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만해라, 안치영아.”
“…….”
“성질난다고 그렇게 걷어차면 되냐? 발목 못 쓰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중령님 같은 새끼들이 제일 비열합니다. 내가 언제 중령님한테 매달려서 제발 가이딩 하게 해 달라고 빈 적이라도 있습니까? 사람 비참하게, 씨발.”
억울함에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그것이 슬픔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눈물 같지도 않은 물기들이 뺨으로 흐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치영은 울지 않았고, 울지 않았기에 아무도 그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
어느 미련한 이들은 제 아픔을 토로하지 않고 그저 쌓아만 두다가, 끝내 썩어 버린 것을 망연하게 볼 뿐이었다.
치영은 딱 그렇게 미련했다.
그런 치영의 발목을 잡은 채로 빤히 보던 백한이 고개를 모로 꼰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왜 넌 매달리지를 않을까.”
치영을 보는 눈빛에서 숫제 다정함까지 엿보였다.
염려와 애정, 가까운 이를 걱정하는 마음. 기백한과는 멀고 먼 얘기가 아니던가.
치영은 이를 악물었다. 놀림 받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까고 있네. 또 개소리나 하고 있지. 만만한 거 알겠으니까 그만 갖고 노십쇼.”
“험악한 거 봐. 마누라 패겠다?”
“누가 내 마누라야. 당신 같은 에스퍼, 내 마누라로 둔 적 없어.”
치영이 발목을 털어 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백한은 순순히 그를 놔 주었다.
대신 치영의 턱을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럼 나 말고 다른 새끼가 또 있나? 두 집 살림해, 자기야?”
말투는 장난스러운데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화를 참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무언가를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눈으로 치영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치영을 바라보는 기백한의 두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이거 발라 먹을 수도 없고 어떡하지?”
“수준 없게 굴지 마십쇼. 제가 중령님 장난감입니까?”
악에 받친 치영의 말에 백한이 피식 웃는다. 가소롭지 않다는 듯한 비웃음에 악이 받쳤다.
“장난감? 예쁘다 예쁘다 해 줬더니 사람 상처 주네.”
“…….”
“다 좋은데 치영아, 형도 노력 중인 거 안 보이니?”
노력 같은 소리 하네. 지가 먼저 한 키스에 헛구역질을 해 놓고 무슨 노력.
그가 무슨 노력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치영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면 성공한 셈이었다.
백한이 저를 노려보는 치영의 뺨을 토닥이며 말했다.
“너한테 적응이라는 걸 하고 있잖아.”
백한은 다시 한번 씩 웃었다. 보기 좋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가 웃을 때마다 눈꼬리에 달라붙은 눈물점의 위치가 살짝 바뀌고는 했다.
치영은 그걸 보기가 싫어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다시 뺨이 붙잡혔다.
“내가 막내라서 응석이 좀 많아. 누가 내 노력 몰라 주면 콱 죽여 버리고 싶어지거든.”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장미의 꽃잎처럼 연약하게 웃을 줄 아는 남자. 백한은 밤이슬이 무서워 오므린 꽃잎처럼 청순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존나 비극이지 않냐. 각인한 가이드를 살해한 에스퍼 새끼?”
“…….”
“나는 자기랑 그렇게까지 비극적이고 싶지는 않거든.”
치영은 숨을 들이 삼켰다. 다시 내뱉지 않고 딱 이대로 숨이 멈춰 죽고만 싶었다. 맞닿은 곳에서부터 에스퍼의 파장이 넘실거렸다.
그 파장은 화내지 말라는 듯 저를 달래고 있었다. 부드럽게 가이딩을 간청하는 에스퍼의 파장이 백한의 말이나 행동들과는 딴판이라 비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치영의 암담을 짐작한 것인지 백한이 치영의 뺨을 도닥였다.
“그러니까 잘 지켜보라고. 네 가이딩 같지도 않은 거 받아 가려고 너한테 노력까지 하는걸.”
“…….”
백한은 말을 끝마친 뒤 다시금 고개를 내려 치영의 입술 위에 제 것을 붙였다. 치영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점점 더 좁혀져 오는 기분. 치영은 제 외사랑이 만든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 * *
제 노력이 그렇게 대단해?
영국 여왕도 하고 사는 노력이라는 걸, 저가 한번 해 봤다고 대단히 으스대는 꼴이 딱 재수 없었다.
치영은 짜증이 났다. 저는 맨날 하는 노력을 고작 몇 번 했다고 생색까지 내는 기백한이 얄미웠다.
하기야, 태어난 것만으로도 저절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넘쳐났을 텐데 구태여 노력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금 같은 노력을 제게 기울여 준다니 고마우셔라.
“치영이 뭔 일 있냐? 표정이 왜 그래.”
“엉? 안 소위님 표정 맨날 저렇지 않아요? 맨날 무표정인데.”
