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28화 (28/114)

28화

또 저의 갑작스러운 두통과 이명 뒤 겪은 실신에 대한 설명도 듣고 싶었다.

두통은 늘 있는 일이지만, 이번 것은 조금 달랐다. 아예 머리가 갈라지듯 아픈 것은 처음이었다.

‘죽을 때가 된 거 아닐까.’

갑자기 그냥 죽어도 산재 처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장례식 정도는 해 주겠지. 현충원에 묻히지는 못하더라도.

치영은 제가 땅굴을 파고 있는지도 모르고 부지런히 이상한 생각에 몰두했다.

아무튼 이런 일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 문제는 여기서 제 담당 팀장이라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치영의 소속은 동죽대고, 훈련을 같이 나갔다 병동으로 데리고 온 것은 기백한이니 누구에게 보고가 갔는지 궁금했다.

무언가 검사라도 했다면 잦은 두통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검사를 한 기억도 없고, 그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다음에 와서 정밀검사를 다시 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치영은 그대로 나와 의국을 지나쳤다. 지난밤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치영을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뭐 딱히 검사를 한 것도 없는데 왜 입원까지 시킨 거야.’

작게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가, 휠체어를 탄 가이드와 몇몇 사람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하나둘 모이는 것을 보고 그냥 복도 끝 비상구 문을 열었다.

사람이 많아도 다 못 탈 정도는 아니었으나, 어쩐지 저렇게 사람이 많으면 회피하게 된다.

치영은 약간 머쓱한 기분으로 계단을 두서너 개씩 뛰어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느려.”

변명을 중얼거리며 말이다.

그렇게 1층에 도달했다. 비상구는 응급실 바로 옆쪽에 있었다.

출구까지 거리가 꽤 있는 편이라 그대로 몸을 돌리는데,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어엇, 이게 왜 이래?”

“어? 김샘, 이것도 그래요!”

“헉……! 이거 터졌는데요?”

삐, 삐빅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기계음이 산발적으로 울려 댔다. 치영은 생각보다 크게 들리는 소란에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살짝 호기심이 들어 고개를 쭉 빼고 앞을 주시했다.

응급실 안쪽에서 의무관과 간호장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오작동을 일으킨 기계의 스위치를 끄거나 아예 콘센트를 뽑고 있었다.

미처 끄지 못한 기계의 펌프와 압력계 바늘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가이드가 응급실로 실려 들어오면 체내에 잔존 중인 가이딩량을 측정하고, 생체 신호의 정보들과 결부시키는 가이딩 측정 장비들이었다.

문제는 이 기계들이 전부 한꺼번에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동시다발적 오작동 때문에 가뜩이나 정신없던 응급실이 전쟁터처럼 변해 버렸다.

‘어디 전선주라도 망가진 거 아니야?’

치영은 어깨를 잠시 움츠렸다가, 다시 몸을 돌려 출구로 향했다.

응급실에서는 해킹이라도 당한 건가 싶을 정도로 온 기계들이 난리가 났다. 양상은 그러한데, 막상 해킹이라고 하기에는 다른 곳은 조용하기만 했다.

에스퍼 병동, 가이드 병동 할 것 없이 의료 시설 장비들은 센터의 슈퍼컴퓨터가 모두 관리한다.

해커가 이 사달을 일으킨 것이라면 지금쯤 센터 내에 사이렌이 울릴 법도 한데, 응급실이 소란스러운 것치고 다른 곳은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게다가 난리 난 기계들이라고 해 봤자 집중 치유실의 생명 유지 장치도 아니고, 가이드 병동에서 청진기처럼 사용하는 가이딩 측정 장비뿐이었다.

“저런 거는 한 대 때리면 고쳐지는데…….”

고장 난 TV를 주먹으로 퍽 때려 멀쩡하게 만드는 것처럼 한 대 때려 보면 저 기계들도 멀쩡해질지 모른다.

치영은 작게 중얼거리며 병동을 나섰다.

아무래도 가이드 병동인지라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가이드로 보이는 이들뿐이었다.

이런 곳에 쳐들어와 침대에 떡하니 누워 있던 기백한은 역시 이상한 놈이 틀림없다.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수여하는 것이 자유로운 가이드들도 신체 내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는 에스퍼의 파장 자체가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에스퍼의 출입을 금지한 것인데 S+급이나 되어서는 가이드 병동에 숨어들다니.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이다.

하기야, 기백한이 미친놈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미친놈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인간보다 미친놈 소리가 어울리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

치영은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가이드 병동 울타리 안의 마지막 보도블록을 밟았다.

가이드 병동을 벗어나 대로변으로 나가 카트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꼴이 좀 우습기는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괜히 걷다가 어제의 두통이 재발할까 무서웠다.

재작년쯤, 기백한이 가이딩 고갈로 급히 귀환했길래 모든 가이딩을 다 넘겨주었다가 두통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다음 날, 두통이 좀 괜찮아졌다 싶어 체술 훈련에 참가해 연병장 한 바퀴를 돌자마자 이명과 함께 다시 두통이 찾아왔다. 두개골이 그대로 갈라질 것만 같은 고통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깨어나 보니 저는 의무실 간이침대도 아닌 소파에 누운 채였고, 기백한은 이미 출국했다는 말만 들었다.

