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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27화 (27/114)
  • 27화

    “어디 갔다 왔길래 발바닥이 이렇게 시커메. 형이 또 닦아 줘야지. 간병 제대로 보여 준다.”

    너의 존재 자체가 병 유발이라고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문 치영은 몰려오는 피곤함에 두 눈을 감았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도대체 저놈의 태도가 왜 변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은 평생 기백한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이 세상에는 그저 흘려보내고 마는 게 나은 감정도 존재하는 법이다. 치영은 깨달았다. 제 사랑이 꼭 그러하노라고.

    구태여 애쓰지 않고 백한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이 다시 지끈 아파 왔다.

    그와 동시에 치영에게 닿아 있던 백한이 미간을 좁히며 갑작스레 치영을 내려다보더니 곧이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의아한 기색을, 치영은 알아채지 못했다. 치영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백한이 아닌, 백한을 잊는 법이었으니까.

    “아니,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간호장교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병실 쪽이 소란스러워 와 본 듯했다. 문을 열자마자 간호장교는 무섭도록 표정을 굳혔다.

    누가 봐도 에스퍼로 보이는 기백한이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에스퍼 출입이 금지된 가이드 병동에, 그것도 최고 등급인 기백한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버티고 있으니 간호장교도 어이가 없는 듯했다.

    그는 제가 보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뒤로 물러 치영의 병실 호수를 다시 확인한 뒤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에스퍼 출입 금지인 거 모르세요?”

    가뜩이나 2교대 야간 근무인 데다가 진상을 너무도 많이 겪은 터라 까칠해진 간호장교가 날 선 어투로 물었다.

    치영은 혹시나 기백한이 애먼 간호장교와 싸우면 어쩌나 싶어 슬쩍 몸을 일으켰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백한은 치영에게로 몸을 휙 기대며 손바닥을 치영의 귓가에 대더니, 그 방에 있던 사람이라면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했다.

    “헉, 자기야. 그러니까 내가 병실에서 몰래 하는 건 미친 생각이랬잖아. 아무리 우리 자기가 날 사랑해도 참았어야지!”

    ……? 미친 건 니가 미친 거겠죠.

    쓸데없이 넓은 어깨를 옹송그리며 애교 섞인 말투로 지껄이는 꼴이 가관이었다. 눈꼬리를 땅에 떨어트릴 듯 내리고서는 순진한 표정으로 아잉, 하고 치영의 어깨를 찰싹 때리기까지 했다.

    “자기는 정말 너무 밝혀.”

    치영이 밝히고 싶은 것은 제 누명뿐이었다.

    치영은 골이 띵 하고 아팠다가, 그런 그들을 한심하게 보고 있는 간호장교의 존재를 뒤늦게 떠올리고는 놀라 헉 숨을 삼켰다.

    그러고는 커다래진 눈으로 간호장교를 향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 아닙니다……!”

    “안이고 밖이고 전 모르겠으니까 얼른 나가세요. 신성한 병동에서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야.”

    그러나 간호장교는 치영의 최선을 다한 부정은 들어 주지 않고, 백한을 내보내는 것에만 열과 성을 쏟았다. 가지가지 한다는 표정은 덤으로 짓고서.

    치영은 억울해 미칠 것 같았지만 그는 변명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등이 떠밀려 병실 밖으로 쫓겨나면서도 기백한의 저주받을 주둥이는 멈추지 않았다.

    “자기야, 너무 서운해하지 마. 퇴원하면 맨날 하자?”

    …뭘 맨날 해, 미친 새끼야.

    백한은 치영에게 윙크까지 해 댔다. 간호장교가 그를 병실 밖으로 밀어내는 동안에도 말이다.

    백한이 간호장교에게 쫓겨나 버린 덕에 병실에는 치영만 남게 되었다. 치영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지듯 뒤로 발라당 누워 버렸다.

    “미친 하마 새끼, 간호관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 지금 퇴원도 안 되는데…….”

    억울한 마음에 과묵한 편이던 치영은 주르륵 불평을 쏟아냈다. 골이 다 아팠다.

    저야 그러고 가 버리면 끝이지만, 가이드들만 있는 병동에서 소문이 이상하게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짜증이 나고 억울했다. 정말 뭔가 애먼 짓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 새끼는 저랑 각인한 주제에 뽀뽀만 해도 구토하는 나쁜 새끼라고요. 그런 주제에 병실에서 몰래 뭘 어쩌고 저째?

    누군가에게 이르고 싶은데 상대가 없었다. 치영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래. 언제는 하마 새끼가 내 생각 하고 일 저지른 적 있냐.

    치영은 울상이었던 안색을 천천히 굳혔다. 서서히 모든 표정이 사라지는 광경은, 쓸쓸해 보이던 노을이 잠깐 한눈판 사이에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해가 져 어둠이 스미는 것만큼이나 급작스러웠다.

    그는 그대로 표정 없이 바로 누워 병실 천장만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병실에 있는 천장 텍스에는 작은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치영은 멀거니 텍스 위에 그려진 무늬들을 훑으며 두 눈을 깜빡였다.

    상념을 뚫고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한참 찾았지 뭐야. 너를 땅에 묻어도 보고, 장례도 치러 주고.”

    “…….”

