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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29화 (29/114)
  • 29화

    “어쨌든 타세요. 지금 다들 밥 먹으러 갔어요. 박 대위님이 더는 밥 못 하겠다고 파업 선언 해서 누림동으로 아침 사 먹으러 갈 거예요.”

    “아, 네…….”

    누림동에 이렇게 이른 시간에도 여는 밥집이 있구나. 아침은 주로 굶기 바빴던 치영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년이나 센터 생활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에도 활기 넘치는 누림동에 가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세상은 저를 빼고도 너무나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김민우는 갑자기 닥친 부산스러움에 멍해진 치영을 닦달했다.

    “벨트 매세요, 벨트.”

    “아.”

    영구 박 터지는 소리를 낸 치영이 벨트를 매기도 전에, 험비는 빠르게 출발했다. 고개가 휙 젖혀질 정도였다. 김민우는 50km인 센터 내 규정 속도를 전혀 지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 오디오에서는 개러지 록이 나오고 있었다. 치영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노래였다. 베이스 중심에 비트가 햇살이 맑은 아침과는 약간 동떨어지게 느껴졌지만, 김민우는 상관없다는 듯 흥얼거리며 핸들을 쥐어패고 있었다.

    ‘…노래는 잘 못 부르시네.’

    치영이 내내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무렵, 차는 어느새 북문 근처를 지나 누림동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빨리 달렸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누림동 입구에서 비상등도 켜지 않은 채 정차한 김민우는 뒤따라 오던 차들이 빵빵거리든 말든 치영에게 내리라고 했다.

    “먼저 가 계세요. 순이네로 가시면 됩니다. 전 주차하고 갈게요.”

    그러더니 치영이 이렇다 할 대꾸도 하기 전에 이번에도 급출발하여 빠르게 가 버렸다. 브앙—, 하는 험비의 엔진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치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험비의 뒤꽁무니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순이네가 어딘데…….”

    치영은 허망하게 중얼거렸지만, 김민우의 험비는 이제 꽁무니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결국은 걸어서 순이네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쉬는 날이면 누림동에 와서 맥주 한잔씩 하는 등 시간을 보냈으나, 치영은 누림동에 많이 와 보지 않았다.

    꼭 필요한 물건, 예를 들어 세면도구나 속옷 등은 편의점식으로 각 동마다 배치된 PX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옷을 사러 나오는 일이 있긴 했으나, 하필 붐비는 시간에 온 탓에 놀러 나온 사람들 사이에 파묻히고는 했다. 결국 기가 쪽 빨린 채 원하는 것도 구매하지 못하고 그냥 가이드 전용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돈을 쓸 곳이 없어 통장 잔고가 나날이 늘어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센터 생활을 해 왔으면서 아침의 누림동이 꽤 활기차다는 것도 몰랐다고 생각하니 새삼 제 처지가 웃기기는 했다.

    치영은 그대로 쭉 걸었다. 병동에서 훔쳐 온 슬리퍼가 걸을 때마다 찍찍 소리를 내며 바닥에 끌렸다.

    치영은 커다란 마트 형식의 PX 옆 건물쯤에 멈춰 선 다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순이네가 어디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헤매야 했다. 대체 순이가 누군데.

    그런 생각을 하며 간판들을 눈으로 훑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치영의 어깨를 퍽 치더니 짜증을 냈다.

    “뭐야. 길 한가운데서.”

    본인이 먼저 쳐 놓고 성질을 내는 것이 웃겼지만, 치영은 내색하지 않았다.

    치영은 나름 센터 내 유명 인사였다.

    센터에 처음 들어와 아무것도 몰랐을 때, 센터장이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백한의 가이드랍시고 인사를 시킨 탓에 소문이 퍼졌었다.

    그때는 너무 어렸고 백한 역시 내내 파병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런 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몰랐다.

    거부해도 될 일과 거부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그냥 대단한 에스퍼의 가이드가 되었으니 의레 행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그저 센터장의 정치적 행보를 돕는 일인 걸 알았다면 거절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치영의 그런 행동들을 부정적으로만 여겼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나댄다며 부정적으로 퍼지던 뒷담화는 백한이 돌아온 뒤 두 사람 사이의 잡음이 일자, 그럴 줄 알았다는 조롱으로 변모했다. 그 발 빠른 변화가 아직 열려 있던 치영의 마음속 성장판을 부러트렸다.

    더욱이 기백한이 센터 내에서 너무도 유명한 탓에, 치영의 얼굴까지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가뜩이나 타인에게 관심이 희박한 치영으로서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제게 적의를 품는 것처럼 여겨졌다.

    지금처럼 말이다.

    “아니, 이게 누구야.”

    “…….”

    치영의 어깨를 친 에스퍼가 이죽거렸다. 치영을 위아래로 꼬나 보는 눈매가 수상했다.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이 신난 얼굴이 저열해 보였다.

    “뭐야, 누군데?”

    치영은 속으로만 한숨을 작게 쉬었다. 에스퍼의 옆에 있던 일행이 누군데, 하며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왜, 기백한네 껍질 있잖아.”

