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배불러…….’
치영은 너무 배부른 탓에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겠지만, 원래 걷는 속도보다 조금 느려진 탓에 누림동 주차 타워로 가는 중인 일행에 비해 조금 뒤처져야 했다.
아침부터 이렇게 많이 먹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아침을 챙겨 먹는 일이 드문 편이었다.
이악에서 지낼 때는 아침이란 사치였고, 센터에 와서는 굳이 치영의 아침까지 챙겨 주는 사람이 없었다.
착각에 빠져 살던 2년 동안은 기백한의 비호 아래 있기는 했지만, 그는 그때도 파병 때문에 센터에 잘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침 먹는 습관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가뜩이나 사는 것도 힘든데 끼니를 꼬박 챙겨야 하다니. 원체 입이 짧은 치영은 식사를 매번 챙기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본인은 남들 먹는 만큼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치영은 비슷한 신장의 남성이 먹는 것보다 훨씬 양이 적었다. 눈칫밥을 먹은 역사가 오래되어 더 그랬다.
“뭐야. 배부르냐?”
저만치 앞서가던 백한이 언제 치영의 근처로 뒤돌아 왔는지는 모르게 불쑥 말을 걸었다.
그가 낄낄 웃으며 말할 때마다 입술 사이에 물고 있던 담뱃대가 꺼떡거렸다.
중간중간 요령 좋게 필터를 빨아들이는지, 끄트머리의 담뱃불이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입에 물고 있는 담뱃대 때문에 발음이 무너지는데도 양아치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게 다 고상하게 생긴 저 얼굴 덕이라는 것을 치영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온갖 양아치 짓은 다 하고 다니는 하마 새끼 주제에 얼굴은 성령을 쏟아부은 천사처럼 생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치영은 고작 겉모습에 속을 정도로 백한의 인간성을 드문드문 겪지는 않았다.
‘…흡연 구역도 아닌데 담배를 태우네. 찍어서 신고하고 싶다.’
치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백한을 흘끗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신고해 봤자 센터의 왕께서는 처벌 하나 받지 않을 테니, 신경 쓰기 싫다는 태도였다.
“다정하게 걷자, 응?”
백한은 그런 치영을 끌어당겨, 순이네를 찾아갈 때처럼 어깨동무를 한 채로 제 옆구리에 끼고 걸었다.
“좀 놓읍시다.”
“형 흥분되는데, 치영아.”
“아… 진짜 짜증 나.”
백한이 킥킥거리며 치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치영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작게 말해도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에스퍼들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에스퍼의 등급이 높을수록 오감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되는데, 춘란은 센터 상위 팀인 만큼 다른 팀보다 등급이 월등히 높은 에스퍼들이 많았다.
허인나가 혀를 쯧쯧, 찼다.
“개못된 초딩이 좋아하는 애 괴롭히는 거 같습니다, 대대장님. 왜 이렇게 안 소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십니까.”
“글쎄. 요즘은 진짜로 안달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허인나의 말에 치영의 목덜미에 고개를 박고 있던 백한이 그대로 키득거렸다.
…씨발. 치영의 기분이 급속도로 구려지기 시작했다.
뭔 생각으로 제게 들러붙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심을 다하여 꺼지라고 해 봐도 제 저항은 같잖은 취급을 당할 뿐이었다.
그것이 기백한과 안치영의 감정적 갑을 차이라고 할 수 있겠지. 치영이 아무리 그를 거부해도, 백한에게는 진심으로 와닿지 않을 것이다.
영악한 기백한은 안치영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네가 진심으로 나를 거절할 리가 없어.’라고 확신하는 표정, 눈빛, 말투.
그런 권력을 기백한에게 부여한 이는 바로 치영 자신이었다. 이제 와 불평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김민우 역시 백한을 흘끗 돌아보더니 허인나처럼 혀를 찼다.
그러는 동안 주차 타워에 도착했다. 타워 1층이 아닌 위층에 주차해 둔 건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일행을 따라가려는데, 백한이 치영을 다시 잡아당겼다.
“어딜. 넌 나랑 가야지.”
“김 중위님 차 타고 왔으니까 갈 때도 같이—.”
치영의 말은 다 끝맺지도 못했다. 그대로 납치당하듯 백한의 험비 쪽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짜증이 나 발버둥 치는 치영을 가볍게 제압한 백한은 이제 아예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대원들은 모두 2층 주차장으로 올라간 듯했다.
백한이 험비의 보조석 문을 열더니 턱짓했다.
“타세요, 얼른.”
“…….”
“째려보지 말고. 싸가지 없어 보여서 꼴리니까.”
그대로 눈알을 위로 굴려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치영이 말없이 보조석에 올라탔다.
타악, 문을 닫아 준 백한이 보닛을 돌아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가 차에 올라타자 험비가 조금 기우는 느낌이 났다.
치영은 여러 말 하기도 싫어 벨트를 매며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말했다.
