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백한은 치영이 대답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이제는 아예 치영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치고 제 품으로 끌어안다시피 당겨 걸었다.
몸이 맞붙은 탓에 움직임이 삐걱거려 성가셨다. 밀어내려 해도 밀리질 않았다.
“넌 내가 무슨 짓을 해서든 아침 안 챙겨 먹으면 죽는 인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돼지.”
“뭐라고 했어, 이 깜찍한 새끼.”
백한이 반대편 손을 들어 치영의 두 뺨을 꾹 눌렀다. 어깨에 아직도 걸쳐져 있는 팔 때문에 두 사람 사이는 틈 없이 가까워졌다. 단단하고 뜨거울 정도의 온기를 띄고 있는 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붕어 입술이 된 치영은 짜증을 냈다. 저리 가라고 가슴팍을 밀어 봤지만, 단단한 바위처럼 밀리질 않았다.
“미친 하마…….”
치영의 작은 중얼거림에 귀가 밝은 에스퍼가 “하마?” 하고 생각 없이 되물었다. 저를 가리키는 말인 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치영이 백한을 하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했다.
어느 날, 공용 가이딩실에서 근무를 끝내고 퇴근한 치영은 맥주 한 캔을 들고 젖은 머리를 털며 TV 앞에 앉아 아무 채널이나 틀었다.
동물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방영이 한창이었다. 그중에서도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립공원에서 사는 하마가 주인공이었는데, 마침 채널을 돌리자마자 하마가 사자 세 마리와 싸워 이기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사자가 먼저 하마를 사냥하려고 해서 저항하는 건가 싶었던 치영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성우가 상황 설명을 덧붙였다.
—이 하마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자를 공격 중입니다. 방금 전, 물속에서 악어의 꼬리를 깨물었던 것처럼 말이죠. 여기저기 시비를 걸며 다니는군요. 하마는 덩치가 매우 크고 힘이 세며, 정말 빠릅니다. 포악한 성격을 갖고 있죠. 저런, 사냥을 나가던 사자 세 마리가 억울하게 당했네요.
…기백한 아냐?
치영은 성우의 설명을 듣자마자 딱 그렇게 느꼈다.
게다가, 백한의 머리 색과 눈 색은 검은색이라기보다는 어두운 잿빛에 가까웠다. 꼭 회색의 피부를 갖고 있는 하마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치영은 백한을 속으로만 하마 새끼라고 불렀다. 이유 없이 남을 패고 다니는 아프리카의 깡패와 백한은 확실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치영은 내색하지 않고 걸었다. 기백한이 뒤에서 자신에게 하마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좀 놓고 걸읍시다…….”
“안 돼. 지금 기분 죽이니까 굳이 놓고 싶지 않아.”
또 접촉한 면을 따라 제멋대로 가이딩을 받아 가는 듯했다. 급기야는 아예 치영 쪽으로 몸을 완전히 기대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변태 새끼가 평소와 같군, 하고 생각하면 될 일이긴 한데 누림동을 걷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쪽을 흘끔거리는 것이 짜증 났다.
키가 192cm나 되는 데다, 존재 자체가 필연적으로 이목을 끄는 터라 기백한인 걸 모르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눈을 돌렸다가 그를 눈치채고 놀란 눈을 했다.
고목나무가 매미한테 매달린 꼴이라 치영 역시 눈에 띄었다. 벌써 몇 번이나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는지 모른다.
치영이 짜증을 내건 말건, 기백한은 전혀 개의치 않고 중얼거렸다.
“아, 근데 새벽부터 왜 이렇게 느낌이 좋냐, 너. 병원에서 뭐 맛있는 거 먹었어? 좋은 냄새 나, 씨발.”
“…….”
치영은 질린 얼굴로 대꾸도 않고 걸었다.
변태 새끼……. 멋대로 구는 백한에게 짜증이 불쑥 솟았다가도 하루 이틀인가 싶기도 했다.
그대로 몇 발자국 더 걷다 보니 그제야 ‘순이네 순두부’라고 쓰인 빨간색 간판이 보였다.
“좀 꺼집시다. 다 왔잖습니까, 순이네.”
“하, 아침 먹여야 되는데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냐고 너.”
“어지간히 하라니까.”
치영은 끄응, 소리가 날 정도로 힘을 줘 제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는 백한의 턱을 주욱 밀어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손목마저 낚아채더니, 손목뼈 안쪽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왜 이러는 거야, 짜증 나게.
덩치가 커다란 개가 제 몸의 무게는 생각도 안 하고 달라붙어 여기저기 킁킁거리며 핥아 대는 것만 같았다. 개는 귀엽기라도 하지, 이 새끼는…….
치영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쪽 팔을 포기한 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가 좁아 들어가자마자 일행이 보였다.
“어, 여깁니다.”
허인나가 숟가락을 높이 들고 휘휘 저었다. 어차피 가게 안에는 두 테이블밖에 없어 다 보이는데도 말이다.
“아니, 아까 헤어진 사람이 왜 이제 옵니까? 얼래, 뒤에 붙은 변태는 또 뭡니까.”
옆에 앉아 있던 김민우가 물수건에 손을 닦으며 왜 이제 오냐 타박하다가, 치영의 손목에 코를 박고 내도록 킁킁거리며 따라오는 백한을 보며 말했다.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탓에 입 밖으로 말을 내뱉을 힘이 부족했다.
“야야, 꺼져. 여기 얘 자리야.”
“아, 뭐야. 아무 데나 앉으면 어때요!”
백한이 성큼 걸어가 이인교의 머리를 주욱 밀어냈다. 이인교가 투덜거리면서도 자리를 비켜 주자, 테이블에는 두 사람의 자리가 완성되었다.