    기백한의 사탕 껍질이라는 뜻이었다.

    간만에 듣는 멸칭에 치영은 초점부터 흐렸다. 제 앞에 선 상대의 못생긴 인중이나 어깨 따위를 바라보며 딱히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않았다.

    “아… 그?”

    “그래, 그거.”

    사람을 앞에 두고 ‘그’ 나 ‘그거’ 따위로 지칭하는 모습이 참으로 괘씸했지만, 치영은 더 상대하지 않았다.

    그대로 지나쳐 걸으려는데 어깨가 붙잡혔다. 너무도 전형적인 시비꾼의 모습이었다.

    “뭐. 왜 잡는데.”

    “뭐어? 왜 잡는데에? 말이 짧다, 껍질아?”

    …지가 먼저 반말했으면서.

    치영은 속으로 불퉁하게 대꾸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닌지라 그냥 무시할 생각이었다. 치영은 어깨에 올려진 손을 치우고 다시 걸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뒤에서 버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깨도 니가 먼저 쳤다니까. 치영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근데! 꼴에 기백한 전용 껍질이라 이거지?”

    그걸 들은 건지 어쩐 건지 저벅저벅 다가온 놈이 기어코 또다시 팔을 붙잡는다.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뭐야. 내 팬이야, 너?”

    “악—!”

    어디선가 불쑥 나온 손이 치영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목을 툭 꺾어 버렸다. 까드득, 하고 인대와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기백한이었다.

    “씨발, 사인해 달라고 하지. 왜 여기서 팬 정모를 열어.”

    “으아, 악—!”

    통증이 상당한지 에스퍼의 눈알이 위로 휘릭 올라가며 숨을 꺽꺽거렸다. 옆에 있던 일행이 힉, 하고 놀랐다가 치영을 붙잡고 흔들었다.

    “말, 말려 봐요! 저러다 죽겠어!”

    “아… 중령님, 하지 말랍니다. 곧 죽겠답니다.”

    일행이 붙잡고 흔드는 통에 입고 있던 먼지 묻은 작업복이 쭉 늘어났다. 치영은 그걸 추켜올리며 멀거니 중얼거렸다.

    시키니까 말한 거지, 자신은 이 소란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행은 치영의 그런 얼굴을 보고 허, 하고 혀를 찼다. 손목이 잡힌 에스퍼는 이제 아예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이봐요, 안치영 가이드! 지금 사람 죽어 가는 거 안 보여요?! 말려 보라고!”

    “아니… 말렸는데…….”

    말렸는데 저 새끼가 안 듣는 걸 어떡해요. 치영은 또 한 번 눈의 초점을 흐려 모른 척하려다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중령님 그쯤 하셔야되겠습니다.”

    “가만히 있어 봐. 나 지금 팬미팅 중이야. 사이 단란한 거 안 보여?”

    하마 새끼는 여전히 치영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옆에 있던 일행은 이제 아예 졸도할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복장을 보니 가이드인 것 같다.

    그것도 기백한에게 손목이 꺾이고 있는 에스퍼의 가이드.

    어쩌다 저런 지질한 놈을 만나서 마음을 끓일까. 네 신세나 내 신세나 거지 같긴 마찬가지다, 하는 생각을 하며 멀거니 보다가 이내 혀를 쯧쯧 찼다.

    에스퍼 잘못 만나 고생하는 가이드들에게는 동변상련의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말리는 시늉이라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치영은 아예 실신한 것 같은 에스퍼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그의 가이드를 가리키며 기백한을 향해 말했다.

    “이쪽이 중령님 고소하겠답니다.”

    “뭐?”

    “뭐?!”

    기백한과 가이드가 동시에 치영을 돌아보았다. 가이드의 경악한 얼굴을 흘끔 본 뒤, 치영은 그냥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쨌든 백한을 멈추게 하는 효과는 있었으니 그럼 된 거 아닌가.

    치영은 백한이 손목을 놔 버린 탓에 바닥에 쓰러진 에스퍼를 훌쩍 넘어 걸음을 재촉했다.

    치영이 저까지 지나치자 백한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가이드가 이미 기절한 에스퍼에게 달려들어 깨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치영은 앞만 보고 천천히 걸었다. 순이네가 대체 어디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때, 커다란 손이 터억 정수리 위에 얹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눌린 앞머리 때문에 시야가 가려질 정도였다. 백한의 손이었다.

    백한은 머리 위에 얹은 손으로 자연스레 치영의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쪽 아니라 이쪽. 기다려도 왜 안 오나 했더니 길거리에서 시비나 털리고 말이야. 형한테 삐삐 치지 그랬어.”

    “…….”

    네가 날 기다려? 별소리를 다 듣겠네. 치영은 가당찮은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기다리는 것은 늘 제 몫이었다. 그거 잠깐 기다렸다고 득달같이 찾아오는 백한이 우습고도 생경했다.

    그래, 좋겠다. 너는 기다리다 답답하면 직접 찾으러 갈 수도 있고. 나는 그런 건 생각도 못 해 봤는데.

    원래도 표정이 없는 편인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안색이 희게 질려 버렸다. 치영은 대답 없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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