    “근데 이런 곳에 있었네.”

    그는 저를 아주 잘 안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그건 뭐였을까.

    야산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는 분명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치영을 오래 봐 온 듯, 친밀한 척 굴었다.

    분명 치영은 그를 모르는데도 말이다.

    …뭐 또 다른 변태일 수도 있겠다. 이미 치영의 근처에는 그런 식으로 매번 이상한 행동을 해 대는 변태가 하나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상한 새끼네, 하고 말아 버리기에는 뭔가가 찝찝했다.

    도시락을 싸서 나왔는데 수저 세트에서 숟가락만 빼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젓가락으로도 밥은 잘 먹을 수 있으니 딱히 상관은 없는데도 묘하게 거슬리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까 보고를 안 했네.”

    의식을 찾았으니 야산에서 만난 놈에 대해 대대장인 기백한에게 보고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가 병실에서 선보인 종잡을 수 없는 또라이 짓에 질려 버려서, 그가 간호장교에게 쫓겨나기 전까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뭐 백한도 야산에서 만난 놈들에 대해서 딱히 치영에게 사후 설명을 해 주지 않았으니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아니면 굳이 그런 얘기를 치영 같은 곁다리에게는 해 줄 필요 없다고 생각했거나.

    춘란대 대원들끼리는 모두 정보 공유가 끝난 상태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추측은 조금 뼈아팠다. 속으로는 내내 전역 염불을 외워도, 어쨌든 집단에 소속된 이상 제 몫은 해내고 싶었다.

    그런 욕심은 치영에게만 유독 과욕이 되어 버릴 때가 많았다.

    어디에 속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았다. 치영은 늘 선 밖의 인물이었다. 그 안의 사람들이 하하 호호 웃고 있을 때, 무릎을 끌어안고 그들을 멀거니 바라만 보아야 했다.

    선 밖에 가만히 서서 언제나 들여보내 줄까 기웃거리다가 아무도 그럴 마음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전역을 결심했다.

    결심하고 나니 대체 제가 왜 지난 몇 년간 그 거지 같은 꼴들을 견디고 살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래. 그때는 뭔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등대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보답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학습 능력이 없는 짓거리였다. 그렇게 당하고도 또 믿다니.

    절망 속에서만 산 주제에 묘하게 희망찬 구석이 있는 것이 제 단점 중 하나였다.

    그러지 말걸. 그게 뭐라고.

    치영은 돌아누웠다. 어쨌든 하루가 길었으니 곤하기는 했다. 눈이 감기면 감기는 대로 두었다.

    막 잠에 들 무렵,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발 닦아 준다 해 놓고… 또 구라 쳤어.’

    일어나서 닦고 자야 할 텐데 몸이 너무 무거웠다. 천금 같아진 눈꺼풀을 끝내 들어 올리지 못한 채로, 치영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꿈에서는 계속해서 그 목소리가 나왔다.

    ‘잘자, 사이야.’

    속삭이는 음색이 치영을 옭아맸다. 온갖 어둠에서 나온 그림자가 치영의 발목을 잡고 놔 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사이야.’

    누군가 저를 계속해서 불렀다. 치영은 그쪽이 궁금하면서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내내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려도 어둠이 끝나지 않길래, 그냥 포기해 버렸다. 치영은 어둠 속에 몸을 누이고 늪처럼 저를 빨아들이는 것을 방치했다.

    그 이후로 암전처럼 잠에 들었다가, 동이 틀 무렵 병실 문을 연 간호장교에 의해 눈을 떴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안녕하세요.”

    어제 들어왔던 이와는 다른 간호장교였다. 다행히 어젯밤 일이 소문나지는 않았나 보다. 병동에서 음탕한 짓을 하다가 쫓겨난 가이드라는 오명을 쓰기는 싫었다.

    치영은 흘끗 간호장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싱긋 웃은 뒤 컵에 담긴 약을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패드에다 무언가를 입력하느라 바빠 보였다.

    치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치영 가이드, 오늘 퇴원하실 거예요. 조식 후에 여기 알약 드시고 퇴원하시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혹시나 어지러우시면 다시 내원하셔야 해요. 오늘 하루는 무리한 운동 하지 마시고요. 실신 이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담당 팀장님한테 보고드렸으니까 그쪽에서 들으시면 되고, 이따 퇴원 절차만 밟으시면 됩니다.”

    어제 들어왔던 간호장교와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이쪽도 그다지 치영에게 친절한 편은 아니었다. 제 할 말만 쏟아내고 가 버리는 간호장교의 뒷모습을 멀뚱히 보다가 치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식 후 먹으란 약을 그냥 입에 털어 넣고 물과 함께 삼킨 뒤, 치영은 침대에서 그냥 일어나 버렸다.

    입고 있던 환자복을 훌러덩 벗어 버린 후, 옷장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던 작전복을 다시금 꺼내 입었다.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기는 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훈련 시작 전 신고 나갔던 전투화는 어디로 간지 보이지가 않아 포기한 뒤에 병실에 딸린 욕실 구석에 박혀있던 삼선 슬리퍼를 신었다.

    굳이 아침 식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훈련이 예상치 못하게 종료되었으니 차후에는 어떻게 진행될지, 아니면 이대로 무산될지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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