“사장님! 여기 밥 하나만 더 주세요.”
박형인이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대답하는 소리가 없더니, 순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인상이 험악한 아저씨가 나와 말없이 밥공기를 투욱 내려 두고 다시금 주방으로 가 버렸다.
치영은 그쪽을 보다가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의 양을 보고 질려 버렸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
가게가 좁은데도 배치된 테이블은 여섯 명이 앉기에 아까울 정도로 넓다 싶었는데, 아예 급식소인 양 반찬이 커다란 트레이 위에 올려져 있었다.
대접시도 아니고 트레이 위에 수북이 쌓인 오징어 볶음을 보던 치영은 테이블 한구석에 둔 쌈채소가 담긴 바구니로 시선을 돌렸다.
텃밭을 그대로 옮겨 왔다고 해도 부족할 양이었다. 그 어마한 양에 기선을 제압당한 치영의 앞으로 사장님이 두고 간 밥그릇이 배달되었다. 뚜껑은 닫힌 채였다.
“넌 그거라도 다 먹어라. 또 남기지 말고.”
기백한은 짐짓 엄한 보호자처럼 굴었다. 쓰읍, 하고 공기를 들이키는 소리를 섞어 말하는 꼴이 치영을 놀리고 싶어 하는 건지, 진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많다고 말하고 싶은데 제일 적게 먹는다는 이인교의 밥그릇조차 양푼이었다.
…먹다 남기자. 치영은 반쯤 포기한 기분으로 젓가락을 놀렸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는 박형인의 인사로 시작되었다. 순이네 벽면 한편에 걸린 시계는 이제 막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치영은 젓가락을 재개 놀렸다. 밥은 꽤 맛있었다. 대량으로 내온 것치고 정갈한 맛이었고, 오징어 볶음은 매콤하니 제법 당기는 맛이 있었다.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도 잠시, 치영은 열심히 밥그릇을 비우는 데 열중했다.
치영은 이것이 제가 심적으로 안심한 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저를 대하는 대원들의 태도가 변하지 않은 것을 보니, 또 훈련에 끼워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옅은 희망에 치영의 마른 어깨가 들썩였다.
입술을 말아 물고 약간 목이 메는 것을 견뎠다. 가슴 한편이 묵직했다. 치영은 그제야 제가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춘란대에 정식으로 소속된 것도 아니고, 저는 이들의 팀 가이드도 뭣도 아니지만 열심히 하고 싶었다. 갑자기 졸도해 버린 탓에 뭘 해 보기도 전에 훈련이 무산된 것이 무척이나 아까웠다.
나중에 박형인에게만 조용히 한 번 더 훈련하고 싶다고 말해 볼 용기가 조금이나마 생겼다.
하마 새끼가 대대장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훈련 스케줄은 부팀장인 박형인이 짜는 듯하니까.
그리고 기백한에게 말해 봤자, 진지하게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치영이 제 에스퍼에게 갖고 있는 기대감은 아주 미미하기만 했고, 때문에 그는 제 에스퍼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았다.
물론 그 점을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누가 쏘야에 소시지만 얌체처럼 골라 먹습니까.”
“꼬우면 진급해, 인나야.”
“장난? 김 중위님이랑 저랑 같은 계급이거등요?”
“내가 기수가 높잖아. 진급하라니까?”
허인나와 김민우가 투닥거리는 소리가 테이블을 가득 메웠다. 치영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만 입꼬리를 올렸다.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근데 거기는 왜 이렇게 말랐어. 밥도 시원찮게 먹고. 더 줘?”
그때 갑자기 주방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온 건지 사장님이 문틀에 기대어 무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김민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진짜 적게 먹죠? 가이드라서 그래요.”
“아아, 에스퍼가 아냐? 춘란에 가이드 새로 왔어?”
치영은 그 물음에 조그맣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레가 들린 듯이 기침이 작게 터져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 덕에 목덜미만 조금 붉어졌다.
그때 누군가의 손에 의해 물컵이 슥, 밀어졌다. 기백한의 곧은 손가락이 컵을 쥐고 있었다.
“아저씨가 갑자기 말 거니까 애가 놀라서 사레들렸잖아.”
“야, 이놈아. 난 말도 못 해?”
사장님이 울컥 화를 내며 욕을 구시렁거렸다. 백한은 짜증 난다는 듯 손을 저었다.
“식혜 내와요. 담가 놓은 거 있지? 다 알아. 호박식혜로 줘.”
“아니, 저자식은 맡겨 놨나—.”
사장님은 투덜거리면서도 등을 돌려 주방 쪽으로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덜그럭거렸다. 아마 식혜를 꺼내고 있는 중인 듯했다.
친밀해 보이는 것에 놀라 눈을 데굴 굴리는 치영을 향해 박형인이 말했다.
“자주 옵니다. 주로 제가 밥하기 싫을 때.”
“아…….”
박형인이 주말까지 삼시 세끼를 꼬박 처먹어야겠냐고 식구들을 타박하는 주부처럼 냉랭한 어조로 내뱉는 말에 치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와서 숨기느라 잘 먹지도 않던 상추로 입가를 가렸다.
어쩐지 무척이나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그냥 다 같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 것뿐인데 말이다.
그 후에 치영은 먹지 않아도 속이 든든한 탓에, 사장님의 타박까지 들어 가며 밥을 남겨야 했다.
남긴 반 공기의 밥을 백한이 말없이 가져가 그대로 한입에 털어 넣는 꼴까지. 뭐라 설명하지는 못하겠으나 묵직한 마음이 들었다.
명치가,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