가이딩만 받으러 긴급 귀국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급격히 허무해졌던 기억이 있다.

한 번 후유증을 겪어 보았으니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기 싫었다.

최대한 몸을 덜 움직여 두통 재발을 막아야 한다. 카트도 많이 흔들리는 터라 가능하면 타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정류장 쪽으로 한 발자국 내디딘 순간이었다. 치영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여기저기서 갑작스러운 신음이 터졌기 때문이다.

“윽,”

“아—!”

정류장 인근 인도를 걷던 사람들이 제자리에서 픽픽 무릎을 꿇거나 쓰러졌다. 헉, 하며 숨을 들이마신 채로 흉골을 붙잡고 쓰러진 사람도 있었다.

길을 걷던 이들이 모두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쓰러진 사람들은 대부분 에스퍼로 보였다.

군부에서 지급되는 물품이 가이드와는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자유복을 입고 있는 이를 제외하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옆에서 걷던 가이드들이 놀라 주저앉은 일행을 걱정하는 광경이 여기저기 펼쳐졌다.

…뭐야. 왜 저래.

멍하게 그 광경들을 바라보던 치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때, 쓰러졌던 이들이 모두 시선을 들어 치영을 응시했다.

“무슨…….”

방금 전까지 흉골을 부여잡거나, 무릎을 꿇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치영에게 향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족히 열댓 명은 넘어 보였다. 인도를 걷거나 차도 반대편에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있던 가이드들도 놀라 치영을 돌아보았지만, 영문을 알 수가 없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놀란 치영이 숨 쉬는 것도 잊고 움직임을 모두 멈췄을 때였다.

마치 자석을 이용해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것처럼, 방금 전까지 치영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들이 하나같이 시선을 돌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그러게. 갑자기 이상하네…….”

곁에 있던 가이드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쓰러져 있던 에스퍼들은 너무도 멀쩡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들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였지? 갑자기 가이딩이…….”

“뭐야, 뭐였는데.”

에스퍼들은 하나같이 제 명치를 부여잡았다. 제가 왜 쓰러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치영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돌리는 이는 없었다. 언제 쳐다봤냐는 듯한 태도였다.

치영은 소름이 조금 돋았다.

왜 야리고 지랄들이야. …여기 터가 안 좋은 거 아냐?

저를 바라보던 눈빛들이 너무 기묘해 터 타령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센터에 떠도는 오래된 괴담 중에는 전쟁 때 죽은 인민군들을 구덩이 하나에 다 밀어 넣고 그 위에 병동을 세웠다느니, 동문 입구에 있는 초대 센터장 흉상이 자정만 넘으면 코피를 흘린다느니 하는 소리도 있었다.

방금 전 응급실에서 겪었던 기계들의 동시 오작동도 이상했는데, 열댓 명의 에스퍼들이 일제히 저를 쳐다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돌려 버리니 갑자기 오싹해졌다.

“으악…….”

작게 탄성을 내뱉은 치영은 막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카트를 발견하고 냉큼 뛰어가 탑승했다.

평소의 될 대로 되라, 하던 기질은 어디에 둔 것인지, 카트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는 몸짓이었다.

사실 치영은 죽음은 두렵지 않은데 귀신은 약간 무서웠다. 빈자리에 앉은 치영은 소름이 돋은 팔뚝을 손바닥으로 연신 쓸어내렸다.

…소금 같은 거 뿌려야 하나? 맛소금도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카트 등받이에 등을 천천히 기댔다.

카트는 치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없다는 듯 계속해서 나아갔다.

숙소 지구인 난슬동 입구에서 내려 천천히 춘란의 숙소까지 걸어가고 있던 치영은 누군가가 저를 향해 꽥 소리를 지르는 걸 듣고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와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땡땡이치다가 길거리에서 엄마를 만난 초등학생처럼 흠칫 놀랐다.

험비에 타고 있던 김민우가 차 바퀴에서 끼익 소리가 날 정도로 급제동을 하더니, 창문을 내리고 치영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혼자 오면 안 되는 건가? 같이 올 사람이 없었는데…….

치영이 멀뚱히 눈만 깜빡이고 있자, 차 창문을 통해 김민우가 여전히 버럭거렸다.

“기 대대장님이 데리고 오라 해서 지금 가는 중이었는데, 아픈 사람이 왜 혼자 걸어오냐고요!”

“아…….”

그 말이었나 싶어 치영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악의, 적의, 심술 등으로 인한 호통은 들어 봤어도 걱정 때문에 누군가 제게 소리를 지르는 상황은 익숙지가 않았다. 치영은 더듬더듬 사과했다.

괜히 저 때문에 타인이 수고했다 생각하니 무척 겸연쩍었다.

“죄송합니다.” 하고 중얼거린 말은 듣지도 못한 건지 김민우는 기어코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더니 치영을 태우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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