 버티고 서서 내가 너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생색이라도 내는 듯한 표정이 재수 없었다.

그러나 치영은 더 재수 없는 인물에게 잔뜩 면역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기백한은 치영에게 재수 없음과 짜증만 주지만, 손 처장은 재수는 좀 없어도 전역이라는 카드를 쥐고 있는 상대가 아니던가.

군말 없이 그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손 처장은 치영의 그런 모습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찐득거리는 시선이 달라붙는 것 같아서 치영은 어쩐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사람을 왜 저렇게 봐.’

역시 앞의 평가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손 처장의 재수 없음에서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징그러움이 느껴졌다. 기백한에게는 없는 그런 징그러움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인지라, 치영은 그냥 손 처장이 안내하는 대로 그의 집무실 가운데에 놓인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손 처장은 씩 웃으며 그런 치영의 앞자리에 앉았다. 언뜻 보면 호남형인 얼굴인데 웃으니 무척이나 느끼한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거슬렸다.

“근데 안 소위 등급이 F던가?”

무례하게 내뱉는 유들거리는 말투도 본인 딴에는 산뜻하다 느낄지 모르겠으나, 이쪽의 불쾌감을 상쇄시켜 주지는 못했다.

아까도 가이딩실 사람들에게 개소리를 지껄이더니, 이제는 치영의 등급이 그에게 멸시와 다름없다는 것을 모른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본인만 유쾌하면 타인도 유쾌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굳게 믿는 점이 거부감을 들게 했다.

남들이 제게 무례하게 굴 때면 바로 두 눈의 초점을 빼 버리는 치영은 이번에도 손 처장의 인중 언저리를 바라보며 바로 시선을 흐렸다.

“아니, 내 말은 안 소위가 그렇게 저 등급 같지가 않아서. 내 말 이해하지?”

뭘 이해해. 십새끼야, 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치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에 대한 설명이나 듣고 싶은데 저번부터 유독 쳐다보는 눈이 느끼하고 재수 없다.

“그보다 왜 부르신 건지…….”

치영이 말을 돌리자, 손 처장이 눈매를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고작 소위에 저 등급 사탕 껍질이 용건이나 말하라는 식으로 말을 자르자 기분이 상한 듯했다.

치영은 딱히 부정도, 변명도 하지 않은 채 그 눈빛을 그대로 견뎠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알아서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치들 중 최고봉은 기백한이다.

근 몇 년간 기백한의 옆에서 온갖 재수 없음에 면역이 된 치영은 손 처장의 무언의 언어를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위협하려는 것인지 에스퍼 파장까지 풀었으나, 백한의 것에 비하면 정전기와 다름없는지라 무시도 쉬웠다.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얼굴로 멍하니 초점이나 흐리고 있자, 이내 피식 웃은 손 처장이 입을 열었다.

“임무가 확정됐어. 이악의 대장이 귀국했다는군.”

“…….”

드디어.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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