가이딩실 치프의 말에 옆에 있던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1년 365일 표정 없는 얼굴로 출근하여 표정 없이 일하는 치영더러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니 그 이유가 궁금한 듯했다.
치프가 고개를 절레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쟤 지금 짜증 났어.”
“…아닙니다.”
치영은 머쓱한 기분으로 제 뺨을 더듬었다. 멋대로 저를 물고 빨던 기백한을 다시금 생각하느라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치프가 발견한 듯했다.
원채 무감하기도 하고 얼굴에 티가 잘 나지 않는데, 치프는 치영의 기분을 잘 짐작하고는 했다.
그게 애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부터, 치영은 가이딩실에서 일하는 것에 좀 더 성의를 보이려 노력하고는 했다. 워낙 표정이 없으니 티가 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오늘 아침, 기백한은 열심히 치영에게 들러붙은 뒤, 아니나 다를까 헛구역질까지 해 준 후 그를 가이딩실까지 태워다 줬다.
“딴 데로 새지 말고 바로 귀가해야 착한 어린이다, 치영아.”
치영은 대답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 버리려 했다. 그대로 팔이 붙잡히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가려는 사람을 휙 끌어당기더니 기어코 뺨 옆에 입술을 붙였다. 꼭 친밀한 사람에게 하는 것 같은 그 스킨십이 치영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동시에 차갑게 얼렸다.
“이상하게 느낌이 더 좋네. 양은 여전히 감질나는데.”
“…….”
“내일은 훈련 가야 하니까 너네 치픈지 치킨인지한테 말하고 나와. 아니면 기백연한테 내가 말해도 되고.”
“그걸 왜 기 실장님한테…….”
“슬슬 동죽대에서 너 빼 와야지. 아니면, 왜. 동죽대가 더 좋아?”
치영의 어깨를 쥔 손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좋다고 말하는 즉시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라는 듯, 백한은 아주 친절하게 험악한 눈빛으로 치영을 바라보았다.
동죽대에서 딱히 무언가를 한 기억이 없으니 당연히 소속감도 없었다. 고개를 절레 젓자,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의 힘이 슬그머니 풀렸다.
백한은 산뜻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착하네. 나도 우리 자매님이랑은 싸우기 싫거든.”
대관절 기백연과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궁금하기는 했지만, 기백한은 유들유들하게 굴면서도 정작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치영에게 단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말해 준 적이 없었기에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다.
갖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가져다 놔라. 치영이 백한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했더라면, 적어도 제 에스퍼가 기백한이 아니었다면 치영의 바람은 좀 더 다양했을 것이다.
제 마음이 보답받기를 원한다거나, 제 에스퍼의 가이드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백한은 초장부터 치영의 의지와 희망들은 완전히 분질러 놓았다.
그런 날들이 지속되다 보니, 이제는 아예 저를 두고 뭔가 일을 벌이는 것 같아도 관심이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치영은 더 묻지 않고 그의 험비에서 내려 버렸다. 훈련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 동죽대에서 빼 오겠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궁금할 법도 한데 뭔가 얇은 막 같은 것이 더 이상 생각이 진행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치영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가이딩실 사람들은 다가오는 점심시간을 기대하며 메뉴를 읊었다.
“구내식당 점심 메뉴 뭐래요?”
“짬밥이 거기서 거기지. 누림동 가서 먹을까?”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온 치영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점심까지 먹었다가는 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치료 기계와 모니터 사이에 몸을 옹송그린 채로 숨죽이고 있었건만, 금세 희정에게 들키고야 말았다.
“앗, 안 소위님 또 끼니 거르려고 숨었죠?”
“아니, 아닙니다…….”
“아니긴. 밥 잘 챙겨 먹어야 아프지도 않지! 너 두통 심한 것도 다 밥 안 먹어서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치영은 치프의 말에 작게 중얼거렸다.
끼니와 만성 두통은 전혀 상관이 없는 듯했으나 두 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다 걱정에서 온 핀잔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치영은 저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을 베푼 사람에게는 한없이 유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결국 치영은 속이 더부룩한 상태에서 밥을 먹으러 끌려가야 했다.
누림동까지 끌려갔다면 외식의 특성상 부담스러운 메뉴를 먹어야 했을 텐데, 갑작스레 일이 생기는 바람에 구내식당에서 빠르게 먹고 끝내기로 했다.
다들 라면을 고르길래 치영도 라면을 골랐다. 몇 입 먹다 말아야지 하고 시킨 것이었는데, 식사를 그만하려고 할 때마다 진혁과 희정이 번갈아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한 젓가락 정도만 남기고 다 먹어야 했다.
결국은 체했는지 속이 답답하고 식은땀이 났다. 소화력이 모자란 제 탓이건만, 식사를 권한 사람들이 애꿎은 걱정을 할까 염려되어 치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안 소위님 왜 이렇게 걸음이 느려요. 빨리 와요.”
“…네.”
결국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