“가이딩실에 가 봐야 합니다. 어제도 출근을 안 해서, 읍—.”
치영은 그대로 억센 힘에 턱이 붙들려 고개를 치켜들었다.
입술에 맞닿은 것이 말캉하긴 했으나 밀어붙이는 힘이 대단하여, 치영은 저절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읏,”
입술 사이로 부지불식간에 신음이 흘렀다. 백한이 피식 웃는 것이 맞닿은 입술을 통해 느껴졌다.
뜨거운 혀의 기둥이 입술을 가르며 들어왔다. 힘을 줘 꼿꼿해진 혀 끄트머리로 입천장을 슥, 쓸어내리는 바람에 치영은 저도 모르게 몸이 튀어 오를 정도로 놀랐다.
손바닥을 백한의 가슴팍에 대고 밀어내려고 해 봐도 밀리지 않았다.
백한은 신장이나 덩치 자체가 큰 편이지만, 그렇다고 둔중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얼굴의 생김새가 날카로운 기색을 띠기도 하고, 예민해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지척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 거대함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소리 없이 다가온 맹수에게 그대로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힉힉거려야 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딱 기백한다웠다. 밀어내려고 짚었던 그의 가슴 앞섶에, 치영은 어느새인가부터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호흡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흐읏, 하고 숨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숨이 모자랐다.
“잠, 깐, 아—.”
겨우 틈을 만들어 입술을 떼어 낸 순간이었다. 서로의 입술이 틈 없이 붙어버린 바람에, 잠깐이란 말로 입맞춤을 끝내려던 시도는 금세 무마되어 버렸다.
풀린 눈을 하고 내내 치영의 입술만 쳐다보고 있던 기백한이 그대로 다가와 겨우 벌려 둔 틈을 다시 메웠기 때문이다.
“읏, 으응—.”
츱, 츠읍, 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으나, 누구에게 나는 소리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았다.
으응, 하고 고개를 피하려는 치영의 허리를 두꺼운 상완으로 꽉 껴안은 백한이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저도 모르게 소름이 일었다. 등골이 오싹한 감각이 싫었다.
가슴의 정점으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옷에 스칠 때마다, 상박이 가깝게 붙은 탓에 얇은 기능성 전투복 너머로 기백한의 커다랗고 단단한 흉곽이 오르내리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때마다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감각이 싫었다. 기백한이 저를 밀고 들어오고, 저는 저항할 수 없는 그 감각들이 미웠다. 그 와중에 눈은 어느새 감겨 있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입안에 들어온 혀를 콰직 물어 버리고 싶은데 백한이 치영의 양 뺨을 한 손으로 잡고 있어서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안간힘을 써서 턱을 다물려고 하자, 백한이 킥킥 웃는 것이 입술을 통해 전해졌다. 제 입 안쪽까지 백한의 웃음소리에 울리는 기분이었다.
“아, 기분 죽인다. 아까부터 우리 자기랑 뽀뽀하고 싶어서 허벅지만 존나 꼬집었는데. 처말라 가지고 밥을 안 먹일 수도 없고.”
“…….”
백한은 치영의 허리를 감은 손으로 옆구리 등을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배부른 들짐승이 만족한 듯 그르릉거리는 것만 같았다.
느른하게 뜨고 있는 눈매에는 희미한 열기가 고여 있었다.
“나 잘 참았지. 상 줄래?”
“…다 했으면 꺼져요.”
치영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듣고 있던 백한이 그대로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버드키스를 해 댔다.
“오늘따라 이상하단 말이야. 나랑 같은 거 먹었는데 왜 이렇게 입술이 달까. 혼자 뭐 또 주워 드셨어요?”
“…개소리 좀, 제발.”
치영이 인상을 찌푸리든 말든 기백한은 집요한 눈으로 치영을 응시하다가, 제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느낌이 좀 다른데…….”
치영은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는 기백한이 짜증 났다.
기백한은 갑작스레 허리를 물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품 안에 있던 치영을 떼 내는 폼이 꼭 쓰레기라도 버리듯 가차 없었다.
우욱, 하고 짧게 헛구역질을 하는 꼴에 열이 받은 치영은 그대로 다리를 들어 올려 글로브박스를 부술 듯이 걷어찼다.
얇은 슬리퍼를 신고 있는 터라 발목으로 통증이 올라오는데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열 받은 것이 풀리질 않았다.
쫓아다니면서 애원한 적도 없다. 봐 달라고 무릎 꿇고 빈 적도 없다.
그런데도 늘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한다니.
치영은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글로브 박스를 걷어찼다. 결국 한쪽 이음새가 헐거워졌는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시 한 번 발로 차 아예 떨굴 작정이었는데, 빠르게 뻗어진 손이 치영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떼어 내려 했으나, 꼼짝도 하질 않았다. 기백한은 손이고 자신은 다리인데도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치영은 치미는 짜증에 두 눈을 꾹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